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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32화 (132/195)

132화

황제는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타운 하우스에서 만찬회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하녀장은, 그 원인을 먼 곳에서 찾지 않았다.

“군주의 건재함을 나타내는 건 국가의 결속력을 높이는 중요한 수단 중 하나예요. 사냥제에서 황제의 결석 사유를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은, 곧 그 사유가 긍정적인 내용이 아니라는 뜻일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크게 치명적인 이유도 아닐 거예요. 그랬다면 오히려 거짓말을 섞어서라도 더 확실하게 사유를 설명했겠죠.”

“그럼 역시 건강의 문제일까? 황제가 오랫동안 병을 앓아 왔다고 들어와서.”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아슈네이케 오라버니는 아주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하셨거든요.”

나는 텅 빈 황족의 식탁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황제 외 다른 자리도 전부 비워져 있던데.”

“황후 폐하께서는 오라버니의 황위 즉위식 전에 돌아가셨고, 황태자 전하께서는 연세가 워낙 어리셔서 신년회 같은 공식 석상에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선황은 열이 넘는 자식을 남겼다는데, 아슈네이케 황제는 그리하지 못했나 보다.

황성에서 초상화로 확인한 아슈네이케 황제는 수컷 공작새처럼 지나치게 화려한 인물이었다.

특히 인상 전체를 좌우할 만큼 날카롭고 또렷한 눈매는 나타샤를 떠올리게 해서, 한 번쯤 직접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지만요.”

혼잣말처럼 읊은 하녀장이 읽고 있던 신문을 조금 더 높게 들었다.

덕분에 일간 신문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내가 앉은 방향에 그대로 노출됐다.

『화제의 여인, 데이지 웨더우즈 자작이 선택한 남자는?』

그 아래 커다랗게 박힌 네 명의 얼굴은…… 굳이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조용히 펄럭이는 신문 너머로 얇게 뜬 눈초리가 나를 향했다.

“할 말 있으면 해.”

그렇게 야살스러운 눈으로 흘겨보지 말라고.

하녀장은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뗐다.

“펜 로타 사교계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주인님. 그해 가장 아름다운 꽃은 그해 가장 일찍 시든다.”

“미안한데 나는 꽃이 아니야. 오히려 제초제에 가깝달까.”

마귀들을 싹 도륙해 버렸으니까.

“사전적 의미의 꽃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독보적인 주목을 받는 여인일수록 추락하기 쉽다는 뜻이죠.”

“그건 또 무슨 저주야? 어제랑 말이 다르잖아. 주목이란 주목은 다 받아야 된다면서?”

“뭐든 적당히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이건…… 그 적당히의 범주를 벗어났네요.”

적당히의 범주를 벗어났다니.

‘까 보면 사실 그런 것도 아닌데.’

남자 셋에 여자 하나이긴 하나, 한쪽은 사제 관계, 한쪽은 전우, 한쪽은 그냥…… 남보다 조금 나은 관계다.

하지만 외부인들에게는 대단한 치정 문제처럼 비치나 보다.

‘기사도 꼭 저런 식으로 자극적이게 쓴다니까.’

하기야, 선동이라는 건 전시에도 끊이지 않았으니까. 당시에 비하면 이 정도는 귀여운 수준일 테다.

짧은 헛기침과 함께 신문을 접은 하녀장이 은근슬쩍 물었다.

“그래서 주인님은…… 역시 연하 쪽?”

그러겠냐?

나는 하녀장이 더 열렬히 헛소리하기 전에 침실을 나갔다. 그리고 어제 그러했듯, 집사 암살자와 산적 하녀(하인)의 시중을 받으며 황실로 향했다.

마차 안에는 하녀장이 미리 읽어 두라고 챙겨 놓은 또 다른 신문이 놓여 있었다.

그중 내 눈길을 끄는 기사가 하나 있었는데.

『……올해 사냥제는 이례적으로 북대륙연합교국 아스트로사 왕국이 초대 손님으로 참석한다. 북대륙연합교국의 외교 사절단이 방문하는 것은 마도 전쟁 종전 후 4년 만의 일로, 북대륙의 꽉 닫힌 외교 문을 다시 열 계기가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아무래도 둘째 날부터 사냥에 참여한다는 초대 손님 중에 루가 껴 있는 것 같았다.

모리안 세레니예의 신분을 버리고, 이번에는 알펜 세레니예의 신분으로 돌아오는 건가.

‘그래도 나 보라고 미리 정보를 뿌렸구나.’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지. 얄밉다고 해야 할지.

‘그래도 이왕 올 거 빨리 왔으면 좋겠네.’

계속 내 옆에 있을 거라 했으면서. 왜 비우는 날이 더 기냐, 이거야.

나는 세레니예 백작이자 북부 최고의 미남, 알펜 세레니예와의 우스웠던 첫 만남을 되새기며 의자 등에 편히 몸을 기댔다.

* * *

사냥 대회 첫날.

어젯밤 <영화로운 수확제의 만찬>에 참석했던 이들이 승마복 차림으로 다시 모였다.

때 빼고 광낸 훌륭한 혈통의 말들이 과시하듯 늘어서 주인의 재력을 뽐내는 주축이 된다.

그들 중 내 말은 아주 평범했다.

혈통이고 뭐고 건강하면 그것으로 족한, 평범한 말.

“웨더우즈 자작은 항상 흑마를 애용하는군.”

리웨인을 기다리던 차. 누군가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건넸다.

새것이라 조금은 불편한 가죽 장갑을 구겼다 펴며 고개를 돌렸다. 근사한 백마 위에 앉은 검성이 내 말의 자태를 구경하고 있었다.

