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생각은 나중에. 일단 움직이자.’
다시 안장에 오르자, 이를 악문 채 몸을 일으킨 기사가 내게 물었다.
“이대로 본부에 가시는 겁니까?”
“아니. 서쪽으로.”
“그럼 저희는 동쪽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 끔찍한 마귀들과 마주칠까 걱정되는군요.”
자매들이 외팔로 말에 오르는 기사를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하지만 그런 몸으로 그 괴물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자작님 덕분에 대강의 대처법이 기억났습니다. 하하, 이래 봬도 참전 군인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기사님…….”
나는 호기롭게 가슴을 두드리는 기사의 옆을 지나치며 당부했다.
“그럼 동쪽은 경에게 맡길게. 마귀를 발견하면 신호탄을 터트려. 바로 달려가지.”
“알겠습니다. 덕분에 든든해지는군요!”
다친 기사에게 자매까지 떠넘길 수는 없는 터라, 원래 인원 그대로 서쪽을 향해 나아갔다.
다행인 건 처음으로 터진 폭죽 이후 어떠한 신호도 들려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선두 아래쪽으로는 아직 안 내려간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맞은편에 세 번째 마귀가 나타났다. 역시 서쪽에서만 나타나는 건가.
마귀가 자매를 공격하기 전에 이동을 멈추었다.
일부러 더 크고 거칠게 걸음을 딛자, 마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대로 타깃의 가슴 아래로 파고들어 상체를 베어 내려던 순간.
푸욱.
마귀의 뒤통수를 뚫고 내려오는 검날이 있었다.
“키엑.”
마귀의 몸이 거칠게 바닥으로 처박혔다. 검의 주인은 확인 사살하듯 마귀의 목을 동강 낸 후, 익숙하게 피를 털어 냈다.
내게는 아주 익숙한 몸짓이었다.
“공작님.”
쯧.
짧게 혀 차는 소리와 함께, 검성의 차가운 녹안이 나를 돌아봤다.
“피에 흠씬 젖은 채 싸우는 습관 좀 버리라 했더니. 아직도 못 버린 건가? 그대도 참 고집이 세.”
검성은 새까만 피가 드문드문 묻은 검을 천천히 검집에 갈무리했다. 주저앉아 있던 나는 코앞에 내밀어진 손을 잡고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순간, 마주 잡은 손을 가슴팍으로 이끌며 불쑥 얼굴을 들이댄 그가 내 이목구비를 샅샅이 훑었다.
“이렇게 보니 그대도 참 그대다. 껍질만 바뀌었지 속 알맹이는 그대로이군. 첫눈에 못 알아본 내가 머저리처럼 느껴질 정도로.”
나는 검성의 단단하다 못해 딱딱한 어깨를 밀어내며 물었다.
“……어느 방향에서 오신 겁니까?”
“서쪽 끝부분에서부터 두 마리를 쓸며 이동했지. 그대는?”
“중앙 부분에서 왔습니다. 아무래도 이 부근에서만 마귀가 발견되는 듯합니다. 동쪽으로 이동한 기사들이 특별한 신호를 보내오지 않는군요.”
“그렇다면 이 녀석이 마지막인 건가.”
마귀의 시체를 발끝으로 툭 건드린 검성이 다시 안장에 올랐다.
자매의 안전을 확인한 나는 뒤따라 말에 오르며 물었다.
“공작님은 이 사태의 원인을 아십니까? 마귀의 존재는 메피스토가 죽으면서 뿌리째 뽑힌 것으로 압니다.”
“글쎄. 자네의 논리라면, 마귀가 재등장했으니 메피스토 또한 죽지 않고 살아 있겠군. 참으로 큰일이야.”
검성은 농과 함께 가볍게 내 곁을 스쳐 지나가며 뒷말을 이었다.
“오늘 사태는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조사가 필요하겠어.”
그는 이 사태의 전말을 모른다.
짧은 전제였으나, 고요히 회오리치던 내 불안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10년 가까이 함께해 온 동료가 변하지 않았다는 안심. 내가 믿어 온 동료를 계속 믿어도 되겠다는 평온함.
하지만.
“……정말입니까?”
그러나 이 사건 하나로 수십의 목숨이 희생됐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재차 진위를 묻지 않고선 도저히 배길 수가 없었다.
“진심으로, 모르시는 게 맞습니까?”
정신 치료와 갑작스러운 마귀의 난입.
이 둘은 정말 우연이 겹친 게 맞는 걸까?
검성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기 무섭게, 그의 말이 화살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뭐야, 지금 도망가는 거야?
뒤따라가는 나를 곁눈질로 확인한 검성이 웃음을 잃지 않으며 말했다.
“언젠가부터 나를 항상 그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던데. 순수한 호기심인가? 아니면 의심인가?”
나는 자매의 존재고 뭐고, 오직 그의 진심을 알아내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크게 소리쳤다.
“지금 공작님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시죠. 의심하지 않기가 힘들 겁니다!”
“객관적인 판단. 글쎄. 그렇다면 그대의 의심은 객관적인 의심이 맞는지 묻고 싶은데.”
