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48화 (148/195)

148화

고아한 낯이 아무렇지 않게 샴페인 잔을 비운다.

세레니예 백작은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듯, 양심의 가책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웃었다. 한숨을 삼킨 나는 제3자가 되어 연회장의 첫 춤을 관람했다.

루는 분명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했다.

그럼에도 왜 멋대로 그런 일을 꾸몄느냐며 질타할 수 없었다.

‘나였어도 비슷한 짓을 했을 것 같아.’

자세한 상상은 힘들었지만…… 적어도 참지는 않았으리란 점만은 확실했다.

사랑이라는 게 원래 주변인들을 자꾸 쳐 내는 것으로 모자라, 그깟 춤 한 번조차 독점하고 싶어서 안달 나는 건가? 이런 감정이 든 상대는 루가 처음이라, 원래 다 이런 건지 내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건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세레니예 백작은 춤을 추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내 첫 춤 상대를 보란 듯이 내보냈으면 양심상 옆자리라도 지켜야 하지 않겠어?

세레니예 백작의 출신과 신분 그리고 외모는 많은 나비를 끌어들였는데, 그중에는 노골적으로 춤 제안을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세레니예 백작은 자신의 어깨를 내보이며 실례를 구했는데, 꼭 그다음에는 내 칭찬을 받으려는 듯 한쪽 눈을 찡긋하며 눈짓을 보냈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칼펜위버 자매와 보냈다.

딱히 춤출 의사가 없다는 건 우리들의 몇 없는 공통점이었다. 우리는 내내 술을 마시고, 종종 다가오는 칼펜위버 자매의 친우들과 담화를 나눴으며, 이따금 주위를 돌아보면서 최고의 춤꾼을 뽑았다.

타라가 뽑은 최고의 춤꾼은 리웨인이었다. 그는 단연코 이 연회 최고의 인기인 중 한 명이었다. 웍호드 자작 부인의 바람대로, 여러 여인들과 통성명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리웨인의 춤 제안을 거절하는 여인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리웨인은 쉬지 않고 춤을 춰야 했다. 발견할 때마다 추고 있어서 마음이 조금 짠했다.

세레니예 백작은 내 옆자리를 지켰지만, 대체로 아주 바빴다. 나이 든 아저씨들과 무슨 대화를 그리 나눌까 싶어 귀를 기울여도 금방 흥미를 잃었다. 지루했다는 이야기다.

가끔 나와의 관계를 묻는 자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세레니예 백작은 다음처럼 답했다.

“아직 뭔가 이룬 건 아닙니다. 이쪽이 일방적으로 구애하는 관계이지요.”

세레니예 백작의 발언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드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구애’를 입에 담는 남자의 태도치고 이상하리만큼 여유로웠던 까닭이다. 덕분에 이야기의 화제는 금방 바뀌어서 귀찮은 상황을 덜었다.

그렇게, 연회가 시작되고 2시간이 지난 후.

사라졌던 라파엘로가 다시 등장했다.

사냥제 무도회는 이제 막 무르익고 있었다. 시침은 숫자 12를 가리켰고, 보통 해가 떠야 연회가 파한다고 했으니 앞으로 6시간은 쉬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라파엘로의 존재를 인지한 후 내가 세레니예 백작을 봤을 때, 그 역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칼펜위버 자매에게 실례를 구한 후 그에게 속삭였다.

“잠시 만나고 올게. 이번에는 방해하지 말아 줘.”

세레니예 백작이 선뜩한 미소로 돌아봤다. 나는 그런 그의 어깨를 차분히 두드리며 뒷말을 덧붙였다.

“라파엘로는 10년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해 온 동료야. 단둘이서 조용히 대화 나누고 싶어.”

“단둘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야기야. 당신도 이미 알고 있잖아?”

“이런. 내가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네. 첫 춤 따위 너그럽게 내줬다면 우리 데이지 양이 이런 요구를 내걸 리 없었을 텐데.”

우아하게 잔을 내려놓은 세레니예 백작이 내 턱을 짧게 쓸며 웃었다.

“내가 몰래 널 뒤따르기 전에 어서 가, 데이지.”

나는 곧장 라파엘로에게 접근하기보다는, 그가 나를 발견할 수 있도록 무도회장 내부를 크게 돈 후 바깥으로 나가 가장 가까운 테라스로 이동했다.

그와 춤을 출 기회는 이미 물 건너갔으니 조용한 곳에서 대화라도 나눠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오늘, 라파엘로에게 나의 이야기를 밝힐 것이다.

솔직히 그가 곱게 들어 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라파엘로는 이미 나를 안데르트 파거가 아닌 ‘안데르트 파거의 누이인 데이지 웨더우즈’로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네가 나를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리겠다는 뜻인지, 내 사정을 존중하겠다는 뜻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밝히기로 다짐한 것은…….

‘더 이상 그를 속이고 싶지 않으니까.’

예상대로 라파엘로는 곧장 나를 따라 나왔다.

“여기야.”

가볍게 손을 흔들자, 문 근처에 서 있던 라파엘로가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에게서는 조금은 후덥지근했던 공기를 완전히 잊게 할 만큼 상쾌한 바깥 내음이 풍겨 왔다. 이제 막 연회장에 도착한 듯싶었다.

