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비록 전쟁 극후반이었다 한들, 검성의 전령으로 활동하던 리웨인이다.
직접 검으로 베지는 못했어도 살아 있는 마귀를 마주한 적은 있을 터였다. 게다가 제나일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씩이나 되는 인물인 만큼, 장난질과 긴급 상황을 구분하는 능력도 확실할 거라 여겼다.
“……마귀라니.”
예상대로 리웨인은 내 판단을 의심한다든가,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는 내 예상과 조금 다른 방식의 답답함을 보였다.
“자작님의 명은 따를 수 없습니다. 저는 기사입니다. 가장 먼저 자작님을 본부로 안전하게 모셔다드린 후…….”
“정신 차려, 리웨인 경! 지금 누가 누굴 보호한다는 건가!”
내 호통에 리웨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나는 그런 그의 멱살을 잡아당겨, 면전에 대고 더 커다랗게 외쳤다.
“융통성 있게 굴어. 기껏해야 사냥용 활 좀 쥐어 본 민간인들이 진짜 마귀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수십의 사망자를 낼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 말에 따라. 너는 본부로 가서 상황을 알리고, 나는 이 주위를 돌며 피해를 최소화…….”
피유우우웅.
그때, 청명한 하늘 위로 샛노란 폭죽이 솟아올랐다.
한 차례 빛으로 산화한 폭죽은 같은 색의 연기를 남기며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중도 포기의 신호일까? 아니면…….
나는 리웨인의 멱살을 놓으며 누그러진 목소리로 설득했다.
“본부로 가면 사냥에 참여한 모든 조원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하인들도 조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했겠지. 시종장에게 현 상황을 알리고 너는 곧장 라파엘로를 찾아가. 잊지 마. 라파엘로나 로즈벨 백작이어야 해.”
곧이어, 눈을 깊게 감았다 뜬 리웨인은 한층 단단해진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무사하십시오, 자작님.”
리웨인은 마귀 시체의 일부를 증거품으로 챙긴 직후 본부가 위치한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확인하기 무섭게, 나 역시 폭죽이 터진 서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렇게 얼마간 수풀을 헤매고 다녔을까?
“여, 여기요! 여기예요. 여기 사람이 있어요. 구해 주세요!”
멀지 않은 곳에서 웬 여인이 맨몸으로 튀어나왔다. 땅 위를 한바탕 구르기라도 한 듯 전신이 더러워진 모습이었다.
“신호탄을 쏜 조입니까?”
“맞아요!”
“나머지 한 사람은?”
오들오들 떨던 여인은 내 검에 묻은 검은색 피를 확인한 즉시 손가락으로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이에요. 저쪽에 제 언니가 남아 있어요! 웨더우즈 자작님이시죠? 리웨인 경에게 언니를 도와 달라 요청을…….”
“리웨인 경은 없습니다.”
여인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기 직전, 나는 여인을 등 뒤에 태운 후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내가 도와줄 테니 걱정 마요. 어떻게 도망친 겁니까?”
여인은 내 허리를 꽈악 끌어안은 채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말을…… 군인 출신인 아버지께서 말을 버리고 도망가면 시간을 벌 수 있다 조언해 주신 게 떠올라서……. 그런데 언니는 너무 당황해서 잊었나 봐요.”
옅은 악취가 풍겨 온다.
이토록 아름다운 숲에, 대낮의 번개처럼 떨어진 마귀의 존재감은 쉽게 지워질 것이 아니었다.
냄새가 짙어질수록 땅의 울림이 커진다. 몇 분 만에 발견한 마귀는 네 발로 개처럼 내달리며 무언가를 뒤쫓는 중이었다.
이대로 속도를 계속 내 봤자 거리를 좁히기 어렵다. 나는 쥐고 있던 검을 내던져 마귀의 등에 박아 넣었다.
“끼아아악!”
한 차례 엎어진 마귀가 나를 발견하고는 덮칠 기세로 높게 뛰어올랐다.
파지지직.
나는 빠르게 진주 검을 꺼내 검기를 휘둘렀다. 쿵. 머리가 반으로 쪼개진 마귀는 힘없이 땅으로 추락했다.
넓게 퍼진 검은 피에 흠칫, 몸을 굳힌 여인이 곧 말에서 내려 마귀가 날아온 방향으로 뛰어갔다.
“어, 언니! 언니이!”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또 다른 키 큰 여인이 그런 여인을 마주 안았다.
“세상에, 타라! 무사했구나!”
극적 상봉한 자매는 한참 서로의 몸 상태를 확인하다가 내게로 달려왔다.
“감사합니다. 제 동생을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웨더우즈 자작님.”
“뭘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설마 진짜 마귀는 아니겠지요? 본부는 이 상황을 알고 있을까요?”
“사람을 보냈으니 곧 기사단을 파견할 겁니다. 마귀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기억하십니까?”
“아마…… 서쪽이었던 것 같아요.”
이대로 휴식을 취할 여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자매를 덩그러니 둔 채 떠날 수도 없는 터라, 나는 그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마저 이동했다. 그렇게 4분가량이 흘렀을 때.
