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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53화 (153/195)

153화

시도 때도 없이 새로운 의구심을 들게 하는 것으로 모자라, 이제는 의구심 그 자체가 되어 버린 인물의 등장이다.

공작씩이나 되는 인물이 고작 나 한 명을 마중 나왔다고? 그것도 지하르크 버클리그레이튼이?

“공작님.”

“말하게.”

“저와 황제 폐하의 만찬에 눈치 없이 끼시려는 겁니까?”

하하. 검성은 재미없다는 얼굴로 건조하게 웃었다.

“끼어들다니, 섭섭한 표현이군. 나는 황성의 호위 총괄을 맡은 책임자로서 황제 폐하의 손님인 그대를 맞이하러 왔을 뿐이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하인과 궁정인들은 가능한 한 외출을 금하고 있으니.”

“아무 말단이나 보내지 그러셨습니까.”

“일일이 따지려 들지 말고 대충 한 번이라도 더 널 만나려는 속셈이었다고 생각해.”

뭐, 진심이든 아니든 내 입장에선 디안 케트의 유산에 대해 떠보기 자연스러운 기회였다. 검성은 황공하게도 직접 내 머리 위에 우산을 씌워 주었다. 어깨도 딱 달라붙어, 긴밀한 대화를 나누기 적절하다 여긴 순간.

“웨더우즈 자작!”

멀지 않은 곳에서 낯익은 방해꾼이 다가왔다.

“로즈벨 백작님.”

“이제야 도착했군! 기다리고 있었네. 내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겠는가?”

지금? 황성에서? 그답지 않게 막무가내라 퍽 당황스러웠다.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가야 하는데요.”

“알고 있네. 어차피 1시간 정도 기다려야 할 거야. 잠시 자작을 데려가도 괜찮겠습니까, 지하르크 공작 각하? 10분이면 충분합니다.”

검성은 검정색 우산의 끝을 내 어깨 쪽으로 더 가까이 기울이며 답했다.

“그냥 여기서 말하지 그래.”

“집안일과 관련된 사안이라서 말입니다.”

아.

어떤 용건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집안일을 운운해서인지, 아니면 실제 여유 시간이 넉넉한 건지 몰라도 검성은 더 이상의 반문 없이 나를 보내 주었다.

나는 로즈벨 백작이 건네받으려 한 우산을 중간에서 가로채, 정원 쪽 길목으로 앞장서서 걸었다. 로즈벨 백작은 군용 우비를 걸친 채로 내 곁에 바짝 다가오며 속삭였다.

“조심하게.”

“예? 뭐를요?”

“뭐겠는가? 황실이지. 여러모로 찝찝해서 호위를 구실로 며칠 더 머물기로 했네. 라파엘로 공작 각하도 이 근방에 계시고, 곁을 지킬 테니 걱정 말게나.”

나 하나의 안위 때문에 호위 업무를 연장했다고? 이런 감격스러운 선의를 다 봤나. 역시 제자를 생각하는 건 스승밖에 없다. 물론 지금의 나는 제자가 아니지만.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 때문에 따로 부르신 겁니까?”

“겸사겸사. 사실 연회 때 말하려 했는데, 알다시피 황성을 지키느라 시간을 많이 빼앗겼어. 연회장에 돌아왔을 때는 자작이 이미 귀가했더군.”

“무도회라는 게 아직 익숙지 않아서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흠흠. 작게 헛기침한 로즈벨 백작이 어울리지 않게 겸연쩍은 낯으로 말했다.

“이건 자네에게 가장 먼저 밝히는 건데, 내 아내가 늦둥이를 갖게 되었다네.”

늦둥이.

로즈벨 백작의 나이가 어떻게 되더라.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나이에 숫자 4를 더한 나는, 인간이 지닌 무궁무진한 번식 능력에 감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축하드립니다, 백작님. 가문의 경사네요. 백작 부인은 괜찮으십니까?”

“고맙네. 노산이기는 해도 아직은 문제없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작에게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다니, 기분이 조금 묘하군.”

십분 이해되는 감상이었다.

로즈벨 백작의 외동딸인 에나트 로즈벨은 웨더우즈 가문에 시집와, 후손도 보지 못하고 객사하지 않았던가? 로즈벨 가문 입장에서 웨더우즈 가문의 인상은 적잖이 부정적일 터였다.

“우리 가문의 작위와 재산이 자작에게 상속될 예정이란 건 이미 알고 있겠지? 에둘러 표현하는 건 내 화법이 아니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걸음을 멈춘 로즈벨 백작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침착한 어조로 운을 뗐다.

“웨더우즈 자작, 나는 우리 가문의 작위를 새로 태어날 내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다네. 재산까지는 바라지 않아. 수용하기 어렵다는 걸 알지만, 작위만은 내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게 허락해 주게. 진지하게 고려해 주었으면 해서 이렇듯 따로 부탁하게 되었네.”

“그러죠.”

“…….”

“…….”

“…….”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로즈벨 백작이 다시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 말을 잘못 이해한 듯하니 다시 설명하겠네. 로즈벨 가문의 작위를…….”

“제대로 들었어요. 확실하게 말씀드릴까요? 장원, 금품, 돈, 저택, 그 밖의 부동산 전부 필요 없으니 새로 태어날 아이에게 물려주시면 됩니다.”

로즈벨 백작은 조금도 납득하지 못하는 눈이었다.

“어째서인가?”

왜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그럴 마음이 없으니까.

그럴 처지도 못 되고.

‘하기야 로즈벨 백작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겠네.’

상속? 받으라면 받을 수 있다, 손해 하나도 없고 이득만 있는 구조이지 않은가?

