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루가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지는 모른다.
나는 흙 묻은 엄지발가락에 시선을 고정하며 대답했다.
“죽이지는 않았어. 대신 서로 비슷한 몰골이 됐지.”
오히려 내가 죽을 위기였다, 라는 뒷말은 루가 걱정할 것 같아서 덧붙이지 않았다.
“그건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니야.”
“만족스럽지 않아도 어쩌겠어? 사내놈들은 다 치고받고 싸우면서 크는 건데.”
나도 인생의 3분의 1은 사내로 살았으니 대충 절반은 사내라고 치자.
“친구?”
루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 쳤다.
“정말 친구가 맞나?”
“그래, 친구니까 죽으면 안 돼. 마음이 아플 거야.”
“없어진 건 다시 만들면 돼.”
“그런 논리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이쯤 되니 루는 진심으로 라파엘로를 고깝게 보는 듯했다.
어떤 말이 그를 안심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드러난 어깨를 살살 쓰다듬으며 운을 뗐다.
“이 상처들 말이야. 원래 그다지 반갑지 않았거든.”
“그런데?”
“라파엘로의 화를 조금 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 야비한 수로 용서받은 기분이라 마음이 편하지가 않네.”
루는 연회장 서쪽, 홀연히 자리한 중정에서 멈추었다. 나 홀로 걸을 때는 다소 날카롭게 느껴지던 바람이 루와 함께 맞으니 뜨거운 땀을 식혀 주는 산들바람처럼 상쾌하기만 했다.
“내 말 잘 들어, 데이지.”
“응.”
“너는 죄짓지 않았어.”
그리 단언한 루가 너덜거리는 내 의복을 꽉 잡았다.
“네가 그자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건 죄인이라서가 아니야. 다정하고 선량하기 때문이지. 만약 그 이상의 의무와 책임감을 네게 요구한다면.”
“죽이라고?”
“학습 효과가 좋아, 우리 데이지 양은. 실천할지가 의문이지만.”
“그렇게 따뜻한 위로도 할 줄 알면서 왜 라파엘로는 꼭 죽이니 마느니 하는 거야?”
루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널 괴롭게 하니까.”
가벼운 한마디였지만, 어째서일까. 심장 위에 바위를 얹은 것처럼 가슴 안쪽이 무거워졌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연회장에서 중정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작은 그림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림자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자, 새하얀 달빛이 떨어지며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어머나, 자작님. 여기 계셨네요. 정말 한참을 찾았어요. ……한데 설마 제가 모르는 사이에 마귀가 다시 나타났던 건가요?”
“웍호드 자작 부인.”
환한 웃음을 흩뿌리며 나타난 웍호드 자작 부인은, 세레니예 백작 쪽으로는 시선 한 번 두지 않으며 말했다.
“여기, 연회장에서 떨어뜨리신 손수건이에요. 제가 드렸던 물건이라 바로 알아봤네요. 앞으로는 잃어버리지 마세요.”
물러서려는 그녀를 재빨리 붙잡고 물었다.
“혹시, 손수건의 진짜 주인이 황성에 머물고 있습니까?”
한 차례 멈칫한 웍호드 자작 부인은 변함없는 미소로 나를 돌아봤다.
“죄송합니다, 웨더우즈 자작님. 이 미련한 머리로는 자작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통 모르겠네요. 그럼 저는 이만.”
말하기 곤란하다 이건가.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웍호드 자작 부인에게 건네받은 하얀 손수건을 펼쳤다.
『황제와의 만찬에서 음식을 조심할 것』
턱을 들어 내용을 확인한 루가 흥미롭다는 투로 말했다.
“데이지 양의 동생은 황성에 숨어 사는 생쥐로 전직한 건가? 펜 로타의 황제가 독살이라도 꾸미고 있나 보군.”
“혹은 황제가 아닌 다른 이가 꾸밀 수도 있지.”
나타샤, 라든가.
‘삼보 황금 조각상에 더불어 황제와의 만찬을 약속받았을 때, 귀족들 모두가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지.’
사냥제 우승자에게 매년 황제와 식사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테다.
‘승자가 나였기에 그런 이례적인 상을 내린 걸 거야.’
나타샤는 중대사를 신중하게 결정하는 성정이다.
그녀는 내가 라파엘로를 포함해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도록, 황성에 홀로 고립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나타샤다운 수였다.
“이만 돌아갈까? 더는 여기에 머물 필요가 없어졌어.”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인걸.”
우리는 지체 않고 웨더우즈 타운 하우스로 귀가했다.
겨울 초입의 찬 바람이 불던 새벽 1시. 사냥제 일정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 * *
아슈네이케 황제와의 영광스러운 만찬까지 주어진 시간은 일주일.
연회가 끝난 직후 내가 가장 먼저 착수한 건 디안 케트의 유산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이게 디안 케트의 인장이야?”
“그래.”
“너무…… 닳았는데?”
나는 오래된 나무 상자에 담긴 무거운 인장 반지를 꺼내 들어 세세히 확인했다.
이 물건이 바로, 칼레파에 보관되어 있던 디안 케트의 인장.
