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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40화 (140/195)

140화

단번에 차가워진 검성의 눈빛이 정면을 향했다.

“안데르트.”

그는 습관처럼 내 이름을 머금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검을 빼 들었다.

말 두 필이 만들어 내는 소음은 마귀의 흥미를 금방 끌어냈다. 나무 위를 날아다니는 검은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매처럼 날아든 마귀를 일격에 벤 순간.

“키……익.”

나무 뒤쪽에 옹기종기 모인 여덟의 인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는 은발의 남자가 있었으니.

“……루?”

그 순간.

나는 호흡조차 잊었다.

루의 한쪽 어깨가 흉측하게 뚫려 있던 것이다.

내 얼굴을 확인한 루가 말도 안 되게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이했다.

“아, 드디어. 내 영웅께서 제때 오셨군.”

허겁지겁 안장에서 내린 나는 사람들 틈에 자리한 루에게 뛰어갔다. 그런 내 모습에 기겁한 몇몇이 화들짝 놀라며 멀리 뒷걸음질 쳤다.

다행히 지혈은 되어 있다. 지혈은 되어 있는데…….

“어깨가…….”

“괜찮아. 이번 일은 나도 꽤 놀랐다네. 놈들에 대한 탐색이 필요했지. 자네라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 거야.”

안다. 놈들은 가짜가 아닌 진짜 마귀였다. 칼레파로서 그 진위에 대한 여러 여부를 확인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깨까지 뚫려야 하는 거야?’

자가 치료하면 될 것 가지고. 이런 때에도 세레니예 백작 역할에 열과 성의를 다하는 루가 미워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정작 얼굴만 보면 부상자는 따로 있는 느낌인걸.”

내 속도 모르고 여유롭게 떠든 루가 품 안에서 흰 손수건을 꺼내며 물었다.

“내가 자작의 얼굴을 살짝 닦아 줘도 되겠나?”

내 심정도 모르고 그런 소릴 해?

나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 허락으로 받아들이겠네.’

그리 말한 루는 손수건을 물로 적시곤 기분 좋게 내 얼굴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정말…… 또라이 같아.’

깨끗한 물이 뺨에 닿아서일까. 아니면 루를 만나서일까. 숨통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마귀의 피가 풍기는 악취는 마르는 과정에서 대부분 증발한다. 그 사실이 지금 이 순간만큼 다행으로 느껴졌던 적이 없었다.

“자작의 행색이 유독 어지러워 보이는데. 얼마나 많은 마귀를 처치하며 내려온 건가?”

어쩐지 좋은 일을 했다며 칭찬하는 느낌이라, 당당히 “네 마리!”라고 대답하기 힘들었다.

“음. 뭐, 특별히 대단한 건 아닌데…….”

실제로 마도 전쟁 때에 비하면 산책 수준이긴 하지.

게다가 없던 지능만 더해졌을 뿐, 오늘 갑작스레 등장한 마귀들의 신체 능력은 가짜 마귀들보다 아주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그때. 자매 중 동생이 대뜸 우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아니라니요?”

여인은 마치 자신이 모욕당하기라도 한 듯 잔뜩 흥분한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아닌 게 아닌 거죠! 그쪽 잘생기신 신사 분의 말씀이 맞아요. 웨더우즈 자작님께서 직접 이 일대를 돌아다니며 그 끔찍한…… ‘마귀’라는 괴물들은 모두 베어 내셨어요! 그 탓에 피에 흠뻑 젖으신 거죠. 영광의 흔적이나 다름없어요, 그렇지, 언니?”

갑작스레 지목당한 언니 측이 몹시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곧 엉겁결에 긍정했다.

“어? 아, 응. 그렇지. 정말 대단하셨어요. 죽을 뻔한 저희 자매도 구해 주시고…… 번거로우실 게 분명한데 계속 챙겨 주시며 이동했죠. 이 자리를 빌려서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자매가 나를 바라보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전시에는 흔한 일이었다지만 여자의 몸으로 돌아온 후에는 처음 받는 감사 인사였다. 어색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무리 지어 모여 있던 이들 중 한 명이 은근한 불신이 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이 사실이오? 마귀를 베면서 왔다니. 아무리 봐도 평범한 여인으로 보이는데…….”

번쩍 고개를 든 동생이 목소리의 주인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평범한 여인이 뭐요? 그럼 지금 저희 자매가 거짓말한다는 거예요? 저 피는 다 가짜고요?”

얼마나 날카로운 언사였는지, 조용히 꿍얼거리던 이의 음성이 한층 더 낮아졌다.

“가, 가짜라고 하지는 않았소.”

“그게 그거죠! 방금 그 개구리처럼 펄쩍펄쩍 뛰던 괴물을 처단한 걸 보고도 그딴 말이 나오시나요? 죽을 위기에서 살아난 자작님과 저희를 모욕하지 마세요!”

한참 씩씩대던 여인은 콧방귀를 끼며 내 근처에 엉덩이를 대고 주저앉았다.

한 차례 말다툼이 오가면서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기 직전. 장난치듯 내 코끝을 툭 건드린 세레니예 백작이 손수건을 갈무리하며 물었다.

“겸손하군, 웨더우즈 자작. 저런 소리를 들으면 화나지 않은가?”

