154화
나와 로즈벨 백작은 거의 동시에 부정했다.
“아닌데요.”
“그건 반대일세.”
칼펜위버 후작은 어느 쪽에 대거리를 놔야 할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곧 내가 아닌 로즈벨 백작을 돌아봤다.
“왜 반대하십니까? 라파엘로 공작 각하만 한 신랑감이 제국, 아니, 대륙에 없다는 걸 잘 아시면서.”
“최고의 신랑감인가 아닌가와는 관계없네. 백작은 이상하지 않은 건가? 동생의 누이라는 사실만으로 남녀가 이어지고 가정을 이룬다는 게.”
누구랑 누가 이어져? 너무 멀리 간 거 아니야?
“하지만 웨더우즈 자작을 대하는 공작 각하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예전의 각하였다면 나도 좋게만 봤을 거라네.”
“지금은 아니란 뜻입니까?”
“그래, 이제는 많이 변하셨어. 불필요한 것들을 버릴 줄 알게 되셨지. 그게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닐세. 다분히 그럴 수밖에 없는 위치에 오르셨으니까.”
칼펜위버 후작이 어느 정도 동의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하지만 나는 라파엘로가 불필요한 것들을 버릴 줄 알게 되었다는 사실보다, 이 아저씨들이 남의 연애사에 더없이 진심이란 사실에 더 놀랐다.
“솔직히 말해서, 근래 공작 각하께서 보여 주신 모습에 많이 놀랐네. 안데르트 경, 아니, 블라디에프 백작에 대한 미련도 완전히 버리신 줄 알았는데…… 웨더우즈 자작에게 이토록 집착하시다니.”
“블라디에프 백작과 공작님은 그럴 만한 관계였죠.”
“하지만 웨더우즈 자작과는 그럴 관계가 아니야. 자작을 블라디에프 백작과 동일시하는 건 특별히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각하께서 언젠가 블라디에프 백작에 대한 미련을 내버리는 날이 온다면, 자작을 향한 각하의 관심도 지금 같지는 않겠지. 오히려 눈엣가시로 여길지도 몰라. 나는 그게 염려되네.”
그제야, 로즈벨 백작이 평소와 달리 남녀 연애사에 구구절절 관심을 보였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날 걱정해서였구나.’
생각해 보면 사냥제 만찬에서도 비슷한 조언을 했었지. 나는 로즈벨 백작의 걱정을 덜기 위해 나섰다.
“괜한 염려예요. 저는 라파엘로와 우정 이상으로 엮일 마음이 추호도 없거든요.”
“……흠. 뭐, 자작이 그렇다니 다행이다만.”
잠자코 지켜보던 라그휘르텐 백작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안면 튼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인데, 누가 보면 백작님이 웨더우즈 자작의 대부라도 되는 줄 알겠습니다.”
로즈벨 백작은 라그휘르텐 백작의 코웃음에 마주 코웃음 쳤다.
“대부는 아니더라도 남동생의 스승쯤은 되지. 그 정도면 아주 밀접한 관계야.”
“예에? 누가 누구의 스승이요?”
“흠. 젊은 나이에 귀를 먹었나? 이 늙은이가 안데르트 파거의, 아니, 안데르트 블라디에프 백작의 스승이라고 말했네.”
“영웅의 스승이라니. 날로 드시려 합니다. 블라디에프 백작이 먼저 떠난 게 아쉽네요, 정색하며 반박했을 텐데.”
갑론을박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정작 대화의 중심인 나만 미약한 후회를 느꼈다.
‘스승이라는 표현 하나에 저렇게 기뻐하실 줄 알았다면 죽기 전에 실컷 불러 드릴걸.’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데.
하지만 과거의 나는 로즈벨 백작과 검성을 스승이라 여기지 않았던 게 아니다. ‘감히’ 스승이라 부르지 못한 것에 가까웠지. 그들이 몇 번 베푼 호의에 나 스스로를 제자로 칭한다면 불쾌하게 여길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당사자인 로즈벨 백작이 “이 정도면 경과 나도 사제의 술잔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나?”라 우스갯소리를 해도, 그건 어른으로서의 배의(配意)지 진심은 아니리라 여겼다.
하지만 배려가 아닌 진심이었다.
이렇듯 뒤늦게야 과거의 오판을 직시할 수 있게 된 건, 단순히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일까? 이제 나도 더는 안데르트가 아니기 때문일까?
‘후자가 답이라면 그건 조금 슬플 것 같네.’
안데르트의 일생에서는 평생 알지 못했으리란 의미니까.
세 명의 영웅이 스승의 기준에 대해 진지하게 토의하는 동안, 나는 조용히 뒷걸음쳐서 그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길목 건너편에 우두커니 서 있던 검성이 나를 맞이했다.
“옛 동료들과는 잘 떠들었나? 이제 그만 가지.”
그는 자연스럽게 내 우산을 다시 빼앗아 들었다.
지난 4년 동안 흰머리도 늘고 주름도 더 깊어진 로즈벨 백작과 반대로, 여전히 안데르트와 비슷한 연배의 외형을 유지하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그를 볼 때마다 새삼 사람의 분위기에 눈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게 된다. 검성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노라면, 서른의 청년이 아닌 백전노장과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할 말 있으면 해라.”
검성이 말했다.
성이 점차 가까워지는 게 보인다. 로즈벨 백작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여서 그런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로즈벨 백작은 분명 훌륭한 스승이었지만, 기실 나는 검성에게 더 많이 배웠던 까닭이다.
‘그러니까 로즈벨 백작이 내 은인이라면 검성은 은인 중의 은인일 수밖에 없어.’