내 앞에 선 라파엘로는 진정성이 느껴지는 얼굴로 예의 바르게 사죄했다.

“많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겨우 2시간 정도 지났는걸. 기억에 오래 남는 사교계 데뷔가 되겠어.”

“이번에는 저로서도 드릴 말씀이 없군요.”

“그래? 솔직히 늦게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나는 춤에 별로 자신 없거든. 아직 구두가 익숙하지 않아서 오래 신고 뛰어다닐 용기도 안 나고.”

라파엘로는 미약한 의문이 깃든 시선으로 내게 물었다.

“정말 아무와도 춤을 추지 않으신 겁니까?”

“약속한 당사자가 자리를 비웠는데 어떻게 추라는 거야? 가상의 라파엘로 제나일 공작이라도 데려와서?”

“리웨인 경과 지하르크 공작님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기야 하지. 하지만 그들과 첫 춤을 추면 너는 나중에 ‘저랑 춤추는 게 그렇게 싫으셨습니까?’라고 투덜댈 거잖아. 틀려?”

라파엘로는 반박보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신기하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곧 놀라울 것 없다는 얼굴로 변한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싶다가 ‘안데르트니 그럴 만도 하지.’로 생각이 바뀐 건가. 이걸 괘씸하다고 해야 할지.

“어때, 라파엘로. 오늘 밤에 나타샤 황녀가 나타날까?”

“……글쎄요.”

굳은 표정으로 말끝을 흐린 그가 내게 등을 돌렸다.

“일단 저를 따라오십시오. 약속대로 디안 케트의 유산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순수한 의문이었는데, 라파엘로의 귀에는 한시 빨리 물건이나 내놓으라는 재촉처럼 들렸던 것 같다. 이거 좀 미안한데. 그래도 받을 건 받아야 하니까 곱게 뒤따랐다.

오늘 새벽 날씨는 초겨울이라 해도 믿길 만큼 추웠다.

“기온이 많이 떨어졌군요.”

그리 말한 라파엘로가 제복 재킷을 벗어 내게 건넸다.

이 옷은 안데르트에게 주는 걸까 데이지에게 주는 걸까?

‘……나답지 않게, 사냥제 이후로 계속 라파엘로의 행동을 재게 되네.’

어쩔 수 없다. 라파엘로는 계속 안데르트의 누이로서 나를 대하고 있었으니까. 복잡한 기분으로 받아 든 제복을 어깨에 걸쳤다.

라파엘로가 나를 안내한 곳은 후원을 가로지르는 수로 다리 너머, 우두커니 선 마차 앞이었다. 그가 신호를 주자, 마차에서 내린 하인이 안쪽에 있던 정갈한 외형의 상자를 꺼내 열었다. 그리고 안에 있던 물건을 문 가까운 쪽 의자에 조심스럽게 올려 두었다.

‘이게…….’

디안 케트의 새장.

제나일 성에서 한 번 본 기억이 있어서인지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다만 가까이에서 확인한 새장은 어렴풋이 훑었을 때보다 더 낡고 형편없는 모양새였다.

명색이 새장인데 문은 온데간데없었고, 철장에 묶인 가죽끈 한 줄이 안쪽 바닥에 곱게 놓여 있었다.

“그 줄은 새의 꼬리표였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꼬리표는 새의 이름표다. 가죽끈을 조심스럽게 뒤집자, 정가운데 새겨진 검은 글씨가 보였다.

『애쉬』

또.

이 이름이다.

“……라파엘로. 이 물건, 가짜는 아니겠지?”

글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오묘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아, 마법으로 보존되고 있는 것 같았다.

라파엘로가 되물었다.

“가짜라고 의심되는 정황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없어서 문제다. 그래, 적어도 ‘애쉬’라는 이름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 ‘애쉬’라는 이름이 아주 익숙한 필체로 적혀 있다면…….

‘그리고 그 필체가 내 필체라면.’

여기서부터는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애쉬.

애쉬.

애쉬…….

…….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왜지?

‘왜 하필 그 이름일까?’

왜 하필 그 이름이, 왜 하필 내 필체로 휘갈겨져 있는 걸까?

디안 케트라는 존재와 나 사이에는 심장 결정석 외에 어떠한 접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도 검성에 의해 우연히 삼키게 된 물건이었다. 유산이라 불릴 정도로 오래된 물건에, 내 흔적이 새겨질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의미이다.

‘아니면 설마, 나도 모르는 사이 디안 케트와 만난 적이 있는 건가?’

내 옆집에 살던 아저씨의 정체가 디안 케트였다거나. 음, 그렇게 똑똑한 아저씨는 아니었는데. 심지어 추측이 옳다고 해도 이런 가죽에 ‘애쉬’라고 적은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뭐…… 한 열 살쯤의 일이여서 기억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고.

도통 답이 내려지지 않는 혼란이었다.

‘이 부분은 루와 상의를 해 봐야겠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

나는 라파엘로에게 협력한 후 받기로 한 또 다른 대가를 요구했다.

“다른 디안 케트의 유산은?”

대답은 빨랐다.

“제가 알기로 버클리그레이튼 공작가에 있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