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내 두 팔이 그의 몸에 닿기 직전, 쑤욱 뻗어 온 손이 먼저 날 끌어당겼다.
루는 숨이 막힐 만큼 날 꽈악 껴안았다. 이마에 도장 찍듯 진한 키스를 남기다가, 눈꺼풀과 광대 아래까지 보듬듯 입을 맞추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소름 끼치도록 부드러운 무언가가 윗입술을 건드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몸을 뒤로 빼고 말았다.
뭐, 뭐지? 방금 닿았나?
휘둥그레진 눈으로 루를 올려다보는데, 놀라우리만치 무던한 표정이라 내가 예민하게 반응한 건가 싶었다.
‘정말 뭐지?’
내가 착각한 거야? 찰나의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애정 표현을 당한 탓에 머릿속이 멍했다.
음. 그 감촉을 한 번 더 느껴 보면 확신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안녕, 데이지. 역시 직접 만지는 게 최고야. 그렇지?”
음. 확실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감싸 안은 루가 반대쪽 손을 내보였다.
“손.”
달라는 건가? 일단 손을 줬다.
“머리.”
머리? 그건 어떻게 주는데? 손 대신 머리를 올렸다. 곧 커다란 손바닥이 올라와 내 얼굴과 머리를 살살 쓸어내렸다.
“잘했어.”
웃음기 느껴지는 칭찬에 반가움과 언짢음이 동시에 올라왔다.
“내가 개야?”
“나는 개를 이런 식으로 안지 않는데.”
그러고선 내 허리를 당기더니 가볍게 안아 올린다.
몇 번 당해서 그런가,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익숙하게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려던 차. 잊고 있던 하인의 존재가 불현듯 떠올랐다.
“자, 잠깐만. 내려놔. 자작으로서의 품위가 살지 않잖아.”
“품위? 누가 본다고 그런 걸 지켜?”
뭐라? 하녀도 하인도 전부 사람이다! 하는 마음으로 그의 어깨를 밀려는데, 루를 안내하던 하인과 날 안내하던 하인의 눈이 흐리멍덩한 게 보였다.
‘……정신 마법에 걸린 건가.’
루, 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무법자 같으니라고.
뭐라 할 새도 없이, 반대 방향으로 몸을 튼 루가 느릿느릿 걸음을 이었다. 본성을 나가는 방향이었다.
나는 반쯤 포기한 채 양팔로 그의 목을 껴안았다. 실처럼 얇고 보드라운 은발이 뺨에 닿자, 늑대가 된 그의 등에 업혀서 빗속을 건너갔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다.
황성보다도 더 먼 땅인 아스트로사에서조차, 방금 전까지 여실했던 그런 허무를 느낀 적이 없는데.
“이 작은 머리로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시나.”
허무라.
‘이제 알겠어.’
내가 느낀 그 허무는 고독이었구나.
그래, 가끔 사무치게 고독했던 거구나.
“데이지 양.”
“……다른 생각 한 거 아니야. 루를 생각했다고. 방금 정말 왕자님 같았어.”
빛 속에서 나타났거든.
굉장히 낯부끄러운 표현인 걸 알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없었다.
루는 작게 어깨를 떨며 웃었다.
“왕자? 그쯤이야 대신 해 줄 수 있지만, 공주는 양보 못 한다네.”
“그런 건 줘도 안 가져.”
“그렇겠지. 내가 우리 데이지 양을 어떻게 모시고 있는데. 공주가 탐이 나면 감당 못 할 욕심쟁이이지 않겠나?”
나는 콧등을 찡긋한 채 얼굴을 들어 루를 쳐다봤다.
세레니예 백작의 모습을 한 루는 마치 이 황성의 일부 같았다. 아름답고, 고고하고, 기품 있고…… 본래 외형이 그렇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쪽은 샹들리에보다는 늪지대의 어둠이 어울리는 분위기니까.
“그런데 계속 그런 말투 쓸 거야?”
눈동자만 굴려 내 얼굴을 확인한 루가 자신의 뺨을 내 턱에 맞붙인 채 대답했다.
“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건 그렇고, 자네가 나를 많이 좋아하는 건 이해하네만 한 가문의 어엿한 수장이 된 이상 위신을 지켜야지. 예의 있게 행동하게나.”
말 까지 말고 높이라는 소리였다.
“위신을 지키려는데 백작님이 나를 안 내려놓잖아.”
“영광으로 여기게. 내가 이렇게 안고 다니는 생명체는 세상천지 자네밖에 없으니까.”
얇은 피부를 통해 전달되는 온기가 믿기지 않게 따뜻하다. 그의 체온이 그리고 목소리가 곁에 머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토록 마음이 안정된다.
루도 나로 인해 이런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다.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과 허무가 아닌 충족감을…….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가는 거야?”
“이 몸은 아스트로사 왕국과 펜 로타 제국의 수교를 알릴 귀중한 손님이시거든.”
“사냥 대회에도 참석하고?”
“그럴 예정이기는 한데. 나처럼 얼굴만 잘생기고 심신 연약한 미남이 과연 그럴싸한 사냥 성과를 낼지 의문이야.”
