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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37화 (137/195)

137화

만일의 사태라.

‘루도 비슷한 경고를 한 걸 봐선…… 뭔가 있기는 한 모양인데.’

나는 검성을 살폈다. 황제와 저 남자에게 내가 모르는 꿍꿍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지만, 눈에 띄는 변화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리웨인 경. 만약 대회 도중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면 나는 상관 말고 곧장 라파엘로나 로즈벨 백작에게 알리러 가.”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긴장 좀 하라고. 아직 4등이잖아? 내 남편 하고 싶어?”

리웨인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상 위에 등장한 시종장이 우리에게 고했다.

“사냥꾼과 보좌는 보급품을 받아 가십시오. 개인 무기를 따로 챙겨 오신 경우 그대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하인이 내 앞으로 검과 활 그리고 창을 내밀었다.

진주 귀걸이를 잠시 매만지다가 하인이 건네는 검을 집었다. 루의 검은 이런 데 사용하기 아까운 감이 있다. 하물며 진짜 마귀도 아닌 가짜니까.

“둘째 날 사냥에서는 44개의 조가 우선 출발하며, 이후 15분이 지나서 추가 6개의 조가 출발합니다. 더불어 올해 사냥 대회의 우승 상품은 연회에서 공개될 예정이니 알아 두시길 바랍니다.”

그게 뭐람. 우승 상품을 알아야 사냥할 맛이 나는 법 아니냐고.

‘그런데 그게 끝이야?’

트랩이랑 마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어?

“사냥제 말이야. 원래 이렇게 설명이 부족해?”

“사냥제는 동절기를 앞둔 군주가 농노들에게 식량을 베풀던 것이 기원입니다. 이 같은 전통이 나중에는 장원을 지닌 귀족이나 관리의 의무가 되면서 더 크게 발전해 지금의 사냥제가 되었죠. 대대로 귀족 가문만 참석했던 행사이기에, 새로운 얼굴이 나타나 봤자 다음 세대 정도가 다입니다. 그러니 대회 방식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한 마디로, 그들만의 대회이기에 설명 없이도 모두가 방식을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신입의 사냥 파트너는 만찬 전부터 정해지는구나.’

귀족답게 오만한 방식이었으나, 어떤 면으로는 최고의 효율을 내는 방식이기도 했기에 대강 납득이 갔다.

딸랑.

대회 시작종이 울리기 무섭게 44개의 조가 모래알 뿌려지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둘째 날 사냥의 규칙은 간단하다.

『하나, 생물이 아닌 ‘마법 트랩’ 해체 시에만 점수가 올라간다.

둘, ‘마법 트랩’은 트랩 내 생성되는 마귀를 사냥해야만 해체가 가능하다.

셋, 중도 포기 및 유사시를 대비한 도움 요청이 가능하며, 이때는 각 조에 배급된 일회용 폭죽을 하늘로 던지면 된다.』

리웨인은 둘째 날 사냥의 사냥꾼이 된 내가 어지간히 걱정되었는지, 등 뒤에 바짝 붙어 마귀 사냥 팁을 줄줄 외웠다.

“트랩에 등장하는 마귀는 실제 마도 전쟁에 등장했던 마귀와 다릅니다. 근력, 속도, 지능 등 모든 면에서 비교 불가로 약하죠. 하지만 마귀를 처음 보는 이는 그 끔찍한 외향과 고약한 냄새에 기절할 수 있습니다. 여성분들은 보통 활을 이용해 사냥하지만 사냥 속도 면으로는 검이 월등하며…….”

있잖아, 리웨인.

마음은 고마운데 나 10년 동안 마귀만 벴다.

마귀 옆에서 스튜도 끓여 먹고 4시간 쪽잠도 잤어.

네가 뭘 알겠냐…….

슬슬 귀에 딱지가 앉지 않을까 걱정하던 시점. 반나절 일찍 밤이 몰려오기라도 한 듯, 등 뒤에서부터 시작해 주위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조심하십시오, 자작님! 트랩에 걸렸습니다!”

“오.”

진짜 정신 트랩이잖아?

은근히 흥분되는걸. 나는 몰려오는 고양감을 느끼며 어둠 속에서 나타난 미지의 존재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귀.

마도 전쟁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괴물.

