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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52화 (152/195)

152화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얼굴로 열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겨우 이름 한번 칭찬받은 게 이토록 부끄러울 일이야?

“그 이름을 차가운 비석에 새길 뻔했던 건가? 이제야 알게 된 게 운명이겠어.”

웃음기 하나 없는 진중한 눈으로 혼자 읊조리는 모습이 내 마음을 찡하게 울렸다. 옛 이름에 그런 온갖 의미를 부여하다니. 나는 루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예쁜 건 데이지가 더 예쁜데.”

피식 웃은 루가 어깨에 힘을 줘서 내 몸이 휘청이지 않도록 도왔다.

“어떤 데이지? 내가 피워 낸 데이지?”

“무슨 소리야? 그 데이지는 내가 키웠어!”

“옮겨 심은 건 나지.”

“잊었나 본데, 옮겨 심었던 것도 나야.”

“그건 죽일 뻔한 거고. 햇빛이 전혀 들지 않아서 시들시들했잖아. 안 그래, 애쉬?”

순간 몸이 흠칫 떨렸다.

“그냥 데이지라고 불러. 그 이름은 퀸 섬을 나가면서 버렸어. 퀸 섬을 나가면서, 나는 애쉬 파거를 내 이름으로 여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왜냐하면 그 이름은…….”

불길하니까.

애쉬.

그 이름은 재라는 뜻을 지녔다.

퀸 섬 같은 보수적인 섬에서 여자아이의 이름을 ‘재’로 지은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태어난 날, 집 바로 앞에 낙뢰가 떨어지면서 퀸 섬에서 가장 큰 노목이 까맣게 불타 버린 까닭이다. 그나마도 어릴 적 이웃 아줌마가 말해 줘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리 대단찮은 이름이 아니란 걸 안다. 그럼에도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 이름이 진절머리 나게 싫어졌다.

내 이름이 애쉬라서 퀸 섬이 불길에 휩싸인 것은 아닐까?

내 이름이 애쉬라서 안데르트가 오른 전함이 침몰하고, 종국에는 퀸 섬도 새까맣게 타 죽어 버린 게 아닐까?

내 이름이 애쉬라서.

까만 재라서…….

“네가 원한다면야.”

더 깊은 사색에 빠지기 직전. 따뜻한 손이 다가와 내 뺨을 두드렸다.

“혀가 아닌 심장에 간직해 두면 될 일이지. 나만 알고 좋은걸?”

루는 내 허리를 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디안 케트와 인연이 있는 애쉬라.”

“어때? 좀 알 것 같아?”

“전혀. 이상하군. 이 정도로 정성을 들인 인연이라면 내가 모를 리 없을 텐데. 디안, 그 녀석은 내게 매가 아닌 애쉬라는 인물에 대해 언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숨겨 왔다는 뜻이겠지.”

루의 시선이 꼬리표로 향했다.

“게다가 이 이름표, 너무 오래됐군. 너희 둘이 만난 게 사실이라면 최소 150년 전 일일 거야. 이 새장의 주인이었던 애쉬가 그쯤 살았던 매거든.”

150년 전이면 내 할아버지도 태어나기 전 아니야? 너무 까마득한 과거다.

그런 대과거에 나의 흔적이 새겨졌다니. 대체 무슨 수로? 어떤 방식으로 가능했던 걸까.

“설마 나…… 디안 케트인 건가?”

디안 케트가 신의 힘으로 시공간을 어찌저찌 돌려 지금의 나로 변한 거라면?

나름 회심의 추측이었는데, 루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못해 심드렁했다.

“네가?”

“응.”

“그다지 흥미로운 가설은 아니군. 별로 기쁘지도 않아. 미리 부탁해 둘게, 데이지. 만약 그 가설이 진실로 밝혀져도 내게 말하지는 마. 나는 너를 너로서만 알고 싶으니까.”

