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그때.
자연스레 돌린 시야 아래 틈, 지척을 맴도는 땅딸막한 여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는 눈의 주인은…….
“타라 양?”
“네!”
사냥제에서 내게 구조된 칼펜위버 자매 중 동생이었다.
타라 옆에 선, 상대적으로 키가 크고 마른 여인은 칼펜위버 자매 중 언니였다. 밝은 미소와 함께 다가온 여인이 내게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웨더우즈 자작님. 저는 칼펜위버 가문의 첫째인 에그위나 칼펜위버, 이쪽은 제 동생인 타라 칼펜위버입니다.”
소개를 마치기 무섭게 타라가 내 팔에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웨더우즈 자작님, 너무너무 뵙고 싶었어요! 고작 하루가 지났지만요! 어젯밤은 잘 보내셨나요?”
“타라.”
언니인 에그위나가 엄중히 질책하기 무섭게, 어디선가 짧은 탄식이 들려오는 듯했다.
“하아. 딸 키워서 뭣 하나. 지 애비도 저런 표정으로 올려다본 적이 없는 것을…….”
칼펜위버 후작이 멀지 않은 곳에 숨어서 딸들을 훔쳐보고 있나 보다.
에그위나의 질책은 듣는 척도 않던 타라였지만, 이내 내 양측에 선 두 거대한 벽을 발견하고는 쭈뼛쭈뼛 물러섰다.
“죄송해요. 파트너께서 계시는데 제가 함부로…….”
“괜찮아. 내 옆에 껴 있어.”
“정말로요?”
둘이 못 다투게 가드해.
에그위나에게 파트너 여부를 물으려던 순간. 무도회 위쪽에서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사 숙녀 여러분. 무도회를 시작하기 전에 짧은 시상식을 진행하겠습니다. 사냥제 우승자께서는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드디어.
내가 누구? 사냥 대회 우승자.
위풍당당하게 걸음을 옮겨, 시종장 앞에 섰다. 시종장은 언짢은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등 뒤에 마련된 유리 관을 천천히 열었다.
우리를 둥그렇게 둘러싼 귀족들이 목을 길게 뺀 채 시선을 집중했다.
“올해 우승자인 데이지 웨더우즈 자작님에게, 황제 폐하께서 상을 하사하셨습니다. 펜 로타 삼보의 황금 모형입니다.”
펜 로타 삼보.
펜 로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보물.
흰 대리석 원탁 위에서, 세 개의 황금 조각상이 그 눈부신 자태를 자랑한다.
“오른쪽부터 왕홀, 왕관, 보주입니다. 왕홀과 왕관을 상징하는 카타발로카 다이아몬드와 보주를 상징하는 자수정은 모두 작게 커팅되어 박혀 있습니다. 황제 페하께서 아스트로사 왕국 출신의 장인, 크레드네를 초대해 단 한 세트만 제작하셨습니다.”
“크레드네!”
곳곳에서 작은 탄성이 터졌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크레드네라는 장인이 꽤 유명한가 보다. 게다가 단 한 세트라니? 희귀성은 곧 귀중함을 나타내는 증표.
시종장이 맨 오른쪽의 황금 조각상을 내게 건넸다.
“이 왕홀은 거만한 독선에 대한 경계의 표상.”
내 곁에 선 하인이 나 대신 황금 조각상을 받아 들었다. 이윽고 시종장이 두 번째 황금 조각상을 집어 건넸다.
“왕관은 비참한 부도덕에 대한 기오의 표상.”
그리고 마지막 황금 조각상.
“보주는 부정한 악귀에 대한 왕국 수호의 표상.”
각기 다른 황금 조각상을 든 세 명의 하인이 내 뒤에 선 후. 시종장이 내게 말했다.
“삼보 중에서도 보주 아래에 적힌 글귀는 황제 폐하께서 직접 각인하셨습니다. 열흘 후 황성을 찾아오십시오. 폐하께서 자작과의 만찬을 기다리십니다. 사냥제에 참석한 모든 분들은 웨더우즈 자작님의 우승을 축하해 주십시오.”
나를 둘러싼 이들이 호탕하게 박수치며 가벼운 축하 인사를 한마디씩 건넸다.
“우승을 축하합니다, 웨더우즈 자작.”
“폐하와의 만찬이라니. 한 번 우승한 것으로는 얻을 수 없는 귀한 기회이오. 진정 부럽군.”
“아아악! 너무 멋져요! 웨더우즈 자작님은 세계 최고 미녀 검사! 세계 최고 호쾌녀!”
“타라!”
그렇게 한 바퀴 쭈욱 돌아 모두의 관심이 식을 즈음.
하인이 들고 있던 황금 보주를 뒤집어, 그 아래에 각인된 글씨를 확인했다.
『그대의 영혼은 부정한 악에 물들지 않기를』
시종장이 보주를 건네며 얹은 말을 떠올렸다.
“보주는 부정한 악귀에 대한 왕국 수호의 표상.”
부정한 악.
무려 황제가 손수 각인하여 전달한 말이다. 의미 없는 전언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메피스토의 힘이 어떤 기운을 띠고 있는지 루를 통해 확인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황제는 내게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이 악은 메피스토를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다른 말로는 메피스토에게 영혼을 빼앗기지 말라, 정도인가.’
한데 문장 중 ‘그대의 영혼은’이라는 어감이 마음에 걸린다. 마치 다른 누군가는 이미 부정한 악에 물들었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들이 나서서 내가 받은 삼보 황금 조각상을 수거해 갔다. 내일 아침 타운 하우스에 직접 전달해 준다고 하니 잡일을 덜었다.
“내가 선택한 여자일세.”
