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경위는 간단하다.
웍호드 자작 부인은 웍호드 가문의 빈약해진 재정 상태를 언급하며, 가문의 영광을 되돌려 줄 귀인을 찾는 중이었다.
다만 웍호드 가문에서 바라는 리웨인의 결혼 상대는 내가 아니었다.
“웨더우즈는…… 솔직한 심정을 밝히자면 사돈으로 묶이기엔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곳입니다. 제나일 공작의 눈치가 보이거든요.”
“리웨인 경이 제나일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인 것으로 아는데요. 눈치 보일 일이 있나요?”
“그 아이는 원래 버클리그레이튼 기사단 소속이었습니다. 말씀드리기 어려운 내부 사정으로 인해 반강제로 소속이 옮겨졌고, 결과적으로 어느 쪽으로도 완전히 녹아들지 못한 상태죠. 제나일 공작도 그 아이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아요. 종전 후 우리 가문은 붕 뜨게 되어서…… 본보기로 재산을 몰수당하고도 보호받기 힘든 처지가 됐죠.”
그런 사정이 있었다니.
웍호드 자작 부인의 씁쓸한 목소리를 뒤로하며, 나는 결사대의 구성원을 떠올렸다.
‘그 안에는 리웨인이 없었어.’
그러니 웍호드 자작 부인의 설명은 거짓이 아니었다.
‘내부 사정이란 건 대체 뭘까?’
그리하여, 웍호드 자작 부인이 제안한 첫 번째 전략이 바로 리웨인과 내가 같은 사냥 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나를 찾아오기 전까지 꽤 세세하게 계획해 둔 것 같은데.’
준비 자세.
합격.
“그렇다면 웍호드 가문에 화제성을 팔아서 이쪽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뭐죠?”
“제가 자작님께 드릴 수 있는 특별한 이득은…….”
두 눈을 차갑게 번뜩인 웍호드 자작 부인이 뒷말을 이었다.
“없습니다.”
당당함?
바로 합격.
“대신 ‘그분’을 통해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의 정보를 전달해 드릴 수는 있죠. 이건, 제가 ‘그분’을 통해 먼저 제안받은 사안이기도 합니다.”
그분이라.
의문을 품기 무섭게, 웍호드 자작 부인이 가방 깊숙한 곳에서 얇은 서신을 한 장을 꺼냈다.
나는 서신을 건네받자마자 봉투를 뜯고 내용을 확인했다.
『버클리그레이튼 가문 그리고 황실과 관련된 의심스러운 정황은 앞으로 이 경로를 통해 전달하겠음.
뇌라는 게 있다면 웍호드 자작 부인의 요구를 적당히 들어줘야 함.』
이런 싸가지 없는 말투와 싸가지 없는 필체의 주인은 한 명밖에 없다.
가로쉬.
‘의심스러운 정황이라.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에 머물면서 무언가 캐내기라도 할 생각인가?’
로궤에서 무사히 귀국한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상당히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였다.
가로쉬는 기억을 잃은 후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버클리그레이튼의 후계자로서 살아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내게 번거로운 덫을 놓을 성격도 아니지. 웍호드 자작 부인을 통해 전달하려는 걸 봐선 검성 몰래 비밀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게 뻔해.’
가로쉬는 자의식이 강하다.
아무래도, 칼레파에서 내가 모르는 일을 겪은 후 대단한 심경의 변화를 맞이한 듯싶었다. 결과적으로 나로선 거부할 이유가 없는 제의였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웍호드 자작 부인을 신뢰할 수 있느냐, 마느냐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뭐든지 물어보세요.”
“이 사람이 부인을 선택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웍호드 자작 부인은 말 한 번 더듬지 않고 능숙하게 대답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웍호드는 버클리그레이튼 공작가와 제나일 공작가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타기하는 상태입니다. 게다가 귀족회 소속도 아닌 탓에 지탱하는 뿌리가 그리 튼튼하다고 보기 어렵죠. 자작님은 제나일 가문과 연결되어 있고, ‘그분’은 버클리그레이튼 가문과 이어져 있으니까요. 웍호드만큼 제격인 연결 고리가 없을 거예요.”
“내게는 그다지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데요.”
잠시 고민하던 웍호드 자작 부인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아까 내부 사정이 있다고 말씀드렸었죠? 짧게 알려 드리자면,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에서 한때 생체 마법 시술을 주도한 적이 있습니다. 리웨인은 그 시술의 수혜를 받았던 아이이고 ‘그분’은…… 시술까지는 아니지만, 비슷한 기술을 통해 정신 치료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마도 전쟁 후유증 치료였지요. ‘그분’과의 인연은 거기서 생겼습니다.”
시술. 그리고 마도 전쟁 후유증의 치료.
반절은 이미 나도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러니 거짓이 아니었다.
‘가로쉬가 정신 치료를 받았다라. 뭔가…… 잡힐 듯 말 듯한데.’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걸까.
“자작님과 리웨인의 아주 짧은 염문설만으로도, 제가 자작님께 좀 더 적극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당위성이 생깁니다. 앞으로 움직임에도 용이할 겁니다. 게다가 리웨인의 가치도 오를 테니 서로 상부상조하는 결과를 가져올 거예요.”
고심은 길지 않았다.
나는 웍호드 자작 부인과 손을 잡았고 협력을 약속했다.
짧은 대화만으로 그녀가 얼마나 현명한 여자인지 알 수 있었으니, 가로쉬와의 연결 고리뿐만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도움 받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과정이 어찌 되었든 파트너 최우선 지명권은 내 손에 떨어졌고 리웨인은 거부하지 못한다.