그 정도로 동일시하기 싫어할 줄이야.

루가 저리 질겁하니 나도 덩달아 뱉은 말을 취소하고 싶어졌다.

‘그래, 나 같은 무식한 검사가 디안 케트와 동일인일 리 없지.’

내가 그였다면 더 확실한 흔적을 남길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커다란 알 껍질 위에 <나는 치료술사 디안 케트다. 죽었지만 애쉬 파거로 다시 태어났다. 자랑스러워해라>라는 식으로.

루는 내 정수리에 턱을 놓은 채 느린 침음을 삼켰다.

“그나마 하나 가능성이 있다면…… 심장이려나.”

나는 내 심장께 부근을 내려다봤다.

반신의 심장.

내 영혼의 파멸을 저지하는 고마운 존재.

확실히, 이 심장이 나와 디안 케트 사이를 연결하는 유일한 매개이기는 했다.

“간만에 복잡한 난제를 만났어. 칼레파로 돌아가서 다른 심장 결정석들로 연구를 좀 해 봐야겠군. 가장 확실한 건, 데이지. 네가 마지막 디안 케트의 유산을 모아야 한다는 거야.”

“역시 그렇겠지.”

디안 케트의 유산을 전부 모으면 고대 마법이 발동할 것이다.

그리하면 어떻게든 결과를 보게 되겠지.

어떻게든.

* * *

대도시 라갈의 분위기는 일주일 전과 비교해 사뭇 조용해졌다.

사냥제가 끝나면서, 긴 축제를 즐기던 도시 전체가 짧은 휴식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단기간 몰려들었던 상류층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여파도 적잖았다.

나는 황제와의 만찬을 위해 며칠 더 머물러야 하는 입장이지만, 여타 귀족들은 달랐다.

펜 로타에서 가을은 보통 사냥의 계절이라 불린다. 사냥제가 끝나면 귀족들은 각자 컨트리 하우스로 돌아가 장기간 사냥을 즐겼다. 그곳에서 조용히 겨울까지 보내다가 날이 따뜻해지면 다시 도시로 돌아오는 순서의 반복이었다.

또한 라갈을 떠나기 전, 지인의 타운 하우스를 찾아가 컨트리 하우스로 초대하는 것은 사냥제의 마지막 일정이기도 했다.

나를 찾아오는 방문객 또한 수없이 많았다. 어찌 되었든 나는 웨더우즈 가문의 새로운 수장이자 사냥제의 우승자이며 네 명의 남자를 꼬신 파, 파…… 하여간 그런 거였으니까!

“웨더우즈 자작님! 이대로 헤어지려니 정말 아쉬워요. 올가을에는 어디로 가시나요? 칼펜위버에서 보내실 생각은 없으세요? 아버지께서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물론 우리 자매도요!”

“안타깝지만 그건 힘들겠어, 타라 양. 황제 폐하와의 식사가 끝나면 미드윈트리로 돌아가 봐야 하거든.”

“아! 세상에, 맞아요. 그런 일정이 있으셨지요? 폐하와의 식사라니…… 한데 그런 자리에서는 보통 무슨 대화를 하나요? 긴장 때문에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기는 할까요?”

“얘, 타라. 말조심해야지.”

나는 몇 날 몇 시 누구와 함께 황성을 방문할지, 황성에서 황제와 어떤 담화를 나눌지 사방팔방 소문을 냈다.

이건 내가 아니라 하녀장이 생각해 낸 계책이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가능한 한 많은 흔적을 남기세요. 주인님의 행선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늘어나면, 황실도 쉽사리 주인님을 위협하지 못할 겁니다. 사교계 특유의 빠르고 허황된 전파력이 주인님의 방패가 되어 줄 거예요.”

사냥제 연회가 끝난 후.

