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드셰로를 상대로 ‘억지 부리지 말라’ 잡아뗐던 것과 달리, 검성 앞에서는 쉬이 부정의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아무런 증거 없이 확언할 사람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정진했군.”
작게 읊으며 내 기운을 살피는 검성의 모습은 루만큼이나 초연해 보였다.
“더는 그 고약한 공명이 들려오지 않아. 내버리지도 않고, 지배하려 들지도 않는다는 건 본인의 경험담인가? 검귀로서 두 개의 벽을 넘은 건 그대가 처음일 거다, 안데르트 경.”
“……저는 안데르트가 아닌 안데르트의 누이입니다.”
“그렇게 성의 없는 변명을 할 때마다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다는 건 아는지 모르겠군.”
일단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대충 변명해 본 건데. 아무래도 티가 좀 났나 보다.
“내게 안데르트냐고 묻기 위해서 진과 그런 맹세를 한 겁니까?”
“맞다.”
그 긍정은 내가 진의 뒤를 밟을 거라 확신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아.’
원래 남자가 여자로 변하면 못 알아봐야 하는 게 정상 아니야?
어째서 다들 내 정체를 쉽게 알아채는 거냐고. 그것도 하필 지하르크 버클리그레이튼이란 남자까지.
검성은 내 오랜 스승이다.
그가 지난 수년간 웨더우즈 가문을 주시하고, 암살자를 보내온 일과 별개로 나는 그에게 진 빚이 있었다.
검성과 나는 사제 관계를 맺지 않았으나, 그에게서 얻은 배움은 내가 마도 전쟁이라는 지옥을 걷는 데 큰 길잡이가 되었다. 그런 인물을 상대로 끝까지 모르는 척하는 것은 예의가 아닐 테다.
나는 몸가짐을 바로 한 채, 검성을 향해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슬쩍 고개를 들자, 희미한 미소를 띤 검성의 얼굴이 보였다.
“이제 더는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건가?”
“예? 장난치지 마시죠. 제가 언제 공작님을 그런 파렴치한 호칭으로 불렀다는 말입니까?”
“술이 들어가면 종종 그랬지.”
덕분에 부끄러운 과거가 떠올랐다.
“전 기억 안 나니 공작님도 잊으십시오.”
“잊으라? 확실히 그런 모습으로는 형님보다 오라버니가 어울리겠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그런 농담을! ……하기에는 상대가 적절치 않다.
검성은 중년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도, 시간을 거스른 스물 후반의 나이대로 보이는 데다 엄연한 미혼이었다.
그리고 나이가 많아 봤자 얼마나 많겠는가? 루의 반타작도 안 되겠지.
“블라디에프 백작이 웨더우즈 자작이란 이름으로 다시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그다지 제 것 같다고 느껴지지도 않는 작위입니다. 블라디에프라니, 이름도 어색하고요.”
“하기야 그대는 부와 권력에 미련이 없던 사람이니까. 그래서 더 내 후계로 탐냈던 것인데. 이렇게 아쉽게 놓쳐 버리는군.”
후계.
“전쟁이 끝나면 정식으로 내 제자가 될 생각은 없나? 그대라면 라파엘로 제나일을 뛰어넘을 수 있을 거다.”
뭐, 검성이 가끔 그런 말을 하기는 했지.
하지만 버클리그레이튼의 후계라고 하면 내게는 조금 다른 얼굴이 떠오른다.
‘안데르트…….’
검성의 얼굴을 마주하고서 차마 갖지 않을 수가 없는 의문.
안데르트가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의 후계가 된 건 순전히 우연에 불과했을까?
낮게 웃은 검성은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가로쉬에 대해 묻고 싶은 건가?”
“……가로쉬가 제 동생이란 걸 알고 계셨던 겁니까?”
“글쎄.”
검성은 대뜸 주머니에서 낡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각을 확인했다.
“앞으로 5분의 여유가 있는데. 딱 세 개의 질문씩 주고받도록 하지. 어떤가?”
5분? 그 정도로 바쁜 시기에 굳이 이렇게 평화원까지 나와 내 정체를 확인했다고? 참 그다운 행동이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방금 질문을 첫 번째 질문으로 하지요.”
