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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30화 (130/195)

130화

분명 내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노장들의 눈초리는 한층 날카로워졌다. 전쟁 통에 이리저리 구르며 오감을 단련한 이들이니, 어렵지 않게 엿들었을 것이다.

나는 의식적으로 라파엘로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검성을 찾았다. 내게 시종을 보낸 행동이 무색하게도, 그는 이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있었다.

딸랑.

“10분이 끝났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답을 들려주기도 전에 시종이 저만치 물러섰다.

검성은 그제야 나를 바라봤다.

잠깐의 헤맴도 없이 단번에 눈을 마주친 그는 몹시 당당한 얼굴로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내가 거절할 경우의 수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듯이.

‘설마 나와 한 조가 되겠다고?’

조금도 달갑지 않은 의사…….

……인가?

‘아니, 그건 너무 편협한 판단일지도. 내게 디안 케트의 심장을 먹인 자는 검성일 확률이 높아. 게다가 황실과 나타샤는 물론 가로쉬와도 연결되어 있으니까…… 적당히 어울리는 게 나아.’

또한 확신컨대, 상대 역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검성이라면 확신하고도 남았다. 아쉬운 건 내 쪽일 거라고.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원하는 바가 생기는 순간, 관계의 균형은 무너지는 법.

검성은 그 이점을 뼈째로 구워 먹고도 남을 인간이다. 그러니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편이 좋을 듯했다.

마음을 결정한 나는 입술을 움직이는 대신 냅킨을 들어 회색 문양을 내보였다.

가볍게 눈짓한 검성이 다시 단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제멋대로네.

라파엘로가 내게 물었다.

“지하르크 공작님과 따로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있습니까?”

가능한 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안데르트의 스승 격이나 다름없는 분이라 들었는데. 내가 잘못 안 걸까?”

“아니요. 맞습니다. 하지만 지하르크 공작께서 누이의 문양에 흥미를 가질 거라 여기지는 못해서 말입니다.”

“내 사냥 실력이 궁금한가 보지. 아니면 나라는 사람 자체에 관심이 있는 걸 수도 있고.”

나는 라파엘로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너도 그렇잖아?”

“…….”

“안데르트의 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두가 나라는 인물에 관심을 표하지. 혹시나 싶어 말해 두자면 네 호의를 조롱하려는 게 아니야. 검성이 날 알은체하는 게 놀라운 일이 아닐 뿐.”

그러니까 대충 넘어가.

라파엘로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결사대에 몸과 마음을 투신할 생각이 없다.

그들에게 그들 나름의 목적이 있듯 나에게도 나 나름의 목적이 있다. 지금은 단지 그 과정에 있어 황실이라는 공통의 대상이 생겼을 뿐이지.

이제 우리는 한 팀이 아니다.

걷는 길이 다르니 모든 사정과 비밀을 공유할 필요도 없어졌다. 그게 조금은 외롭게 느껴질지라도, 자연스럽게 흘려보내야 하는 감정일 테다.

라파엘로의 홍옥처럼 붉은 눈동자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는 속내를 읽기 힘든 시선으로 느지막이 입술을 뗐다.

“당신이 안데르트의 누이라서 이런 태도를 고수하는 건 아닙니다.”

“……그럼?”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라파엘로는 대답 없이 얼굴을 돌렸다.

그런 그를 불편한 기분으로 살필 동안, 첫 번째 음식이 차려졌다.

‘로메인 샐러드랑 당근…… 같은 게 올라간 괴상한 생선 요리.’

시종이 무어라 설명해 줬지만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양이 적어도 너무 적잖아?

‘난 일반 성인 남성의 두 배는 먹는 몸인데.’

앞으로 나올 음식이 몇 차례 더 있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몸에 힘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이게 다 하녀장 때문이다. 옷의 태니 뭐니 하면서 점심 식사도 거른 채 왔으니까.

샐러드를 입 안으로 욱여넣기 무섭게 시종장이 재등장했다.

“조 선정을 시작하겠습니다.”

뭐야, 이거 먹으면서 진행되는 거였어? 잘못하다 체하는 사람도 있겠는데?

“조 선정은 지명식이며, 작년 사냥 대회 성적순으로 지명 권한을 갖습니다. 만찬회에서 정해질 44개의 조와 국외 초대 손님으로 이루어질 6개의 조를 합쳐 도합 50개의 조가 사냥 대회를 치릅니다.”

샹들리에의 불이 완전히 꺼진 후, 식탁 위 촛대에 불이 붙었다.

그러나 모든 불이 켜진 건 아니다. 라파엘로와 로즈벨 백작을 포함한 일부 참석자 앞에 놓인 촛대에만 불이 붙었기 때문이다.

이쪽 식탁의 촛대가 22개, 건너편 식탁의 촛대가 22개 켜진 것을 봐선 ‘파트너 지명권’을 지닌 42명의 불만 켜진 듯했다.

“공교롭게도 작년 사냥 대회는 공동 우승이로군요. 지하르크 버클리그레이튼 공작과 라파엘로 제나일 공작. 어느 분이 순서를 양보하시겠습니까?”

그 둘이 작년 사냥 대회에서 공동 우승했다니. 꽤 놀라운 정보였다.

‘생각보다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가 본데.’

하기야, 이런 대회일수록 실세들이 어떤 자세로 임하는가가 중요하니까.

게다가 황제의 검인 검성과 농땡이 피우는 일에 치를 떠는 라파엘로가 설렁설렁 참여할 리 없었다.

때문에 나는 검성이 아닌 라파엘로를 바라봤다.

