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라파엘로는 관찰하듯 나를 살피다가 내 손등에 조심스레 입술을 댔다.
라파엘로가 내 손등에 키스했어. 정말 사람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예, 좋은 저녁이군요. 못 알아뵐 뻔했습니다, 누이.”
나는 반쯤 파인 내 어깨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내 어깨가 듬직하기는 하지?”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만.”
“그럼 무슨 의미인데?”
라파엘로는 무어라 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지켜보던 검성이 재밌다는 얼굴로 한 마디 툭, 던졌다.
“솔직하게 말하지 그런가, 라파엘로 공작.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넋을 놨다고.”
검성의 가슴 역시 라파엘로 못지않게 번쩍번쩍한 훈장으로 즐비했다. 백색과 대비되는 흑색의 제복을 걸친 그는 평소보다 더 차갑고 서늘한 분위기를 풍겼다.
“우승 상으로 삼보 황금 조각상을 받았다고 들었다. 운이 좋군, 웨더우즈 자작. 내 것이 될 확률이 더 높았는데.”
나는 미간을 구기며 대꾸했다.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십니까?”
“새로운 사냥 점수에는 마귀의 지분이 크지 않나? 그대는 4,000점이 추가로 올랐던데 내 점수는 그대로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쪽도 분명 비슷한 숫자를 잡았던 것 같은데 말이지. 아무래도, 물밑에서 누군가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군.”
눈길은 여전히 내게 고정되어 있었으나, 검성이 말한 ‘물밑의 누군가’가 세레니예 백작을 가리키고 있음은 너무도 명백했다.
검성과 세레니예 백작의 조합이라니. 상상만으로 등골이 오싹해져서, 둘이 말문을 트기 전에 아무 말이나 재빨리 지껄였다.
“아쉬우시면 셋 중 하나 떼어 드릴까요?”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면 안 돼.”
“그럼 그런 말씀은 왜 하신 겁니까?”
“농이다. 그대가 올해 사냥제의 영웅임은 자명하니 웃어넘기도록.”
칭찬 아닌 칭찬과 함께, 검성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누가 봐도 부하를 치켜세워 주는 태도였다.
“영웅까지는…….”
“누구도 부정 못 할 사실이니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누이께서 리웨인 경을 먼저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대처가 빨랐습니다.”
혼잣말을 기가 막히게 캐치한 라파엘로가 내 얼굴에 금칠을 했다.
뭐…… 기본이긴 해.
“그런데 그…… 가슴 쪽이 굉장히 복잡해 보이는데, 춤춰도 괜찮은 거야?”
“무겁기야 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이제 익숙합니다.”
무겁다는 말. 영웅에게 어울리지 않는 답이었다.
아마, 라파엘로가 말하는 건 훈장 본연의 무게가 아닐 것이다. 그는 훈장에 새겨진 희생자들의 무게를 말하고 있었다. 마땅히 짊어져야 할 전우들의 무게를.
“……떨어지지 않게 살살 춰야겠네.”
“떨어져도 주우면 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누이는 가능한 한 등을 숙이지 마세요.”
왜, 라고 물으려던 찰나. 검성이 자연스레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안 그래도 오늘 라파엘로 공작과 그 사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무슨 사안이요?”
“내게 자작의 첫 춤을 양보해 줄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했지.”
아니, 그 말을 라파엘로한테까지 했단 말이야? 내가 검성을 질책하기 전에, 라파엘로가 먼저 딱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왜 안 되느냐 물었다.”
“약속된 상대를 왜 멋대로 바꾸시려 합니까?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의아하더군. 사교 행사에는 관심도 없던 공작이 왜 이번에는 다른 태도를 고수하는지 흥미롭기도 했다. 그에 대한 라파엘로 공작의 답은?”
“…….”
“이번에는 입을 다무는 건가?”
작게 한숨을 내쉰 라파엘로가 검성을 나무랐다.
“누이는 안데르트가 남긴 유일한 친족입니다. 제가 챙기지 않으면 누가 챙긴다는 말입니까?”
고개를 살짝 숙인 검성이 작게 웃음을 삼켰다.