“어려울걸? 두 명이서 조를 이뤄야 하거든.”
“지금 데이지 양의 조가 4위인 게 조원 탓이라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건가?”
크흠흠.
“……곧 역전할 거야.”
“그런가? 응원하지. 점수뿐만 아니라 신문도 잘 봤으니 알아 두게.”
신문, 또 너야? 네 녀석의 그 가벼운 헤드라인이 황제를 뛰어넘고 루의 귀까지 들어가다니…….
루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무는 게 느껴진다. 분명 뭔가를 기다리는 얼굴이다.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인내심이 바닥난 루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없는 동안 많은 죄를 지었던데, 웨더우즈 자작.”
“나는…… 결백해. 손 한 번 안 잡았어.”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아스트로사 국왕 폐하 앞에서 결혼을 약조한 상대도 있지 않았었나? 왕을 능멸한 죄는 크다는 걸 잊어서는 안 돼.”
순간, 아스트로사에서 말똥 후작을 물 먹이기 위해 나눈 급조된 결혼 서약이 떠올랐다.
‘그건 그냥 연극이었잖아?’
설마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아니면 단순한 장난?
혼란에 빠진 나 자신이 인지되자 울컥 짜증이 솟았다.
‘맨날 가볍게 말해서 헷갈리네. 진심이 대체 뭐야?’
솔직히 결혼이나 프러포즈에 특별한 낭만이 있는 건 아니다.
시체가 산을 이루는 전쟁터에도 사랑을 꽃피우는 연인은 있었다. 그들의 가장 간절한 바람은 값비싼 결혼반지도, 화려한 결혼식도 아닌 서로의 안전이었다. 마귀에 의해 한쪽 팔이 잘려도 목숨만 온전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그 광경을 지겹도록 목도해서 그런 걸까?
나는 루가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따금 불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가 나를 특별하게 여기는 게 가끔은 의무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실제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을 의무감으로 치환해도 이상할 것 없던 터라 더욱 그랬다. 순간 욱한 나는 그의 귀에 대고 외쳤다.
“아내에 자식까지 있는 유부남 주제에…… 왕을 능멸한 죄를 운운하기는? 나처럼 어리고 예쁘고 능력 있는 여자를 곁에 두려면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돼!”
진심을 다해서 내뱉은 불만이었는데, 돌아온 반응은 억울하리만치 담백하다.
“아. 물론이지.”
루는 새삼스러운 소릴 다 한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자고로 공주가 왕자를 얻으려면 보검을 들고 적들을 베면서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하는 법. 이 세레니예 백작도 난관을 아주 좋아한다네. 이겨 낼 때마다 느끼는 고양감이 사람을 몹시 흥분케 하거든.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정이지.”
그가 나를 바닥에 내려다 놨다. 이다음은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었으므로, 우리는 이 자리에서 잠시간 갈라져야 했다.
나는 작금까지 뇌리를 지배했던 화가 무색하게 덜컥 불안해진 기분으로 루를 올려다봤다.
‘어떻게 헤쳐 나간다는 건데?’
그와 동시에 고작 며칠 전, 라파엘로를 죽여 주겠다 운운하던 목소리가 떠올렸다.
……애정의 근원이 의무감이어도 크게 상관없지 않을까?
“난관까지는 아니야, 루.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름대로 다 필요한 과정이라 내버려 두는…….”
“내 알 바인가? 그럼 다시 가 볼까, 하인? 황제가 목이 빠져라 이 몸을 기다리고 있겠어.”
훽, 등을 돌린 루는 인형처럼 불안정하게 삐걱이는 하인을 거느린 채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아차. 웨더우즈 자작.”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이 성, 아주 불쾌한 기운이 흐르고 있군.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부디 조심하게.”
평소의 그라면 하지 않을 조언이었고, 그래서 더 머릿속 깊이 틀어박혔다.
‘불쾌한 기운.’
무슨 의미일까.
나는 멀어지는 루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사냥 본부에 도착했을 때는, 솜사탕처럼 크게 부풀어 있던 흰 구름들이 저만치 밀려간 뒤였다.
곧이어 실력은 4등이지만 마음은 1등인 우리의 보좌, 리웨인이 다가왔다.
“웨더우즈 자작님.”
“좋은 아침이야, 리웨인 경.”
무뚝뚝한 얼굴로 선 리웨인은 어울리지 않게 한참 동안 우물쭈물했다.
내게 부탁할 거라도 있나? 반쯤 놀릴 기세로 먼저 운을 떼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는데, 아쉽게도 리웨인은 금방 용건을 꺼냈다.
“제 어머니가…… 오늘 자작님의 사냥을 우려하시며, 직접 자수 놓은 손수건을 보내왔습니다.”
뭐야, 손수건 선물하는 게 부끄러워서 그런 거였어?
“이런 귀한 선물을 주시다니. 감사하다고 전해 드려.”
“예.”
나는 리웨인이 보는 자리에서 손수건을 펼쳐 목을 닦았다.
언뜻 스쳐본 손수건에는 당연하게도, 안데르트의 필체가 적혀 있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주위를 항상 경계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