생체 실험으로 만들어진 키메라라는 둥 대륙을 건너온 괴생명체라는 둥 여러 낭설이 돌지만, 정확한 발원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확실한 점은 지능을 가지고 집단 활동을 하는 생물이며 대마법사 메피스토의 명령만을 듣는다는 것.

외형은 일단 크고 기괴하다.

실제 마귀는 눈앞에 보이는 저 트랩의 마귀보다 정확히 6배 정도 거대하며, 뒷다리는 거미처럼 벌어져 있었고 앞다리의 끝은 창처럼 날카로워 무엇이든 일격에 뚫어 냈다.

누더기처럼 드문드문 달라붙은 피부에서는 끔찍한 악취가 풍긴다. 코는 돼지 코처럼 납작했으나 길고 커다란 입을 가지고 있어 사냥감을 씹어 내기도 제격이었다.

한마디로, 원형적인 생김새는 인간에 가장 가까웠다.

“오.”

꽤 그럴싸하잖아?

일단 생김새. 합격.

기억 속 마귀보다 훨씬 순박해진 외모였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복원력이다.

[끼아아아아악!]

비명. 합격.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베는 느낌도 그대로일까?’

추진력을 위해 구부러져 있던 마귀의 두 다리가 나를 향해 쏘아졌다. 리웨인은 마귀의 타깃이 된 나보다도 더 긴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자작님! 침착하게 행동하셔야 합니다. 자작님이 훌륭한 검사임은 저도 알고 있으나, 상대는 일반 사냥감과 다릅니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처음에는…….”

처음에는, 검을 잡는다.

다음에는, 가슴 아래로 파고들어서 벤다.

[키이이이익…… 키익!]

그 결과, 마귀가 죽는다.

“설마 끝?”

나는 가슴이 두 동강 난 채 쓰러진 마귀를 조용히 내려다봤다.

감촉. 불합격.

습관처럼 입꼬리를 핥았다.

몸 안쪽으로 파고들어 상체를 베어 낼 때면 항상 얼굴에 피가 튄다. 그리고 나는 항상 그 피를 맛보고는 했다. 완전 동화에 빠지지 않기 위한 나름의 묘수였다.

왜냐하면, 마귀의 피에서는 끔찍한 악취가 나거든.

하지만 가짜는 달랐다. 검은 피 특유의 끈적한 감촉은 느껴지지만,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뭐, 당연한 건가.’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삐걱거리는 마귀의 정수리 위로 검을 박아 넣었다.

사냥의 쾌감. 완전 불합격.

통합 점수 불합격.

수고하셨습니다.

사냥감의 숨통이 완전히 끊겼는지, 주위의 어둠이 걷히고 새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마귀의 머리가 위치했던 자리에는 작은 상자 모양의 마도구가 칼에 꽂혀 있었다.

사냥 완료인 건가.

“흠.”

진짜 마귀와 달리 한없이 약하네. 마치 풀꽃처럼.

전신을 지배하던 흥분이 푸시시 식어 버렸다.

이런 걸 마귀라고 할 수 있을까? 구태여 둘째 날 사냥을 생물이 아닌 가짜 마귀 사냥으로 정한 이유가 뭐지.

‘마도 전쟁의 참혹함을 기억할 겸 대비할 방책을 연습해 둔다…… 정도가 이유겠지.’

너무 허술해서 대비가 될까 싶기도 했지만. 여자와 노인 등 약자를 고려하면 나름 최선의 수였을 테다.

나는 넋을 놓은 리웨인 쪽으로 다가가, 수거한 트랩을 그에게 던졌다.

“경은 좋겠다.”

“예?”

“트랩은 가볍잖아. 들고 다니기 쉽겠어. 나도 둘째 날 보좌나 할걸.”

트랩은 대충 손질할 필요도 없고. 게다가 살아 있는 사냥감은 보육원 아이들의 배를 채워 준다는 보람이라도 느끼지, 가짜 마귀 사냥은 사냥한 것 같지도 않았다.

“……이렇게 깔끔하게 잡아 내실 줄은 몰랐습니다, 자작님.”

“이제 알았으니 됐어.”

리웨인이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하기야 심문 때도 저를 한 손에 제압하셨죠. 제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봅니다. 호들갑 떨었던 게 부끄러워지는군요.”