“라파엘로 경. 경이 웨더우즈 자작을 그런 호칭으로 부를 때마다…… 내 허파가 간질간질해서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어.”
그 말에, 라파엘로가 처음으로 미간을 거칠게 구겼다.
“안 궁금합니다.”
“하여간 웨더우즈 자작을 챙기는 것은 공작의 의무가 아니야. 오히려 안데르트 경의 스승인 내가 그 역에 제격이다.”
왜 내 앞에서 싸우는 건데?
덩치 큰 두 남자가 언쟁하는 모습은 사교계에서 퍽 드문 모습인가 보다. 힐긋힐긋 돌아보는 주위의 시선이 흥미로 짙어졌지만, 그와 반대로 나는 빠르게 질려 갔다.
이 상황이 난감해서가 아니다. 정확히는 빌어먹게 익숙해서지.
기실, 이 둘은 쿵짝이 잘 맞다고 보기 어렵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다. 한쪽은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합리파였고, 다른 한쪽은 정의와 윤리를 중요시하는 인의파다. 작은 일부터 큰일까지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개고생하는 건 나였지. 의도치 않게 둘 사이의 중재 역할을 수행해야 했으니까.
“안데르트 경이 고생 좀 해 주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나타샤 황녀 전하께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안데르트 경이니 지하르크 공작님 앞에서 대거리 놓고, 라파엘로 사령관을 평화롭게 구슬릴 수 있는 겁니다. 장담하는데, 경이 없었다면 내전이 먼저 일어났을 겁니다.”
두 고슴도치의 가시는 전쟁이 길어지면서 서서히 누그러졌다. 서로의 방식이 더 옳을 때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제 개고생 좀 덜겠다 싶을 즈음 전쟁이 끝났으니.
결국 나만 피해자다, 이 말이야.
“그래서 우리의 안데르트 경……의 누이인, 데이지 웨더우즈 자작의 선택에 맡기기로 했다.”
과거를 회상하는 사이 선택권이 내게로 넘어왔다.
힐끔, 세레니예 백작의 얼굴을 확인했다. 남 일 구경하듯 여유작작한 태도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여우 같은 자.’
검성.
내게 지속적인 관심을 드러내며, 라파엘로와 나 사이를 훼방 놓고 싶은 것일까? 사냥제에서 그게 했던 말을 잊지 않았다.
“내 사람이 된다면, 그대를 괴롭히는 모든 의문을 해결해 주겠다.”
그 말에 내가 잠시나마 흔들렸다는 걸 알아챈 건가. 물론,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검성의 손을 잡는 건 마냥 나쁘지만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나는 남에게 휘둘리는 게 싫다.
“제 선택은 당연히 라파엘로인데요.”
아이러니한 건, 이런 내 청개구리 심보가 검성이 말하는 나만의 장점이란 사실이다.
“어째서?”
“전 바람둥이는 싫어요.”
검성의 무던하던 낯이 처음으로 살짝 어긋났다.
“그건 난생처음 듣는 소리군.”
그러시겠지. 어느 간덩이 부은 놈이 검성의 얼굴에 대고 ‘너 바람둥이잖아’라고 말해?
“로즈벨 백작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버클리그레이튼 공작님은 나이 먹고 젊은 여자나 꼬시는 주책바가지라고요. 아무리 제 나이가 적잖다 해도, 공작님 같은 바람둥이와 춤추며 논란의 중심에 서고 싶지는 않네요.”
미안합니다, 2번 스승. 스승이란 게 다 뭐겠어요? 제자를 위해 고기 방패가 되어 줄 존재죠.
고심하는 얼굴로 입술을 매만지던 검성이 대뜸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웨더우즈 자작에게 퇴짜를 맞게 될 줄이야.”
한데 혼잣말치고는 목소리가 좀 크다. 마치 세상 사람들 다 들으라는 것처럼.
“아아, 아쉽군, 아쉬워. 데이지 웨더우즈 자작에게 퇴짜를 맞다니 지독히도 아쉬워.”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이 남자, 제대로 재미 들렸네.