“내 기억 속의 그대도 항상 흑마와 함께했던 것 같은데. 다른 말을 타는 건 상상이 잘되지 않을 정도야.”

……그랬나?

“딱히 흑마를 선호하는 건 아닙니다. 우연의 일치죠.”

“검은색 가죽 장갑만 사용하는 것도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요. 실용적이어서요. 피가 묻어도 티가 잘 안 나고.”

“여기서는 사람을 사냥해선 안 된다.”

“그런가요? 아쉽네요. 제 주특기인데.”

내가 그런 것도 모르겠냐고.

안장에 오르자 검성의 시선이 내 팔목 근처에 머물렀다. 황실이 지급한 백색 마도구 팔찌에.

“그 팔찌를 차고 내 뒤를 졸졸 쫓아오면 재밌었을 것을. 나야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라 쳐도, 라파엘로 경까지 내칠 줄은 몰랐다. 혹시 그대는 나이 차가 꽤 나는 연하 쪽이 좋은 건가?”

그놈의 연하 타령.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검성을 훑었다.

“그런 건 왜 물어보십니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게 아니었나 싶어서지.”

“굳이 답하자면 너무 어린 건 불편합니다.”

“하기야 청년 기사들이 그대를 많이 시기 질투하기는 했지. 성별이란 건 참 우스워. 그때의 그대나 지금의 그대나 나이대는 비슷한데도…… 이제는 여인이란 이유로 시기가 아닌 구애를 받는군.”

대답하지 않고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바라보기만 하자, 검성이 고개를 내저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보지는 마. 또 뭐가 불만인가?”

“공작님은 저를 너무 잘 아셔서 좀 불편합니다. 제아무리 스승님이나 다름없는 분이었다지만, 그간 공작님 앞에서 너무 실없이 떠들었다 싶네요.”

“흠.”

짧은 침묵 후, 작게 혀를 찬 검성이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너무 아는 척하는 것도 매력 없기는 하지. 내가 실수했군.”

그러고는 가던 길 그대로 나를 스쳐 지나갔다.

멀어지기 무섭게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그의 등을 응시하다가, 나는 오른쪽 팔목에 족쇄처럼 채워진 백색 팔찌를 내려다봤다.

사냥의 보좌.

그 오묘한 이름에서 유추 가능하듯, 역할 역시 참으로 오묘했다.

사냥꾼에게 물 주기, 사냥감 챙기기, 수건 챙겨서 닦아 주기, 기록하기, 칭찬하기, 화살 챙기기 등…….

‘한마디로 하인 노릇 하라 이거잖아.’

심지어 그 행동 하나하나가 마도구에 기록되어 자체적으로 점수가 측정된다.

어떤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되는지 아주 잘 알겠네. 마음에 안 드는 자식 공식적으로 물 먹이기에 딱이었다.

‘후배 녀석 물 떠 주기가 내 역할이라.’

편히 쉬고 좋구만.

“웨더우즈 자작님!”

멀지 않은 곳에서 내 이름이 불렸다.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챈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 말머리를 돌렸다.

“웍호드 자작 부인.”

“오늘 컨디션은 어떠신가요? 제 아들이 폐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자작님. 부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 걱정 마시지요. 리웨인 웍호드 경은 충분히 멋진 기사이니까요.”

귀부인들의 흥미 어린 시선이 힐끔힐끔 우리를 향했다.

짧은 담소를 나누며, 나와 나란히 말을 몰던 웍호드 자작 부인이 어느 순간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그래서 어젯밤 만찬에서의 일은 어떻게 된 건가요?”

“일?”

아, 파트너 지명 말인가.

그러고 보니 웍호드 자작 부인 입장에서는 조금 부담스럽게 느꼈을 수…….

“라파엘로 공작님이야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설마 지하르크 공작님까지 나서실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습니다. 아아, 그 두 분의 구애를 받은, 올해 사냥제 최고의 주인공이 우리 리웨인을 선택하다니요? 자작님이 제 아이를 호명하는 순간 라파엘로 공작님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셨나요? 못 보셨죠? 아주 살벌하게 굳으셨어요. 제가 다 죄책감을 느낄 정도였답니다.”

“…….”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죠. 그래서 자작님. 자작님의 선택은 어느 쪽인가요? 젊은 영웅? 아니면 황제의 검? 방금 지하르크 공작님과 대화하시던데, 설마 그분…….”

“우리 웍호드 자작 부인께서 사람들이 오해할 말씀을 하시네. 내가 선택한 건 리웨인 경이에요. 그러니까 리웨인 경이 내 옆에 있겠지.”

“어머.”

그러니까 제발 그딴 것 좀 묻지 마.

회피성 짙은 내 대답에, 웍호드 자작 부인은 아쉬워하면서도 은근히 만족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의 사랑스러운 사냥 대회 파트너가 옆자리에 섰다.

그것도 아주 세상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예상 외로 조용해, 리웨인 경. 자작 부인에게서 사정을 들었나 보지?”

잠시간 말이 없던 리웨인은 퍽 침착한 어투로 말했다.

“어머니의 무리한 요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 평생 내게 빚진 기분으로 살아가도록 해. 경이 결혼을 잘하면 내 덕이고, 결혼을 못 하면 경 탓이니 명심해 둬.”

“……예.”

딸랑.

사냥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럼 이제…… 개처럼 일하러 가자, 리웨인 경. 나는 경만의 보좌가 되고 싶으니, 가능한 빠른 속도로 점수를 올리는 게 좋겠어.”

“예.”

“명심해. 만약 우리 조가 올해 사냥제의 1등을 놓치면.”

“…….”

“모두가 보는 앞에서 경에게 청혼할 줄 알아.”

리웨인의 눈동자가 크게 동요했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힘겹게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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