하지만 검성은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다.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며, 그런 불가사의한 면모는 이따금 명확한 욕망을 내보이는 적보다도 더 위험해질 수 있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검성을 상대로는 감상에 빠져서 마음이 약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 다짐을 다잡기 위해,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노골적이게 검성을 떠보기로 했다.
“공작님이 디안 케트의 손거울을 소지하고 계신다 전해 들었습니다.”
대리석 동상처럼 차갑고 단단하게 굳어 있던 검성의 얼굴 위로 흥미롭다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래, 내가 소유하고 있지. 그대가 눈알과 일기장을 소유했듯이. 생각해 보니 일기장은 빼앗기기까지 했군.”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웨더우즈의 하녀가 어디서 비슷한 물건을 구해 왔던 것 같기는 합니다.”
“염치없군. 황실의 보물을 탐한 죄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닐 테고.”
“방금 처음 알았습니다. 앞으로 명심하겠습니다. 물론 저는 그 보물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이지만요.”
피식 웃은 검성이 내게 물었다.
“그래서. 내놓으라는 건가?”
“예, 디안 케트의 손거울이 필요합니다. 원하시는 대로 값을 치를 테니, 그 물건을 저에게 넘겨주십시오.”
막상 입에 담은 후에는 괜한 부분에서 후회가 일었다.
‘로즈벨 백작의 상속…… 재산만은 그냥 받을 걸 그랬나?’
호기롭게 값을 치르겠다 외쳤는데, 검성이 아주 난감한 금액을 부른다면? 턱도 없는 대가를 요구한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다. 스승이고 은인이고 뭐고 훔치고 보자.
한데 검성의 반응은 내 예상보다 훨씬 이성적이었다.
“그 물건은 왜 필요하지?”
한데 그 이성적인 답이, 내 머릿속을 더 복잡한 미궁으로 끌어들였다.
‘솔직하게 답해야 하나?’
아니, 라파엘로는 몰라도 검성은 아니다.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검성은 동정심 하나로 순순히 물건을 내줄 성정이 못 됐다.
“그 부분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다면 이쪽도 힘들다. 중요한 실험에 활용되고 있으니까.”
“……실험이라니요?”
고심하는 눈으로 정면을 바라본 검성이 아주 느리게 답했다.
“디안 케트는 이름난 치료술사지. 그런 디안 케트의 유산에는 해석 불가능한 고대 마법이 새겨져 있다. 추출할 수만 있다면 다섯 개를 전부 모으지 않아도 발동할 수 있을 거다.”
유산을 통해 고대 마법을 추출한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창의적인 발상이었다. 너무 창의적이어서 검성의 논리력에 문제가 생겼나 싶을 정도로.
“반신이 새긴 마법입니다. 고작 한 개의 유산만으로 어떻게 발동시킨다는 겁니까?”
“자작의 불신은 당연하다. 나도 한때는 죽은 자를 다시 깨우는 수는 없다고 여겼지. 마귀를 직접 보기 전까지는.”
검성은 뱀 같은 시선으로 내 얼굴을 면밀히 훑었다. 그리고 이내 퍽 놀란 표정을 지었다.
“놀라지 않는군.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나? 그 정도로 깊게 접근했을 줄이야. 역시, 그 알펜 세레니예는 예사 인물이 아니었어.”
“그래서, 추출한 마법은 어디에 사용하시려고요? 시체라도 되살릴 심상이십니까?”
검성은 내 비아냥에도 능숙하게 대응했다.
“정신 치료.”
“정신 치료?”
“신의 치료술이라면 육신뿐만 아니라 정신도 치료할 수 있겠지. ‘그것’도 병이라 규정할 수 있다면.”
정신 치료.
지하르크 버클리그레이튼과, 정신 치료.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에서 한때 생체 마법 시술을 주도한 적이 있습니다.”
“비슷한 기술을 통해 정신 치료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마도 전쟁 후유증 치료였지요.”
마도 전쟁의 후유증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순서가 맞지 않아.’
참전 군인들은 오래전 정신 치료를 받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말인즉 검성이 언급한 치료는 이들이 아닌, 다른 이를 대상으로 한 치료라는 뜻이었다.
무려 반신 디안 케트의 힘을 빌려서.
“누구입니까?”
대체 누구기에 황제의 검이라 불리는 검성이 황실의 보고에 숨어들어 가서 훔쳐 가게 만드는 걸까?
일단 황제는 아닌 게 확실하다. 황제에게 정신병이 있었다면 일기장을 훔쳐 가는 게 아니라 받아 가면 되었을 테다. 소유주인 황제로부터 직접.
‘……정말 그렇나?’
만약 황제가 자신의 정신병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검성이 독자적으로 타개책을 강구하는 것이라면?
“글쎄.”
“나이도 드실 만큼 드신 분이 뭐 그리 비밀이 많아요? 그냥 말해 주면 좀 덧납니까?”
“덧날 수도 있다.”
검성은 한동안 말없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곧 천천히 등을 올리며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이미 한 번 말했을 텐데. 그대를 만나게 하는 것이 득일지 실일지 확신할 수 없다고.”
그 순간. 라갈 국립 평화원에서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떠올랐다.
“그대는 나타샤 황녀를 믿는가?”
“솔직히 말하지. 나는 그대와 나타샤 황녀를 만나게 하는 것이 득일지 실일지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곁을 스쳐 지나간 후. 마른침을 삼키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황제가 아니라 나타샤였어.’
나타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나란히 서 있던 두 시종이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양쪽으로 당겨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