“아쉬우면 좀 가시죠.”
“하지만 나는 항상 그대와 춤출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기억하게, 웨더우즈 자작. 내가 필요하면 언제 어디서든 부담 없이 부르게나. 만사를 제치고 달려갈 테니.”
검성이 떠난 후, 왜인지 몰라도 잔뜩 흥분한 타라가 내게 속삭였다.
“마, 만사를 제치고 달려오신대요! 그건 거의 고백이나 다름없지 않나요?”
“타라 양은 그 말을 믿어?”
“그야 거짓말하실 분은 아니니까요.”
“바람둥이는 다 거짓말쟁이야, 타라 양.”
그에 타라는 무언가 새로이 깨달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역시…… 남자에 통달한 분! 네 명의 남자를 홀린 팜므파탈!”
얘는 내가 상의 탈의하고 머리 벅벅 긁고 다니던 사내놈이었던 거 알면 기절하겠네.
이윽고 첫 번째 곡의 연주가 시작됐다.
짝을 지은 남녀가 무대 한가운데로 걸어 나간다. 그에 맞춰, 라파엘로 역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 그 손을 마주 잡으려던 순간.
“큭.”
근처에서 짧은 신음이 들렸다.
신음의 주인은 연회장에 도착한 이후, 세레니예 백작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던 아스트로사인이었다.
‘……잠깐. 이 녀석. 일전에 로궤 비행선에서 만났던 그 검사였잖아?’
루와 함께 사절단으로 온 거야?
“허억!”
재차 신음을 터트린 남자가 창백해진 낯으로 무릎을 꿇었다. 음악이 뚝 끊기는 것과 동시에 연회장 안 모두의 시선이 남자에게로 향했다. 이제 보니 복부 쪽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갑자기 상처가 생긴 것은 아닐 테고……. 어제 생긴 상처가 터진 건가?
세레니예 백작은 비틀거리며 주저앉은 남자의 몸을 황급히 부축했다.
“정신 차리게! 무슨 일인가?”
라파엘로가 내 손을 놓고 세레니예 백작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상처를 유심히 살핀 그가 남자에게 말했다.
“마귀에게 당한 상처입니다. 혹시 어제 치료를 받지 않으신 겁니까?”
사냥제 마지막 날, 황실은 마귀와 조우한 이들을 따로 소집해 한 명씩 군의관을 붙였다. 마귀로 인한 상처는 일반인들이 이겨 내기 힘든 상처이기 때문이다.
“자존심 때문에 부상을 숨기고 있던 것 같네. 이를 어쩌면 좋을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갈에는 관련된 전문의가 많습니다. 큰 문제 없이 치료될 겁니다.”
“그런가? 후. 영웅 라파엘로 경이 그리 말해 준다니 안심이야. 고맙네.”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선 라파엘로가 나를 돌아봤다.
“누이.”
다른 누구도 아닌 북대륙과의 수교를 다시금 이어 줄 사절단이 위급 상황에 처했다.
심지어 마귀에게서 입은 상처가 덧난 것으로 추정되는 터라, 관계자이면서도 코앞에 서 있던 라파엘로 입장에서는 모르쇠 할 수 없을 터였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다녀와.”
“죄송합니다. 늦지 않게 돌아오겠습니다.”
“늦어도 되니까 서두르지 말고.”
“감사합니다. 리웨인 경? 나를 도와주게.”
“예.”
라파엘로와 리웨인이 남자를 부축하며 자리를 비운 직후.
나는 세레니예 백작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벽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일부러 그랬지?”
그 상처. 아마 가짜 부상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세레니예 백작이 느리게 웃음을 삼켰다.
“그럼.”
하인에게서 샴페인 잔을 받은 그가 오른손에 쥐고 있던 한 잔을 내게 내밀었다.
“진심으로 라파엘로 제나일과 첫 춤을 출 생각이었어?”
상냥한 목소리가 무색하게, 세레니예 백작의 얼굴은 얼음으로 빚어낸 것처럼 싸늘했다.
“하여간 우리 데이지 양은 이상한 데서 순진하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