검성의 목소리는 그리 드높지도 않았는데,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대의 사냥제 참석 소식은 내게도 퍽 의아했다. 그간 쥐 죽은 듯 조용히 살아온 자가 이리도 갑작스레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게 이상하더군. 그것도 ‘안데르트’라는 희대의 미끼를 흔들면서.”
“…….”
“그대가 한 고집 한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던 사실이야. 그런 그대를 움직일 수 있는 존재나 근거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봤지. 나타샤라는 얼굴이 바로 떠오르더군.”
검성이 모는 말의 속도가 서서히 느려졌다.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계책인지 알겠어. 보나 마나 라파엘로 경이겠지. 어떤가, 웨더우즈 자작. 지금 그대가 보는 라파엘로 제나일은 4년 전의 라파엘로 제나일과 똑같나?”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는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많다. 많은 것들을 잃어 공허해진 자들은 변하기 마련이야. 현재의 자신이 쥐고 있는 것만큼은 절대 놓치지 않으려 하지. 그대의 이름 옆에 ‘안데르트’라는 영웅을 박아 넣은 이유가 순수하게 나타샤 황녀 때문이라 여기지 말란 소리네.”
그의 경고는 로즈벨 백작의 경고와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스스로를 지키고 싶다면 지금처럼 계속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겠네. 어느 쪽으로든.”
“뭐, 실제 그런 목적이었다 해도 딱히 효율적이지는 않을 테지만.”
“효율적이지 않다고요?”
“그래, 나타샤 황녀는 그런 눈에 훤히 보이는 방식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거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래 왔어.”
다른 건 몰라도 방금은 꽤 그럴싸한 조언처럼 들렸다.
‘안데르트 파거의 누이로도 부족하면 어떤 방식으로 더 도발해야 하는 거야?’
안데르트 파거가 직접 나타나기라도 해야 하나?
“한데 그대는 나의 무엇이 그리도 의심스러운 거지? 예전에 말해 두지 않았나? 그대와 내가 적이 될 필요는 없다고.”
이 아저씨가 진짜 몰라서 묻나.
“어디가 어떻게 의심스러운지 하나하나 열거해 드릴까요?”
“흠. ……좋아, 이렇게 하지. 지금부터 내게 뭐든지 물어도 좋아. 뭐든지 답해 줄 테니까. 대신 조건이 있다.”
그놈의 빌어먹을 조건 같으니라고.
“또 뭡니까?”
“연회에서 나와 첫 춤을 춰.”
첫 춤? 뜬금없는 조건이었다.
“죄송한데 그쪽은 이미 선약이 있습니다.”
“그 선약을 깰 정도로 간절하다는 걸 어필하란 거다.”
부끄럽지만, 검성의 발언에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그럴 만한 게, 춤 한 번으로 내 의문을 해결해 주겠다고 하니…….
‘음. 나도 예전에 비해 잡생각이 많아졌구나.’
들을 가치도 없는 요구일 텐데.
애초 검성은 나와 라파엘로의 동맹을 깨는 데 크나큰 관심을 보이는 자였다. 따라서 이런 문제로 고심하는 건 검성의 의도대로 혼란에 빠지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방식이 검성답지 않게 치졸하고 유치하다는 거지.
“몇 년 사이에 성격이 조금 고약해지신 것 같군요. 저를 곤란하게 하는 게 재밌으십니까?”
문득 검성이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웨더우즈 자작. 나는 수십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새로운 이들을 만나 왔다. 하지만 그들 중 타인이나 주변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길만 걷는 이는 아주 드물었어. 또한 공교롭게도, 그런 드문 존재가 사람을 모으고 세상을 바꾸더군.”
검성의 번듯하면서도 결연한 시선이 내 얼굴에 고정됐다.
“나는 그런 인재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 바로 그대를 말이지. 성별이나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 그대가 요구하기만 한다면, 나는 다시 남자의 몸으로 돌아간 그대와 결혼할 수도 있어.”
허. 지금 그걸 어필이랍시고 하는 건가?
“그런 말이 저를 더 곤란하게 만든다는 걸 모르시는 겁니까?”
“원래 소유욕과 파괴욕은 공존하기 마련이거든. 그렇다고 해서 애정이 없는 건 아니야. 그대도 알지 않은가? 내 덕에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걸.”
……뭐?
“방금 그 말…….”
“첫 춤은 어렵다 이건가? 그럼 이건 어때. 쓸데없는 연대는 내던지고 완전한 내 사람이 되어라, 데이지 웨더우즈 자작.”
뭐어?
“내 사람이 된다면, 그대를 괴롭히는 모든 의문을 해결해 주겠다.”
뭐어어?
“사람 속 뒤집는 헛소리는 그만하고 방금……!”
뱉은 말의 뜻이 뭐냐고 물으려 했는데.
내 욱한 외침은 전혀 반갑지 않은 존재로 인해 완전히 묻혀 버렸다.
“끼아아아아악!”
“……답은 나중에 들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