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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50화 (150/195)

150화

그는 내게 등 돌려 멀어졌다.

……아.

그런 건가.

결국 돌이키지 못할 관계였나.

‘내가 너무 낙관적으로만 생각했구나.’

막상 내쳐지니 심장이 뻥 뚫린 것처럼 마음이 무겁고 고되었다.

말하지 말아야 했을까?

끝까지 모르는 척해야 했을까? 그랬다면 라파엘로도 모른 척 넘어가 줬을까? 근근이라도 이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을까?

‘아니야, 그건 야비한 거래도.’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된다.

이 죄책감은 내가 감당해야 할 업이었다. 고작 이 정도의 업이 두려워, 라파엘로와의 관계를 허무하게 조각내고 싶지 않았다.

“……기다려.”

오해를 풀어야 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라파엘로! 내 이야기를 들어 줘!”

라파엘로를 뒤쫓기 위해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 순간, 구두의 굽이 부러졌다.

구두에 능숙지 못한 걸음으로 뛴 것이 문제였다.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늦은 후라, 발목이 꺾이면서 시야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읏.”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다리의 난간을 짚고 몸의 균형을 맞추려 했다. 수로를 가로지르는 다리는 정원 관상용으로 설치되어 그 높이가 무릎에 닿을 만큼 낮았다.

한데 하필 난간을 짚은 손이 라파엘로에게 잡혔던 손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어?’

찌릿, 하는 통증과 함께 몸의 무게를 받쳐야 할 손목이 힘없이 풀렸다.

반대쪽 팔로 난간을 붙잡으려 했으나 뒤늦은 판단이었다. 다리의 받침과 수면 사이의 거리가 두 뼘 정도의 거리였기에, 팔을 뻗기도 전에 물에 빠져 버린 것이다.

라파엘로가 고개를 돌리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나는 수로에 잠겼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놀랐지만 그뿐이다. 다시 뭍으로 올라가면 된다. 나는 10년간 전쟁터를 구른 군인이자 검사였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 정도는…….

하지만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뼈를 관통하는 이 한기.

물이란 게 원래 이렇게 차가웠던가?

제아무리 가을의 끝물이 가깝다 해도, 이 정도의 한기는 말이 안 됐다. 발끝과 손끝의 감각이 동상에 걸린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갔다. 열심히 발버둥 쳐도 태산처럼 무거운 몸은 수면 위로 올라가지를 못했다.

심장이 아프다.

나는 나약했다.

‘……그래, 그릇이 깨졌었지.’

마귀를 벨 때는 그리도 잘 움직였으면서. 정작 위급한 상황에는 종잇장처럼 하찮기만 하다.

맹세 때도 그랬다. 아마 신체를 덮치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유독 취약해진 것 같았다.

‘……루에게 훼방하지 말라고 으름장 놓지 말걸.’

정신이 흐릿해져 가던 어느 순간.

강인한 힘이 내 몸을 어둠 속에서 끌어 올렸다.

“허억.”

호흡하기 급급한 동안 무거운 의복이 내 상체를 감싸 안았다.

“안데르트.”

커다란 손이 뻗어 와 엉망이 된 내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점차 선명해지는 시야에 라파엘로의 얼굴이 잡힌다. 남자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얼굴로 내 뺨을 쉬지 않고 쓸어내렸다. 그런 표정은 안 어울리는데.

“안데르트, 안데르트.”

얼음장처럼 차가운 피부 너머로 미세하게 떨리는 라파엘로의 손이 느껴졌다. 죽을 뻔한 건 나인데, 생사의 갈림길에서 돌아온 사람은 마치 라파엘로 같았다.

그가 느끼는 두려움이 맞닿은 살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됐다.

불현듯, 퀸 섬에서 내 마지막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던 라파엘로가 떠올랐다. 그날 라파엘로가 느꼈을 죄책감은 내가 느끼는 죄책감과 비교도 안 될 만큼 크고 고통스러웠겠지. 나는 위로하듯 라파엘로의 손을 잡았다.

“하아, 하아 ……진정해. 괜찮아, 나 여기 있어.”

이번에는 죽지 않았어.

“잠깐 물에 빠졌을 뿐이야. 영영 못 빠져나올 뻔하기는 했지만.”

그제야 라파엘로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나는 그가 안정을 되찾은 거라 여겼지만, 아니었다. 가라앉은 눈동자 안쪽으로 켜켜이 쌓인 울분이 쏟아지고 있었다.

