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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49화 (149/195)

149화

검성이 소유했다고?

차라리 황제가 소유한 편이 낫다. 그 능구렁이를 상대로 마지막 유산을 갈취하라니, 상상만으로 벌써 심신이 피곤했다.

“이 물건은 곧장 웨더우즈 가문의 타운 하우스로 전달할 예정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고마워.”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자, 하인이 상자를 정리한 후 다시 마차에 올랐다.

비밀스럽게 움직이려는 듯, 다소 추레한 형상의 마차는 그렇게 다리를 건너 정문 쪽으로 멀어졌다.

이제부터가 관건이다.

디안 케트의 새장은 이미 내게 넘어오기로 예정된 물건이었다지만, 지금부터 라파엘로와 풀어내야 할 이야기는 조금도 쉽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운을 뗄까?

역시 ‘잠시 좀 걸을까?’ 정도가 적당하겠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그림을 그리며 몸을 돌렸을 때, 라파엘로는 이미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얕은 고뇌가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할 말 있어?”

“아니요.”

“거짓말. 할 말이 있는 눈이잖아. 편하게 말해.”

“……누이가 지하르크 공작님을 선택하실 줄 알았습니다.”

앞뒤 문장을 보기 좋게 잘라 낸 답이었으나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백했다.

아까도 그렇고, 내 첫 춤 상대를 은근히 신경 쓰고 있었나 보네. 어지간히 거짓말쟁이로 찍혔나 보다.

“내가 그 아저씨를 왜 골라? 애초에 너랑 추기로 정해져 있던 자리인데.”

“그분은 즉흥적인 성정이 아닙니다. 믿는 구석 없이 누이에게 첫 춤을 요구할 리 없으니, 제가 모르는 사이 몇 마디 말이 오갔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눈치 빠른 놈.

“지하르크 공작님과 무슨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라파엘로는 디안 케트의 새장을 미끼로 내게 미묘한 압박을 넣고 있었다. 뒤탈 없이 가져가고 싶으면 순순히 밝히라고.

사람의 심리상 코앞에 목표가 드러나면 쉽게 입을 나불거리기 마련이다. 라파엘로가 원하는 바 역시 그것이겠지.

“누이.”

뭐, 딱히 숨길 이야깃거리도 아니니까. 그의 재촉에 순순히 입을 열었다.

“너를 버리고 자신에게 오라던데.”

라파엘로의 날카로운 턱 위로 사뭇 자조적인 미소가 그려졌다.

“하기야, 지하르크 공작님은 유독 안데르트를 아끼셨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로군요.”

덕분에 내 혀는 살짝 굳었다.

사냥제 이후 그는 종종 나와 안데르트를 동일시하는 발언을 내뱉었다. 그럼에도 행동만은 철저히 안데르트의 누이를 대하는 태도라, 둘 사이의 간극이 내 머릿속을 아주 복잡하게 만들었다.

“맞아, 그랬지. 내게 열심히 치근덕대는 이유도 인재를 원하기 때문이라 했어.”

“그분에게 가실 겁니까?”

극구 부정하려던 나는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라파엘로, 너는 검성이 진정 황제의 검이라고 생각해?”

검성의 진짜 목적은 무엇일까?

마귀에도, 황실에도, 생체 실험에도, 검성의 기세는 그저 뜨뜻미지근하기만 하다. 어떤 면에서는 만사에 통달한 루와 비슷해 보였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냥 비슷하지만은 않았다.

검성은 무언가 숨기고 있다.

추측건대 그가 지닌 비밀의 정체는 나 그리고 황실과 아주 밀접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게 그리 호의적일 수가 없었다.

“나타샤 황녀와 함께 소생 실험을 주도한 게 맞느냐고 묻고 싶으신 거라면, 확신할 수 없습니다. 지하르크 공작님은 언제나 제멋대로 독단의 길을 걷는 분이시지요. 저는 단지 그분의 위치와 여러 의심스러운 정황을 고려해 적대시할 뿐입니다.”

다분히 라파엘로다운 대답이었다.

“이제 제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약간 긴장한 채 고개를 주억였다.

“알펜 세레니예 백작은 누구입니까?”

“…….”

“확인 결과, 마르코프 남작의 부상은 마귀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불어 눈대중으로 짐작한 수준과 비교해 실제 부상의 정도가 매우 미미했지요. 한데 공교롭게도, 하필, 오늘 이 시간대에, 라갈에 복무 중이었던 실전 경험을 지닌 군의관 모두가 일정에도 없던 포상 휴가를 나갔더군요. 상부의 명령이 잘못 전달된 겁니다. 덕분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거주 중인 군의관을 찾고, 방문하여 진찰받은 후, 군의관들을 모두 복귀시키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연회장에 돌아오기까지 2시간이 걸린 건가.

“연회장 내부 사람들은 알지 못하겠지만, 현재 황성에 배치된 군인들 모두가 바짝 긴장하고 있습니다. 습격에 대비한 작전도 진행되고 있지요.”