속삭이는 것도 아니고, 사방에 대놓고 들릴 만큼 정직한 목청이다. 누가 봐도 방금 전의 의심을 지적하는 태도였다.

‘하기야 진실이란 걸 강조해야 이 사람들도 더 안심하겠지.’

불신은 애초에 큰 불안의 산물이기도 하니까. 한두 번 의심하는 정도는 넓은 마음으로 넘어가 줄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움직인 건 아니라서.”

“자네만 허락한다면 내가 가서 처리하고 오지.”

“또 똥통에 빠뜨리시려고요? 됐어요. 어차피 이름도 몰라요.”

“대인배다운 태도까지?”

“그만 장난치세요. 한데 이곳에는 왜 모여 있는 거예요?”

“정체 모를 비명을 들은 조끼리 하나둘 뭉치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 그게 마귀의 비명이었을 줄은 몰랐지만.”

“날 일찍 만나서 다행이네요. 덕분에 반대쪽 어깨는 무사할 수 있었으니까요.”

세레니예 백작은 더없이 감격스러운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오, 이런. 상냥하기까지 하다니……. 이 세레니예 백작은 진심으로 감동했어. 이렇게 되면 나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어찌할 방도가 없으면 어쩔 건데?

“반했네, 웨더우즈 자작.”

“……예?”

“나는 자네처럼 용맹하고 까칠한 여자를 찾고 있었다네. 평생 행복하게 해 줄 테니 부디 나와 결혼해 주게.”

“예?”

이렇게 갑자기? 나는 사레들릴 것 같은 기분으로 멍하니 세레니예 백작을 쳐다봤다.

‘무슨 생각이야?’

황성에서 결혼 약속 운운했을 때는 그저 장난인 줄 알았는데. 설마 진심이었던 건가?

왜 진심이지?

어째서?

굳이?

“의무라면 어쩔 수 없나. 그럼 내가 잘 노력해 보지. 데이지가 아이를 갖도록.”

서, 설마 진짜로?

“고민하는 기색이군. 설마 이미 미래를 약조한 상대가 있는 건가?”

그 말을 할 때의 루는 유독 날이 선 눈빛을 하고 있어서, 차마 부정을 뒤로 미룰 수가 없었다.

“……아니요, 없어요.”

“아니라고? 그럼 내가 자네의 취향이 아닌 건가? 그럴 리 없는데.”

아이, 아이, 아이.

내 머릿속에는 그 단어만 끊임없이 맴돌았다. 늦어지는 대답을 대신해, 등 뒤편에서 한참 안달 난 비난이 터졌으니.

“그, 그런 식으로 저녁 식사 제안하듯 쉽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또 그 동생이었다.

“우리 웨더우즈 자작님이 얼마나 눈 높으신 분인데요? 오늘 자작님의 뒤를 따라다니며 확신했어요. 자작님은 공공연히 떠돌던 뒷말처럼 꼬리 치며 이 남자 저 남자 홀리고 다니는 여우가 아니셨어요. 오히려 벽이 너무 높아서 남자의 지배욕을 자극하는…….”

“타라! 너 미쳤니? 당장 입 다물지 못해?”

“아, 아퍼! 왜 때려!”

부리나케 달려온 언니가 제 동생의 등을 쉬지 않고 후려쳤다.

여우. 지배욕.

머릿속이 혼란하다. 저 비슷한 조합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났다.

그래, 분명 하녀장이 소유한 책들 중에 있었지. 『폭스 백작 부인 전기 제2권 - 남자의 지배욕을 자극하는 여우』라는 제목이…….

“아아. 이미 세 명의 떨거지들에게도 구애를 받았었지? 그럼 한 명쯤 더 늘어나도 상관없겠어. 안 그래?”

……아니, 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루니까.

“상관없기는 한데…….”

“그럼 아직은 거절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시도 때도 없이 당당한 그를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볼 때였다.

피우우웅.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저만치 창공으로 뻗어 올라간 소음이 초록색 빛과 연기를 내뿜으며 퍼져 가기 시작했다.

초록색은 본부에서 올린 신호탄으로, ‘즉각 사냥을 멈추고 복귀하라’는 신호였다.

‘리웨인이 제 역할을 잘 이행했구나.’

여기서 더 떠들 여유는 없다. 우리는 곧장 본부로 돌아갔다.

다행히 본부는 사냥터에서 귀환한 이들로 바글바글했다. 그중에서 라파엘로와 리웨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조사를 위해 숲 내부로 투입된 것 같았다.

“여기! 세레니예 백작님이 크게 다치셨습니다. 조속한 치료가 필요합니다!”

하인들과 의원들이 세레니예 백작 주위로 모이기 시작한다. 괜한 걱정에 주변을 서성이는데, 시선이 마주치자 한쪽 눈을 찡긋하는 걸 봐선 아주 멀쩡한 듯했다.

‘뭐, 마법 한 번이면 금방 치료되겠지.’

반신이라 걱정이 덜한 점은 참 좋다니까.

“부인, 그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방금 들었어요. ……진짜 마귀가 나타났다는데. 사실일까요?”

“어머, 마귀라니요? 설마요. 트랩에 문제가 생긴 거겠죠.”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진짜 마귀라니?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야.”

“저 외국인도 그렇고, 큰 부상을 입은 자가 둘이나 된다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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