가장 크게 박수치던 세레니예 백작이 내 등을 두드리며 팔불출처럼 굴었다. 그에 기다렸다는 듯 리웨인이 일갈했다.
“선택이라니요? 불경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백작님의 나이를 생각하십시오.”
“나이는 한낱 장애물에 불과하지. 젊음은 신기루나 다름없고.”
“나이 차뿐만이 아닙니다. 기혼이시지 않습니까?”
“전 아내는 오래전 세상을 떠났으니 괜찮네.”
“그분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으십니까?”
“느낄 리가? 한시 빨리 떠나라고 재촉한 게 나인 것을.”
“예?”
“웨더우즈 자작과 결혼하려면 환부(아내를 잃고 혼자 지내는 사내)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특별히 부탁했네. 이왕 떠날 거 일찍 떠나라고.”
리웨인은 소리 없이 경악했다. 그걸 믿어? 리웨인도 참 순진하다니까.
그러든지 말든지, 세레니예 백작은 뻔뻔하기 짝이 없는 낯으로 제 할 말을 이었다.
“게다가 딸……과는 남남이나 다름없으니, 어느 면으로는 미혼남과 다름없는 몸이야. 홀로 사는 미모의 남성이며, 마음만은 새것처럼 순수한 순정남. 게다가 이것도 풍족하지.”
세레니예 백작은 엄지 끝과 검지 끝을 동그랗게 말아, 작은 원형을 그려 보였다. 그러고는 곧 산뜻한 미소를 그리며 리웨인에게 물었다.
“아. 경은 나보다 돈 많나?”
솔직히 말해서.
‘좀 부끄럽다.’
입대하면서 봤던 혈기 넘치는 청년 귀족들도 세레니예 백작만큼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균형이 무너지면서 사람이 더 막 나가게 된 건가? 하지만 세레니예 백작 자체가 원래 그런 인물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칼펜위버 자매가 안 좋은 화법을 배울까 싶어 뒤로 물러서려는데, 타라의 불꽃처럼 일렁이는 눈빛이 세레니예 백작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내 시선에 흠칫 몸을 떤 타라가 뒤늦게 헛기침하며 등을 돌렸다.
“죄송해요. 훌륭한 치정 싸움을 코앞에서 관전하려니 손이 다 떨려서요. 이런 건 처음 봐요.”
나도 너 같은 애는 처음 봤어.
“괴, 굉장히 허접한 멘트였는데도 세레니예 백작님께서 입에 담으시니 이상하게 우아하네요. 역시 사람은 외모와 목소리가 다인 걸까요?”
“좀 닥치렴, 타라.”
동생을 매섭게 다그친 에그위나가 알게 모르게 붕 뜬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곧 첫 춤이 시작되겠네요.”
그 말이 맞다.
하인들이 연회장을 오가며 술잔을 돌리는 것을 시작으로, 실내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뒤바뀌었다.
일단 이름도 잘 모르는 이들과 눈이 마주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은근한 눈짓에 당황을 겪은 후에야 아, 나와 눈을 마주친 게 아니구나 하고 깨닫는다. 내 뒤편에 선 이성과 눈인사를 주고받고 있던 것이다.
가족 단위로 뭉쳐 있던 그룹들이 빠르게 흩어지고 젊은 여인은 여인들끼리, 젊은 신사는 신사들끼리, 귀부인은 귀부인들끼리 모여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었다.
‘어제 그 사달이 일어났는데도 다들 아무렇지 않아 보여.’
이 연회장만은 안전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까?
현 시각, 황성 내부는 버클리그레이튼 기사단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 로즈벨 백작, 라그휘르텐 백작 등 굵직한 군부 인사들 역시 연회장 안과 밖을 교대로 오가며 만일의 사태에 전력을 다해서 대비하고 있다 들었다.
‘연회가 갑자기 취소되면 여러 낭설이 돌 테니 조금 무리해서라도 진행하려는 거겠지.’
게다가 북대륙연합을 비롯한 각국의 인사도 참석했으니 더더욱 발을 빼기 힘들었으리라.
나는 샴페인을 세 잔째 들이켜던 칼펜위버 자매에게 물었다.
“에그위나 양과 타라 양의 파트너는?”
“저희 둘 다 약혼자가 있는데, 몇 주 전 산사태가 일어나면서 낙마 사고를 겪고 말았어요. 그래서 저는 두 번째 곡부터 아버지와, 타라는 백부와 춤을 출 예정이에요.”
“시시하죠? 웨더우즈 자작님의 첫 춤 파트너는 어떤 분이신가요? 세레니예 백작님? 아니면 리웨인 경?”
그 질문을 받고 나서야 라파엘로의 존재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라파엘로도 지금 연회장 밖에 있으려나?’
의문을 갖고 주위를 둘러보던 순간.
주위의 소음이 뚝 끊겼다.
우리는 약속한 듯 한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침묵을 뚫고 홀연히 들려오는 인기척. 무겁게 경직된 걸음걸이. 그 걸음의 주인과 눈이 마주친 시점부터 그와의 거리가 빠르게 짧아졌다.
눈부신 백색 제복과 오른쪽 가슴에 달린 훈장이 휘황찬란했다.
라파엘로 제나일.
그와 나의 간격이 좁혀질 동안, 내 옆에 선 타라 혼자 입을 가린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머나. 난 몰라, 난 몰라!”
나는 세레니예 백작을 의식하며 담백하게 첫인사를 건넸다.
“좋은 저녁이야, 라파엘로. 지금 도착했나 보네.”
한데 이제 보니 라파엘로뿐만이 아니라 검성 역시 이제 막 연회장에 도착한 듯했다.
라파엘로 옆에 자연스레 서서 날 내려다보고 있는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