나는 하녀장을 따로 불러, 사냥제에서 벌어진 사건 사고와 황실이 물밑에서 벌이는 생체 실험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쉽사리 믿지 못하던 하녀장은 루의 상처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의심을 거두었다. 마법사 특유의 예민한 감이, 루의 상처에서 풍겨 오는 지독한 기운을 감지해 낸 것이다.

“이 지도를 잘 봐 주세요, 주인님.”

“……이거, 설마 황성 설계 도면이야?”

“말리콥스 님이 준비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된 도면이라 현 황성과는 다른 점이 많아요. 지금부터 주인님께 황성의 숨겨진 통로와 벙커를 알려드릴 거예요. 일개 황족이었던 저는 반절의 비밀 통로밖에 알지 못하지만, 분명 주인님께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체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는 연구소.

“그 연구소가 만약 황성에 위치한다면, 예상되는 장소가 몇 곳 있어요.”

나는 하녀장과 말리콥스의 도움을 받아, 황성의 도면과 지도를 머릿속에 꽉꽉 욱여넣었다.

그동안 루는 타운 하우스, 황성, 칼레파를 오가느라 바빴고 진은 재활 치료에 매진했다.

그리고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투둑투둑.

쉼 없이 떨어지는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린다.

그간 날씨가 많이 서늘해졌다. 늦은 밤에는 침실 안쪽까지 한기가 들어서, 이틀 전부터는 항시 난로를 틀어 두기 시작했다.

나는 머플러를 더 단단히 묶은 후 현관 앞에 섰다. 열린 문 너머 보이는 하늘은 적당히 어둡고, 우울했다.

하녀장은 이맘때쯤이면 늘 라갈에 가을비가 내린다고 했다. 이틀 정도 내린 비가 그치고 나면 한껏 쌓인 낙엽이 땅을 뒹굴고, 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테다. 겨울이 찾아오는 것이다.

“주인님.”

이제 막 문밖으로 나서려는 나를 하녀장이 막았다.

그녀는 내게 본 적 없는 서신 한 장을 건넸다.

“이게 뭐야?”

“제가 작성한 서신이에요. 주인님 신변에 좋지 않은 이변이 생겼을 때, 아슈네이케 오라버니께 전달해 주세요. 당장의 위급한 상황은 면할 수 있을 거예요. 아마도요.”

하녀장은 걱정이 많아 보였다.

‘나는 딱히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쳐들어가는 게 아닌데.’

그래도 그녀 말마따나 쓸모가 있을지 모르니까. 고마운 마음으로 서신을 챙겼다.

“괜찮겠어? 이곳에서 지내는 게 알려질지도 몰라.”

“……저는 아슈네이케 오라버니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어요.”

잠시간 말을 아끼던 그녀는 곧 작은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만약 아슈네이케 오라버니가 변했다면. 그리하여 주인님께서 큰 변을 당하신다면, 저는 개인의 평화를 위해 두 가족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릴 거예요. 그러고 싶지는 않네요.”

그러니까 그런 변을 당할 일이 없을 거래도.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려는데, 하녀장을 뒤따라온 진이 주먹을 움켜쥐며 당부했다.

“황성 근방에서 계속 주시하고 있겠습니다.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어떤 방식으로든 신호를 주십시오. 바로 진입하겠습니다.”

다들 나보다 더 비장해 보인다.

이번에도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려는데.

“자작, 걱정 말게. 만약 자작에게 변고가 생기면 내 모든 인맥을 끌어모아서 황성에 자객을 보내겠…….”

나 참.

“죽으러 가는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시간을 더 늦출 수 없는 터라, 말리콥스의 당부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타운 하우스를 나섰다. 마차는 빗줄기를 가르며 달렸다. 날씨는 어둡고 비는 내리고. 좋지 않은 사건이 일어나기 제격인 날이었다.

그렇게, 일주일 만에 다시 찾은 황성에서는.

“또 만나는군, 웨더우즈 자작. 일주일 동안 안색이 많이 훤해졌어.”

검성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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