그러나 나, 데이지는 웨더우즈 가문의 핏줄이 아니다. 에나트 로즈벨과는 같은 인간이라는 특징 외에 어떠한 공통점도 없는 타인이었으며, 심지어 죽을 날을 앞둬 오늘내일하는 처지이기까지 했다. 로즈벨의 재산을 상속받아 봤자 제대로 쓰지 못하고 공중 분해될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로즈벨 백작은 내 은인이니까.’

검성처럼 약 줬으니 병까지 주는 언짢은 은인도 아니다. 그에게서 받은 건 약밖에 없었다. 검에 대한 지식, 살아남는 법, 동료애, 그 밖에 애정이 없고서야 줄 수 없는 무수한 조언들…….

로즈벨 백작이 목숨을 걸고 휘두른 검에 수십, 수백 명이 죽을 위기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나만의 은인이 아니었다. 전쟁의 영웅이자 인류의 은인이었다.

그러니까, 로즈벨 백작의 입장이 곤란할 만한 일은 구태여 사서 하고 싶지 않았다.

영웅 로즈벨 백작에게는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그냥, 저한테는 필요 없는 것들이거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일세. 필요 없을 수가 없어.”

“그런가요? 하지만 저는 필요 없어요. 게다가 로즈벨 백작님은 제 동생의 스승님이나 다름없는 분이라 들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 빚을 갚으면 제 마음도 더 편안해질 것 같아요. 상속에 신경 쓸 만큼 여유로운 처지도 아니고. 동생을 돌봐 주신 데 감사한 마음을 표하는 셈 치겠습니다.”

가슴을 부풀리며 크게 숨을 들이켠 로즈벨 백작이 대뜸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진심으로 고맙네, 웨더우즈 자작.”

“그러지 마세요.”

“아니, 이건 마땅한 감사 인사일세. 게다가 빚이라니? 절대, 당치도 않아. 빚이라면 우리가 안데르트 경에게 졌지. 심지어 평생 갚을 수도 없는 은혜를…….”

말끝을 흐린 그가 오른쪽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 내게 건넸다.

“받게.”

“이게 뭡니까?”

“내 아버지가 남기신 결혼반지라네.”

흠칫 어깨가 굳었다.

“결혼반지요? 그런 걸 왜 저에게……”

로즈벨 백작은 심장 위에 오른손을 올린 채 경건히 입을 열었다.

“그 반지에 대고 맹세하겠다. 나, 고트 로즈벨은 데이지 웨더우즈의 친우로서, 그대가 나를 필요로 할 때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목숨을 걸고 도울 것이다.”

“백작님.”

“마음 같아서는 마법으로 맹세라도 새기고 싶지만. 자작의 몸이 성치 않으니 이런 식으로라도 증표를 남기는 게 마음이 편하겠어.”

“음. ……싸게 먹히셨네요.”

받은 반지를 주머니에 넣자, 로즈벨 백작은 한층 밝아진 얼굴로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자작의 말이 맞네. 말년의 운을 이곳에 다 쓴 모양이야. 앞으로가 사뭇 두려워지는군!”

그때였다.

“뭐가 그리 신나십니까? 로즈벨 백작님께서 그리 시원하게 웃으시는 모습은 근 몇 년 만이십니다.”

정원 안쪽에서 로즈벨 백작과 똑같은 외형의 우비를 쓴 두 명의 남성이 다가왔다. 칼펜위버 후작과 라그휘르텐 백작이었다. 다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런지, 한창일 때에 비해 수다에 관심이 많다.

“그럴 일이 있었네. 나와 자작만의 비밀이니 캐물어 봤자 소용없어. 아, 자작. 그러고 보니 남편감을 찾는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놈의 남편감. 사람들은 왜들 이렇게 남의 결혼사에 관심이 많을까? 역시 남의 일이라 그런가?

“네. 하지만 대충 해결됐…….”

“여기 꽤 좋은 상대가 있네. 라그휘르텐 백작…….”

“싫습니다.”

“……의 동생이 참 똘똘한 미남인데. 아, 이미 상대를 정한 건가?”

상대가 없어도 라그휘르텐 백작은 싫다. 라그휘르텐 백작의 동생은 만나 본 적 없지만 마찬가지로 싫다.

내가 싫어하는 라그휘르텐 백작이 심히 언짢은 눈으로 나를 흘겨봤다.

“싫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동생도 이미 연인이 있는 몸입니다.”

“뭐? 그거 안타깝군. 웨더우즈 자작처럼 호탕한 인재는 얻기 드문데. 백작의 동생은 참 운이 안 좋아. 나처럼 말년에 운을 몰아 받으려나?”

“대뜸 제 동생에게 웬 망언이시랍니까, 로즈벨 백작님?”

라그휘르텐 백작이 투덜거리든 말든, 하등 관심을 두지 않은 로즈벨 백작이 내게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웨더우즈 자작이 바라는 이상형은 어떠한가? 외모를 중시하나? 아니면 집안이나 성품?”

나는 루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일단 성품은 아닌 것 같아요.”

“허, 의외인데? 사서 고생할 사람이 여기 있었군.”

가만히 지켜보던 칼펜위버 후작이 넌지시 한 마디 던졌다.

“한데 자작의 남편감을 왜 백작님이 따지시는 겁니까? 웨더우즈 자작은 이미 라파엘로 공작 각하와 잘돼 가는 것 같습니다만.”

“…….”

“…….”

“음? 제 말이 틀렸습니까? 둘째 딸인 타라가 그리 말하더군요. 자기가 봤을 때 웨더우즈 자작의 취향은 분명 세레니예 백작인데, 그쪽은 나이가 원체 많고 이미 한 번 장가갔던 몸이기도 하니 라파엘로 공작 각하를 선택할 것 같다고. 그게 재밌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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