라파엘로가 멍하니 응시하고 있던 것은 반쯤 찢어져 길게 늘어진 의복 사이로 형형한 존재감을 내뿜는 상흔이었다.

힘겹게 껴입은 드레스가 왜 이런 꼴인가 싶었는데, 라파엘로가 날 물 위로 끌어올리기 직전에 손으로 잡아당겨서인 듯했다.

“……제길.”

욕설을 삼킨 그가 너덜너덜한 천을 끌어당겨 상흔을 가렸다. 눈에 띄게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에 걱정이 일었다.

“라파엘로.”

“문제없다. 그냥 잠깐…… 내가 미치도록 한심하게 느껴졌을 뿐이야.”

라파엘로는 자신의 제복을 젖은 드레스 위에 둘러 상흔을 덮은 후, 두 팔로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자 안도감이 찾아왔다. 불안하리만치 빠르게 뛰던 심장 박동도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너는 정말 안데르트인가? 살아서 돌아온 거냐? 정말로?”

그의 어깨에 한참 턱을 올려놓고 숨을 고르다가, 천천히 답했다.

“그래, 나야.”

“어째서 이런 꼴이 된 거지?”

“이런 꼴이 된 게 아니야. 콜록, 원래 이런 꼴이었던 거지.”

내 말의 저의를 가늠하려는 듯 라파엘로는 짧은 시간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몸을 일으킨 그는 나를 안은 채 황성으로 들어갔다. 미로 같은 통로를 이리저리 걷다가, 빛 속에 서 있던 어느 남성에게 다가가 말했다.

“웨더우즈 자작이 수로에 빠졌습니다. 휴식할 방을 내주십시오.”

“수로? 허어, 하필 오늘 같은 날씨에 빠지다니. 저를 따라오십시오.”

내 얼굴을 확인한 시종장이 주위의 시종들을 물리고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연회가 열리는 날 종종 일어나는 사건이지요. 그래도 주변에 제나일 공작 각하가 계셔서 다행입니다.”

시종장이 안내한 방은 질릴 정도로 넓은 응접실이었다. 라파엘로가 나를 소파에 앉히기 무섭게, 뒤쪽 문에서 걸어 나온 하인들이 난로에 불을 피운 후 사라졌다.

암막 커튼을 전부 걷고 마지막으로 차분한 주홍빛의 등불까지 켠 시종장이 라파엘로를 돌아봤다.

“공작 각하께서는…….”

“누이는 황성이 처음이니, 제가 잘 돌본 후 귀가를 돕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 주위는 사람을 물리도록 하겠습니다. 회복될 때까지 푹 쉬십시오, 웨더우즈 자작님.”

테이블에 따뜻한 우유가 놓인 것을 마지막으로 응접실에는 라파엘로와 나만이 남게 되었다.

라파엘로는 응접실에 마련된 진열장을 거리낌 없이 열더니, 한눈에 봐도 값비싸 보이는 술을 따라 내게 건넸다.

또 술이야?

“오늘 지겹도록 마셨는데.”

내 한탄을 들은 라파엘로가 대답 대신 한쪽 눈썹을 지그시 구겼다. 나는 얌전히 술잔을 비운 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윽.”

이게 이렇게 센 술이었나? 목에 불덩이가 떨어진 듯하더니, 차갑게 식은 몸이 순식간에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벽을 넘은 후 독이 잘 안 오르는 몸이 되어서 다행이지.’

라파엘로는 내가 비운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른 후 제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이후 텅 빈 유리잔을 난로 불빛에 몇 번 흔들어 보다가 입술을 뗐다.

“내게 해야 할 이야기가 있을 거다, 안데르트.”

그 말이 맞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일단은 가장 확실한 오류부터 지적해야 할 것 같아.

“나는 안데르트가 아니야.”

내 첫 운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라파엘로의 표정이 아주 살벌하게 굳었다.

“너는…….”

“아니, 아니. 계속 들어 봐.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 안데르트는 내 이름이 아니라, 죽은 줄 알았던 동생의 이름이거든.”

“동생?”

“메피스토가 그 애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지. 내가 안데르트의 이름과 몸을 빌린 건 동생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어.”

나는 길다면 길고 또 짧다면 짧은 지난 14년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라파엘로와 10년을 함께하면서 단 한 번도 입에 담은 적 없는, 지난날의 회고록이었다. 말하면서도 나 스스로가 신기했다.

그렇게 길고, 그토록 고되었던 생이 이렇게 짧게 요약된다고?