“…….”

“상대가 저를 얼마나 얕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쟁터에서 마귀와 함께 10년을 구른 몸입니다. 조작된 부상과 진짜 부상을 구분할 정도의 눈은 가졌다는 뜻입니다.”

루가 정말 라파엘로를 얕봤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신씩이나 되는 루가 ‘어리숙한 가짜 부상’ 따위를 만들어 냈을 리 없었다. 상대가 눈치채게 만들어 조롱하려는 의도라면 몰라도.

‘하아.’

아무래도, 루는 라파엘로를 아예 연회장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만들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그의 예상보다 더 빠르게 사건을 수습했고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설마 누이 때문입니까?”

아마,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 짐작해서겠지.

“……내가 보증하는데, 황성을 어지럽히거나 습격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거야.”

“맞나 보군요.”

“미안해. 앞으로 그런 짓은 삼가도록 잘 일러 볼…….”

“누이에게 빌려준 손수건을 직접 돌려준 자도 그자였지요.”

알고 있었어?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라파엘로의 눈빛이 더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모를 줄 알았습니까? 내숭을 꽤 잘 떠나 봅니다, 내 앞에서는 보란 듯이 힘을 내보이며 경고하더니. 그래서 그 남자는 대체 누구입니까?”

나는 라파엘로를 상대로 더 이상 거짓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의문의 주체가 루라면 내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

루가 로궤의 칼레파이며, 반신이란 사실은 라파엘로에게 절대 밝힐 수 없다. 드러나도 되는 사항이라면 루가 구태여 세레니예 백작의 신분으로 움직일 리 없는 까닭이다.

게다가 루가 아스트로사의 세레니예 백작이란 점은 거짓이 아니었다. 단지 루가 활용하는 대외적인 신분일 뿐.

결국 내가 라파엘로에게 알릴 수 있는 진실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는…… 나의 은인이야.”

막상 입에 담고 보니, 말하는 내가 답답해질 만큼 빈약한 답이었다.

라파엘로의 반응 역시 당연히 좋지 않았다.

“설마 그것으로 끝입니까? 어떤 은인인지, 어째서 소중한지에 대한 설명도 없이?”

뒤늦게 따로 설명을 덧붙이려 했지만, 라파엘로는 내 변명을 허락하지 않았다.

“방금 질문은 제가 생각해도 멍청했던 것 같군요. 놀랄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당신에게 있어 저는 딱 그 정도 존재인 것을.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아마 미래에도.”

“라파엘로.”

언제나 곧고 강직했던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어긋났다.

“단 한 번이라도 날 찾아와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 겁니까?”

파도조차 일지 않는 고요한 질책에 내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이제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모르겠습니다. 목숨이 위급한 건 확실합니까? 아니, 애초 살아 있는 게 맞습니까? 그 껍질도 가짜이지 않아? 나와 함께한 10년 중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진짜였던 겁니까? 설마 죽음도 속임수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야. 아니야, 라파엘로. 절대 아니야!”

나는 침착하게 라파엘로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바위처럼 굳은 라파엘로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선 사과부터 할게, 라파엘로. 진심으로 미안해. 그러나 하늘에 맹세컨대 널 업신여기려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속임수라니, 차라리 그러길 바…….”

“아니라고?”

그의 팔이 내 손을 거칠게 쳐 냈다. 이윽고 갈 길을 잃어 허공을 맴돌던 내 손목을 강하게 옥죄었다.

“아닌데 나를 속여?”

허물어진 감정이 속절없이 나를 몰아세운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제복 재킷이 땅에 떨어졌지만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아닌데…… 나를, 버렸다고?”

그건, 분명 배신감이었다.

라파엘로의 격렬한 분개가 붙잡힌 팔목을 타고 들어와 내 심장을 찔렀다. 손목뼈가 분질러질 것처럼 아팠다. 뒷골이 쭈뼛 설 만큼 아찔한 고통이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나약한 여인의 몸을 방패로 내세워 그 분노를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말해, 안데르트. 너는 나를 버렸다. 아니라고 할 수 있나?”

“나는 너를…….”

대답과 함께, 꾹 참고 있던 신음이 아주 작게 흘러나왔다.

그 찰나를 알아챈 것일까? 고장 난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던 라파엘로가 아주 천천히 손을 풀었다.

붉게 충혈된 눈이 흐트러지는 꽃잎처럼 거세게 동요했다. 그의 시선은 내 손목에 남은 붉은 자국에 고정되어 있었다. 손을 등 뒤로 다급히 숨기자, 라파엘로는 거친 숨을 들이쉬며 두 눈을 깊게 감았다 떴다.

무언가 말하기 위해 입술이 떨어진다.

하지만 이내 다시 닫혔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천천히 열렸다.

“……너로부터 느끼는 이 혼란스러운 감정이 참을 수 없이 거북해. 그러니 앞으로 다시는.”

격분을 삼키듯, 세게 입술을 깨문 라파엘로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앞으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안데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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