‘우리와 자매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면 이 근방쯤…….’
“끼아아아악!”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마귀의 비명 사이로 들리는 거친 숨소리.’
비명이 들린 방향으로 방향을 틀자, 맞은편에서 점차 가까워지는 검은 인영이 보였다.
검은 인영의 정체는 이제 막 성인이 된 듯한 앳된 인상의 남성이었다. 어린 남성은 창백해진 얼굴로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도, 도망쳐! 이쪽으로 오면 안 돼! 괴물이 쫓아와!”
말을 탄 어린 남성의 뒤로 미친 듯이 날아오는 마귀의 형상이 보인다. 그뿐만이 아니다. 마귀의 뒤로는 한눈에 봐도 건장해 보이는 체격의 기사가 검을 든 채 뛰어오고 있었다.
‘기사가 이 남자를 피신시키려고 했던 건가?’
그러나 인간의 걸음으로 마귀를 따라잡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게다가 하필이면 말에 태워서 피신시키다니. 최악의 수였다.
“속도를 더 높여!”
내 외침에 어린 남성이 절망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불가능해! 여기서 더 높일 수는……. 잠깐, 도망가라니까 어디로……!”
두 마리의 말이 엇갈린 순간.
나는 검의 옆면을 들어, 남성의 뒤통수를 뚫으려던 마귀의 앞다리를 가로막았다. 이어서 그대로 날 방향을 튼 후 마귀의 다리와 목을 함께 베어 냈다.
“키, 에엑…….”
단말마와 함께 마귀의 머리가 땅으로 떨어졌다.
기사는 직후 도착했다.
“허억, 허억. 이든! 괜찮으냐?”
“형님! 형님이야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어린 남성의 안전을 확인한 기사가 거친 호흡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큭.”
한데 기사의 상태가 좋지 않은 듯하다. 특히 왼쪽 팔의 상처가 꽤 깊어 보였다.
의복이라도 찢어 지혈하려는데, 뒤따라온 자매 중 동생이 황급히 입술을 뗐다.
“저, 저에게 지혈제와 붕대가 있어요. 아버지가 억지로 챙겨 주신 물건인데 이렇게 쓸모가 생길 줄은…….”
그분 참. 얼굴은 못 뵀지만 3명이나 살린 영웅이시네.
응급 치료는 어렵지 않았다. 부상자가 워낙 숙련된 기사였기에 소독도 지혈도 손쉬웠다.
“감사합니다, 웨더우즈 자작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하마터면 외팔 검사가 될 뻔했지 뭡니까, 하하!”
호탕하게 웃는 기사의 얼굴이 묘하게 익숙하다. 얼굴과 손등이 자잘한 상처로 덮인 걸 봐선 전쟁터에서 몇 번 마주친 사이인 듯했다.
그래서 더 의문이 들었다.
“경은 참전 기사이지 않나? 어째서 동생을 말에 태워 피신시키는 위험한 짓을 한 거지? 마귀가 소리에 예민하다는 건 알 텐데.”
활기차게 웃던 기사의 표정이 단번에 암울해졌다.
“그건…… 부끄럽습니다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상하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더군요. 처음 마주한 것도 아닌데, 수습 기사 때처럼 허둥거리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전시에는 분명 이러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말끝을 흐린 기사가 제 옆에 무릎 꿇고 앉은 어린 남성의 어깨를 조심히 두드렸다.
“미안하다, 이든. 내가 널 사지로 몰아넣었구나.”
어린 남성은 반쯤 울먹이는 얼굴로 기사의 손을 꽈악 부여잡았다.
“그런 말씀 마세요, 형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한 명이 울음을 터트리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상황이 떠올랐는지, 내게 구조 요청을 한 여인은 어깨를 부여잡은 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들을 위로할 여유가 없었다.
‘수습 기사처럼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라.’
기실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 쉽게 스쳐 지나갈 증언이었다.
하지만 의미를 두지 않기가 힘들다. 눈앞의 기사가 뿜고 있는 기세와 능숙함은 방금 보인 대처를 한낱 실수로 치부하기 힘들게 했다.
‘역시 전쟁 후유증 때문에 몸과 머리가 반사적으로 굳어 버린 건가?’
하지만 라파엘로가 말하기를, 대부분의 참전 군인이 정신 치료를 통해서 후유증을 이겨 냈다고 했다.
……잠깐, 설마.
“경. 경도 혹시 종전 후 후유증 완화를 위한 정신 치료를 받았었나?”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기사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주억였다.
“아, 예. 저도 그 치료를 받았습니다.”
전쟁 후유증을 이겨 낸 기사.
‘그래, 그래서 어리숙하게 굴었던 거였어.’
후유증이 치료된다는 건 결국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핵심 기억이 소거되거나 옅어진다는 뜻.
그 말인즉슨, 마귀를 마주했을 때 발현되는 학습적인 자기 방어와 대처법이 백지로 돌아갔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연일까?’
마귀 대처법을 잊은 기사들과, 어느 날 우연히 다시 나타난 마귀들.
이 모든 게 정말 우연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