라파엘로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기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애당초 그 또한 반강제로 날 옆에 붙인 거니까.
시종장은 내게 ‘어째서?’라고 묻고 싶은 눈이었으나, 차마 그리하지 못하고 지명을 종료했다.
“……첫 번째 조가 정해졌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라파엘로 제나일 공작. 어느 분과 조를 이루시겠습니까?”
라파엘로는 새로운 파트너를 지명하는 대신 나를 돌아봤다.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무슨 대화를 나눌까 호기심을 표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창처럼 내 얼굴에 박혔다.
다행히, 라파엘로의 목소리는 내게만 들릴 만큼 작았다.
“혹시 제가 역겹거나 싫으십니까?”
뭐?
얼마나 놀랐는지, 나는 재빨리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답했다.
“그건…… 상당히 당황스러운 자학인걸.”
“그렇지 않고서야 이 정도로 절 거부하실 수 없습니다.”
“내 남은 생을 걸고 맹세하는데, 내가 이 자리에서 가장 신뢰하는 사람은 바로 너야. 게다가 너는 안데르트의 가장 소중한 친구였잖아? 그런 널 내가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어?”
“…….”
“하지만 이건 조금 다른 문제지. 네가 내 입장이 되어 봐. 이런 부담스러운 상황은 전혀 달갑지 않아. 대회의 파트너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요소도 아니잖아.”
그런 것으로 묶이지 않아도, 우리는 결사대를 통해 긴밀하게 연결된 사이였다.
“게다가 어차피 내가 너에게 협력하는 이유는 따로 있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든 함께 움직일 필요는…….”
“꼭 이럴 때.”
붉은 눈동자가 사납게 날 내려다봤다.
“안데르트처럼 굴어야겠습니까?”
“……”
무슨 뜻일까.
그러나 내 반문보다, 라파엘로의 지명이 더 빨랐다.
“게른 로즈벨.”
……로즈벨?
‘로즈벨 가문의 일원인가?’
이후 라파엘로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덕분에 다짐했던 것보다 마음이 조금 더 불편해졌다.
“두 번째 조가 정해졌습니다. 다시 지하르크 버클리그레이튼 공작.”
저만치에서 느긋한 대답이 들려왔다.
“케이튼 에자넬.”
어디선가 기쁨에 찬 비명이 짧게 터졌다.
여인의 음성이었던 것으로 봐선, 검성이 지명한 케이튼 에자넬이라는 이름의 주인인 듯했다.
지명된 케이튼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호선을 그리는 눈매를 봐선 최소한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나머지 조도 차근차근 정해져 가던 어느 순간.
시가에 불을 붙인 로즈벨 백작이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운을 뗐다.
“아무래도 자작이 라파엘로 공작의 승부욕에 불을 붙인 것 같군. 내 조카는 개인 사정으로 작년 사냥 대회에 불참했는데, 여러모로 뛰어난 인재거든.”
아, 게른 로즈벨이 로즈벨 백작의 조카였나.
“죄송하게 됐어요.”
“죄송할 것까지야 있나.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이런 것도 나름 재밌어. 아, 그리고 대회가 끝나면 잠시 나를 보지. 웨더우즈 가문에 인도할 재산에 관해서 할 말이 있네.”
재산이라면…… 하녀장이 웨더우즈 가문의 정체를 밝히면서 비슷한 언급을 했던 것 같기는 하다.
“현 로즈벨 백작이 타계하면 로즈벨 가문의 작위와 재산은 모두 주인님의 소유가 될 거예요.”
그의 유일한 자식이 전전대 웨더우즈 안주인이었다고 했었다.
‘그래, 그런 문제도 있었지.’
생각해 보니 로즈벨 백작과도 퍽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내가 새로운 웨더우즈 자작이 된 만큼 확실히 매듭지어야 할 관계이기도 했다.
포도주를 삼키며 코끝을 찡긋한 로즈벨 백작은 힐긋, 라파엘로를 훔쳐보다가 한층 더 줄어든 음성으로 속삭였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경고해 두자면, 버클리그레이튼 공작을 조심하게나.”
“……결사대에 해를 끼칠 인물이기라도 한가요?”
“글쎄. 그 부분에 관해선 내가 해 줄 말은 없는 것 같고. 단순히 남자로서 조심하라는 말이었네. 그는 여자가 많거든. 아닌 것 같아도 딸을 가진 귀부인들에게 퍽 미움받는 편이야. 그만큼 아쉽게 여긴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뭐어어?
…….
‘에헤이. 과장이 심하네. 검성은 조금 여우 같을 뿐 한없이 진지한 남자야. 그 나이 먹고 카사노바 소리 들을 인물이 아니라고.’
조금 재수 없어도 내 1번 스승이나 다름없는 남자다.
그러니까 2번 스승은 1번 스승에 대한 모욕을 멈춰라!
“올해 사냥 대회 우승은 제 것이 될 텐데, 버클리그레이튼 공작님의 이성적 매력이 훅 꺼지지 않길 기도해야겠네요.”
하하. 로즈벨 백작이 작게 웃었다.
“자작은 동생과 참 비슷하군. 대범한 데다 말도 잘하고…… 재미있단 말이지.”
난 그다지 재밌지 않은데. 안데르트 따위와 비교당하다니? 물론 그 안데르트가 그 안데르트는 아니겠지만…….
“스스로를 지키고 싶다면 지금처럼 계속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겠네. 어느 쪽으로든.”
의미심장한 조언을 남긴 로즈벨 백작은 다시 포도주에 집중했다.
그렇게 한없이 지루한 2시간이 흐른 후.
<영화로운 수확의 만찬회>는 끝을 맞이했다.
황제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