닳았다. 확실히 닳았다. 세심하게 음각되어 있어야 할 인장 부분이 반은 깎여 나가고, 나머지 반은 뭉개진 상태였다. 녹인 밀랍에 찍어 어떤 형상이 뜨나 확인했지만 쓸 만한 정보는 건질 수 없었다.
“……애쉬라고 쓰여 있는 건 아니지?”
“전혀. 오히려 그림에 가까워.”
좋아, 너는 탈락.
그다음으로는 디안 케트의 일기장을 펼쳤다. 분명 호기롭게 펼쳤지만…….
“루.”
죄다 외국어라 당최 해석할 수가 없다. 원탁 건너편에 앉아 있던 루가 작게 웃곤 일기장을 도로 가져갔다.
“네가 아스트로사어를 읽을 수 있을 리 없지. 괜찮아, 무식해도 귀여워.”
“루가 준 귀걸이에 분명 번역 기능이 탑재되어 있지 않았어?”
“들리는 것만.”
루의 기다란 손가락이 오래되어 노랗게 변색된 일기장을 느릿느릿 넘겼다. 그는 내가 버드나무 숲에서 이 일기장을 수거한 직후, 한 번 읽어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여기.”
설렁설렁 넘어가던 종이가 어느 순간 딱, 멈춰 섰다.
“왜? 거기에 중요한 이야기가 쓰여 있어?”
“<드디어 그날이 찾아왔다.>”
그날?
나는 숨소리를 낮추고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어쩌면 내 의문의 실마리를 풀 열쇠…….
“<패니가 순산했다. 새끼는 모두 8마리. 암컷 4마리에 수컷 4마리였다. 아아, 장한 녀석!>”
……장난쳐?
팍 식은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루가 일기장을 원탁 위로 던졌다.
“실망하지 마. 디안 케트는 원래 실없는 녀석이었으니까. 이 일기장에는 애쉬가 총 2번 언급되는데, 전부 그가 키우던 매를 가리키는 이름이지. 애쉬처럼 재빠르다, 애쉬가 그립다…… 특별한 뜻이 숨겨져 있는 것 같지는 않군.”
“루도 디안 케트가 키우던 매를 기억해?”
“어렴풋이.”
“특별한 점은 없었어?”
“특별한 점이라.”
진지한 표정으로 기억을 더듬은 그가 금안을 번뜩였다.
“못생겼어.”
아, 그거참 특별하네.
나는 침실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차근차근 훑었다.
디안 케트의 인장.
디안 케트의 일기장.
디안 케트의 새장.
디안 케트의 눈알.
‘……그러고 보면 이 눈알만 이질적이란 말이지.’
검성이 소유하고 있을 디안 케트의 손거울을 포함해, 눈알을 제외한 모든 유산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실생활에 사용하던 물건이라는 것.
나는 따스한 온기와 생명의 파동이 느껴지는 알에 손을 올렸다. 매끈한 껍질을 샅샅이 뜯어봐도 ‘애쉬’의 흔적은 없다. 루를 통해 마법 해석본을 재차 확인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마법의 시동어는 왜 <죽지 마세요, 애쉬>일까?”
내 혼잣말에 루가 성의 없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죽은 매를 살리고 싶었나 보지.”
“그게 아닌 것 같아서 그래.”
루가 새장에 덜렁거리는 매 꼬리표를 건드리며 물었다.
“왜? 고작 이 가죽에 적힌 필체가 네 필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
“데이지, 이 필체가 네 것과 비슷하다 못해 똑같다는 점은 나도 인정해. 하지만 이런 것 하나로 주장하는 건 억측이나 다름없어.”
억측. 그래, 인정한다. 필체 하나로 과거의 인연을 주장하는 건 내가 생각해도 억측에 가까웠다.
나를 바라보는 루의 눈빛은 ‘그러니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강요하기보다는 부드럽고 차분하게.
“흐음. 이번에는 고집이 꽤 센데? 뭐, 말하기 싫다면 입 닫고 있어도 좋아.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거겠…….”
“애쉬.”
아, 싫다.
밝히기 싫다.
하지만 상대는 루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마법사니까.
“내 옛날 이름이야. 애쉬, 애쉬 파거…….”
톡, 톡. 꼬리표를 건드리던 루의 손길이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나를 응시하던 루의 얼굴이 멍하니 풀렸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저 표정을 보니까 말하기를 잘한 것 같기도 하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루가 저런 얼굴을 보여 주겠는가?
나는 서랍 위에서 메모지와 펜을 가져와 <애쉬>라는 글자를 적어 보였다.
“세상에 나보다 더 내 이름을 많이 적은 사람은 없을 거야. 보여? 보통 이 맨 뒤쪽의 철자를 적을 때는 끝이 왼쪽으로 휘기 마련이야. 하지만 내가 적을 때는 이렇게 오른쪽으로 휘어. 왼손잡이거든.”
그러니까, 이 꼬리표의 ‘애쉬’는 내 흔적이 맞다. 틀림없어.
의기양양하게 루를 쳐다보는데, 그는 내가 적은 ‘애쉬’라는 글자를 가만히 응시하기만 했다. 그것도 수십 초 내내.
“뭐 해?”
앉아서 조는 건가 싶어 건드리자, 루가 고개를 들었다.
“예뻐서.”
“뭐가?”
“네 이름. 예쁘네. 영원히 내 머릿속에만 숨기고 싶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