“그게 왜 부끄러워? 너는 날 도우려고 했던 건데. 다른 말로는 선의라고 하지. 내가 아닌 다른 사냥꾼이었다면 네 조언을 뼈와 살처럼 여겼을 거야. 안 그래?”

조금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던 그는 뒷목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겸연쩍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예, 자작님 말이 옳습니다.”

이후 우리는 쉬지 않고 마귀, 아니, 트랩 사냥에 나섰다.

우리 조의 사냥 속도가 유독 빨랐는지 정면으로 나아가는 족족 트랩에 걸렸고, 해체하고, 걸리고, 해체하기를 쉬지 않고 반복했다.

종종 마귀가 두 마리 이상 등장하는 트랩도 등장했지만, 해체되는 데 약간의 시간만 늦춰질 뿐.

재미는 더럽게 없었다.

“경, 마귀 사냥은 원래 이렇게 재미없는 거야? 나 지금 약간 트랩 수거꾼이 된 기분이거든.”

리웨인은 내게 시원한 물이 담긴 수통을 건네며 답했다.

“자작님이 너무 능숙하게 사냥하셔서 그런 겁니다. 마귀의 행동 패턴은 해마다 바뀌는데, 자작님께서는 곧장 파고들어 단칼에 베어 내시니 그 패턴을 외우고 파악할 기회가 없어지는 것이죠.”

“우리 몇 개 모았지?”

“여덟 개입니다.”

“트랩이 총 몇 개 뿌려진 건지 알아?”

“개수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1시간도 되지 않아 8개나 모을 정도면 분명 3위, 아니 2위 안쪽 성적도 기대해 볼 수 있겠네요.”

그리 말하는 리웨인의 얼굴은 미약한 흥분을 품고 있었다. 2등 안쪽이라. 그건 꽤 사냥할 맛이 나는 원동력이네.

그렇게 사냥 시간 1시간을 막 채워 갈 무렵.

“끼아아아아악!”

이번에 밟은 트랩은 이전과 조금 달랐다.

본래 트랩에 걸리면 사방이 어둠에 둘러싸이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나무 틈새에서 마귀가 나타난 것이다.

‘아까 두 마리가 등장한 트랩도 그렇고. 중간중간 색다른 트랩을 심어 놓았나 본데.’

게다가 이번 마귀는 이전 마귀들보다 훨씬 튼튼하고 억세서 단번에 베어 내기가 쉽지 않았다.

숲속 깊숙이 들어갈수록 트랩의 난이도도 높아지는 걸까? 내려놨던 기대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키이이…… 키이익…….”

그리고 습관처럼 입꼬리를 핥았을 때.

“…….”

“자작님?”

이건.

“……리웨인 경. 혹시 사냥제의 트랩은 마귀의 ‘맛’ 같은 것도 구현할 수 있을까?”

“예? 맛…… 말씀이십니까?”

가까이 다가온 리웨인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내 질문에 대답했다.

“어떤 맛을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기껏해야 냄새 정도가…….”

나는 뺨에 묻은 검은 피를 손끝으로 닦아 낸 후, 손가락을 리웨인의 입술 사이로 처박았다.

당황하던 리웨인의 표정이 얼마 지나지 않아 격렬하게 일그러졌다.

“우욱!”

“어때. 너도 느껴져?”

리웨인은 대답 대신 헛구역질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참 동안 등을 굽힌 채 서 있었다.

환각이었다면 절대 보일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건 대체 뭡니까? 어떻게 이런 역겨운 냄새가……!”

“마귀의 맛.”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은 여전히 파랗다.

내 옷에 튄 검은 피는 지워질 생각이 없어 보였고.

트랩 마도구로 변해야 할 마귀의 시체는 여전히 시체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입 안에서 코를 타고 올라오는 이 고약한 악취는 분명…….

“이 성, 아주 불쾌한 기운이 흐르고 있군.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부디 조심하게나.”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주위를 항상 경계할 것』

“이건 가짜가 아니야.”

나를 응시하는 리웨인의 안색이 창백하다.

마도 전쟁에 참전한 그라면 곧바로 기억해 냈을 것이다.

진짜 마귀가 풍기는 이 선연한 악취. 그리고…….

“진짜 마귀가 나타났다. 사냥 본부와 라파엘로에게 가서 이 사실을 고해. 한시가 급하니 지금 당장!”

심장을 뛰게 하는 강렬한 불안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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