그렇게 거지 같고, 그토록 어처구니없는 생이 이런 식으로 이어진다고?

‘빌어먹게 허황된 인생이잖아. 믿지 않으면 어떡하지?’

또다시 거짓말쟁이로 몰릴까 불안했다.

고심 끝에 나는 덮고 있던 제복을 내려놓았다. 찢기고 늘어난 어깨 부근의 의복을 내려, 등 쪽 전반에 분포된 자잘한 상처들을 내보였다.

“여기, 내 몸의 상처들 보여? 너라면 눈에 익겠지. 마도 전쟁에서 생긴 상처들이야. 원래는 없었는데, 육체가 깨지면서 하나둘 생기기 시작…….”

“그만!”

갑작스럽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고함이었다. 나는 어깨를 움츠린 채 그를 돌아봤다.

“뭐야? 왜, 왜 그러는 건데?”

라파엘로는 제복 외투를 집어 들어 거칠게 내 어깨를 덮었다. 이어서 언짢은 기색이 완연한 눈으로 날 비난했다.

“미친 건가? 남자 앞에서 몸을 그렇게 함부로…….”

“이제 와서 무슨 헛소리야? 너랑 내가 10년 동안 내외하면서 산 줄 알아?”

멈칫한 것도 잠시. 라파엘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우습군. 나를 조롱하는 건가? 지금 네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답일 텐데?”

“……날 믿지 못하는 마음, 충분히 이해해.”

“너는 내 당부를 무시하고, 네 멋대로 죽어 버렸어.”

“미안.”

“마음에도 없는 사죄하지 마라. 진정으로 날 생각했다면 미드윈트리에서 하녀 노릇 따위 하지 않았겠지.”

“……미안.”

“그런 주제에 이제 와서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느니, 그릇이 깨졌느니!”

쾅! 내리꽂힌 주먹에 테이블이 크게 흔들렸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유리잔을 잡아 다시 그 위에 올려 두었다. 라파엘로는 대체로 감정 표현이 적다. 그런 그가 이렇듯 격렬하게 화를 표출할 때는 일부러 아무 말도 안 했다. 잘못 걸리면 잔소리란 잔소리는 대거로 처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용히 분노를 추스른 라파엘로가 나를 노려봤다.

“안데르트. 아니, 데이지 웨더우즈. 정말 죽게 되는 건가?”

“그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나름대로 열심히 살길 찾는 중이니까.”

“지하르크 공작은 순순히 유산을 넘기지 않을 거다.”

“알아. 안 그래도 그 남자 얼굴만 떠올리면 머리가 다 답답해. 콜록, 콜록. ……그건 그렇고, 사냥제에 나타난 마귀는 어떻게 된 거야? 조사는?”

팔짱을 낀 채 소파에 등을 기댄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코웃음 쳤다.

“그 꼴을 하고서도 그런 질문이 나와?”

“나타샤와 연관되어 있으니까.”

짧은 정적의 끝에, 한층 차분해진 답이 들려왔다.

“내일 아침에 알려 주지. 대신 오늘 밤은 나와 이 방에 머물러.”

내일 아침이라.

“배려 고맙지만, 그것만은 힘들 것 같네. 오늘 밤은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라파엘로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지가 지독하게 뻐근했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제복을 곱게 접어 두고 문 쪽으로 걸어가는 나를 라파엘로가 불러 세웠다.

“안데르트.”

라파엘로는 고요하게 타오르는 난롯불을 응시한 채 말했다.

“내가 가지 말라고 하면…… 그에게로 안 갈 건가?”

“…….”

“내가 널 지키겠다고 하면, 이곳에 남을 거냐?”

“아니.”

나는 이제 안데르트가 아니다.

한때는 하녀였고, 이제는 웨더우즈 자작이 된 데이지에게는 데이지만의 길이 있다. 책임져야 하는 의무와 보호해야 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리고, 루도.

“나를 밀어내지 않아 줘서 고마워, 라파엘로. 이건 진심이야. 너에게 아직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았는데…… 나중에 봐.”

탁.

문을 닫고 나오자 초겨울처럼 차디찬 공기가 내 피부를 감쌌다.

나는 물에 빠진 생쥐 꼴로 걸음을 이었다. 맨발로 계단을 내려가, 차디찬 대리석을 밟고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연주가 끊이지 않는 거대한 홀. 그 홀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루였다.

“죽였겠지?”

한걸음에 다가와 내 몸을 안아 든 그가 내게 속삭였다.

“그렇지 않으면 용서가 안 되는 몰골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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