왜냐고? 당연히 순서를 양보할 줄 알았거든.

그러나 예상과 달리 라파엘로는 조용했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드문드문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로즈벨 백작이 드물게 당황한 눈으로 라파엘로를 불렀다.

“각하.”

그러나 라파엘로는 말없이 포도주 잔만 천천히 흔들었고, 대답은 이쪽 각하가 아닌 저쪽 각하에게서 들려왔다.

“내가 양보하지.”

유유자적한 태도였다.

시종장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어둠 속에 환히 밝혀진 라파엘로의 촛대를 응시했다.

“지하르크 버클리그레이튼 공작께서 순서를 양보하셨습니다. 라파엘로 제나일 공작. 어느 분과 조를 이루시겠습니까?”

대답은 거침없었다.

“데이지 웨더우즈.”

모두가 예상한 이름이었고, 그래서 파문도 적었다. 내 얼굴을 훔쳐보는 눈들이 조금 더 늘어났을 뿐.

문제가 있다면 이다음이라고 해야겠지.

“첫 번째 조가 정해졌습니다. 두 번째 조, 지하르크 버클리그레이튼 공작. 어느 분과 조를 이루시겠습니까?”

“데이지 웨더우즈.”

그러니까, 검성이 아주 당당하게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는 것 말이다.

“…….”

시종일관 무뚝뚝하던 시종장의 얼굴에 처음으로 황당한 감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시종장이 제아무리 황당히 여긴다 하더라도 나만큼 황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황당해 봤자 나만 하겠어?

그러겠냐고?

나는 어둠 너머, 촛불에 반사되어 달처럼 환히 빛나고 있는 검성의 얼굴을 노려봤다.

‘또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지.’

오롯이 시종장에게만 고정된 낯짝이 그렇게 재수 없을 수가 없다. 내 이름을 부르면서, 왜 나를 안 보는 건데?

‘하. 감히 검술 스승에게 재수 없다는 감상을 품게 되다니.’

이 불충한 제자, 그냥 계속 불충하게 살겠습니다.

재빨리 이성을 되찾은 시종장이 검성에게 주의를 줬다.

“순서를 양보하셨으니 다른 파트너를 고르셔야 합니다.”

그러나 검성의 대응은 호기롭기 그지없었다.

“순서를 양보한다고 했지, 파트너를 양보한다고 한 적은 없는데.”

덕분에 만찬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요란해졌다.

맞은편에 앉은 칼펜위버 후작의 흥분이 여기까지 전달됐다. 재밌어서 죽을 것만 같다는 저 얼굴이, 나는 언짢아서 죽을 것만 같았다.

‘잘못하다 체하는 사람도 있겠다 싶었는데. 그게 바로 내가 될 줄이야.’

체하지 않기 위해, 포크로 찍어 둔 당근을 접시 위로 고이 되돌려 놓았다.

이거 조금 불편해졌는걸.

한동안 검성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던 라파엘로가 시종장에게 제안했다.

“깊게 고민할 사안은 아닐 텐데요. 당사자에게 파트너를 고르게 하면 될 일입니다.”

시종장은 반쯤 포기한 얼굴로 검성을 돌아봤고.

“동의하네.”

검성은 주저 없이 라파엘로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에, 시종장의 눈이 이번에는 나에게로 닿았다.

“그게 가장 현명한 방안인 듯하군요. 데이지 웨더우즈 자작, 어느 분과 조를 이루시겠습니까?”

그런가.

결국 내게로 순서가 온 건가.

‘……이 정도면 운명이라 할 수 있겠는걸.’

내 파트너와 내가 한 조를 이룰 운명.

추측건대 나를 지명한 두 명의 공작님은 내가 자신을 고를 거라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양측 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라파엘로와 검성, 둘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나만의 길을 간다.

“리웨인 웍호드.”

“…….”

“…….”

“……예?”

나는 세상의 경악을 각오하고, 내 파트너의 이름을 당당히 외쳤다.

“잘못 들은 게 아니란 걸 알려 주기 위해 다시 말하자면. 리웨인 웍호드.”

그리고 며칠 전, 웨더우즈 저택을 찾아왔던 웍호드 자작 부인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부인께서 원하시는 건 리웨인 경과 저의 결혼이 아니라…….”

“예, 웨더우즈 자작님이 지니신 화제성입니다.”

“화제성이라면?”

“웨더우즈 자작님을 통해 리웨인의 몸값을 올리고 싶습니다.”

화제성.

웍호드 자작 부인이 나를 이용하고 싶어 했던 이유.

“저에게 간단한 신호만 주시면 됩니다. 첫 번째 사냥의 사냥꾼으로 지정된 경우, 포도주를 다 마신 후 잔을 비워 주세요. 반대로 두 번째 사냥의 사냥꾼으로 지정된다면 포도주를 그대로 채워 두세요. 이 신호만 지켜 주신다면 리웨인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만약 같은 조가 되지 못한다면?”

“그런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작님. 차선책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회색 문양을 소유할 시 보내야 할 신호는 바로, 포도주가 그대로 채워진 잔.

이것으로 웍호드 자작 부인과 나 사이의 거래는 이루어졌다.

나는 라파엘로와 검성이 그러하듯, 환하게 밝혀진 승자의 촛불 너머로 창백하게 굳어 있는 리웨인을 응시했다.

그만 당황하고 곱게 받아들여, 리웨인.

“흠. 그렇다면 그쪽에 화제성을 팔아서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뭐죠?”

사냥 대회의 우승자는 이 데이지 웨더우즈 자작님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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