“처음에는 몰랐으나 의아하게 여겨서 제자로 들인 건 맞다. 검을 사용하는 세세한 습관들이 똑같더군. 만약 혈연이 맞는다면, 그대가 자연스레 가로쉬에게 이끌려 내게 올 것이라 여겼지.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되었어.”
“……그 말은, 내가 살아 있다고 확신했다는 뜻입니까?”
“그래.”
확신하고 있었다고?
‘어떻게?’
단순히 나라는 존재에 대한 믿음 때문인가?
내 머릿속이 혼란으로 물드는 동안, 팔짱을 낀 검성이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로써 두 개의 질문이 끝났군.”
……잠깐만, 두 개의 질문?
“방금 그게 어떻게 둘입니까? 기껏해야 부차적인 물음이었을 뿐인데!”
“부차적이든 아니든 질문은 질문이지. 기회는 딱 한 번 남았으니 잘 생각해서 활용하도록.”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약아진다는데, 딱 검성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예전에 비해 살짝 부드러워진 건 좋다 쳐. 한데 그의 배로 여우 같아지면 무슨 소용이야?
젠장.
‘마지막 질문이라.’
어떠한 근거로 내가 살아 있다 확신했는지 물어야 하나?
‘꼭 알아야 하는 부분이기는 해. 하지만…….’
디안 케트의 마지막 유산에 대해서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그가 오랫동안 유산을 찾아왔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니까.
‘확실히 이쪽이 더 중요하기는 해. 내 생명과 직결된 문제니까. 하지만 디안 케트의 마지막 유산은 라파엘로에게서 도움 받기로 약속했어.’
……기실 그 두 가지 문제가 어떻든,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이름만이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나타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베리드 렛>을 아는 모양이군. 그래, 안다.”
역시 그런가. 가볍게 수긍한 검성이 뒷말을 이었다.
“그녀를 만나고 싶겠지. 하지만 나타샤 황녀의 얼굴은 나 역시 보기 쉽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일생일대 목적에 푹 빠져 있고, 남은 생을 바치다 못해 휘둘리는 중이지. 우연히 마주친다 해도 기억하던 황녀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을 거다. ……그대는 나타샤 황녀를 믿는가?”
“네.”
검성은 주저 없이 답한 내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 긍정에 대단한 의미는 없었다.
나는 아직 나타샤와 재회하지 않았다. 내게 있어 나타샤는 4년 전의 나타샤이며, 나는 그 시기의 나타샤를 믿는다.
고심하듯 깊게 눈을 감았다 뜬 검성이 느리게 입술을 뗐다.
“솔직히 말하지. 나는 그대와 나타샤 황녀를 만나게 하는 것이 득일지 실일지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런 식으로 은근슬쩍 물어 봤자 떨어지는 건 없어.”
“그렇습니까? 공작님도 제게 ‘나타샤를 믿느냐’는 첫 번째 질문을 던지셨단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런…… 못된 것만 배워서는.”
이제 검성이 질문할 차례였다. 그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두 번째 질문을 건넸다.
“내가 지금 약간 헷갈려서 그러는데. 그대는 원래 여인이었던 건가?”
조금 특이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드셰로가 그러했듯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여자’의 육체가 가짜라고 여겼을 텐데.
‘이 남자는 내가 살아 있을 거라 확신했댔지.’
그래서 이쪽 몸이 진짜라 여긴 건가? 아직 헷갈리는 구석이 많다.
“네.”
“그래…… 그럼 ‘안데르트’라는 존재는 가로쉬를 토대로 만들어진 인물이겠군.”
“용케 아셨네요. 그다지 비슷한 얼굴도 아닌데.”
“검을 활용하는 잡다한 버릇은 물론, 알레르기 따위의 식습관까지 그대로인데 비슷하지 않다고? 바보 같은 소리 말게.”
바보 같은 소리라니. 가로쉬의 그런 특징과 나를 연결 지은 자는 오직 검성뿐인 것을.
“그대의 본명은?”
“방금 그걸 마지막 질문으로 쳐 드릴까요?”
“아니, 됐다. 딱히 성과를 얻은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마지막 질문이군.”
“그러게 좀 더 널널하게 구시지 그러셨습니까.”
내가 그러했듯, 검성 역시 마지막 질문에는 조금 신중할 거라 여겼다. 과정이 어찌 되었든 지금의 그는 내게 궁금한 점이 많아 보였으니까.
하지만 검성은 두 번째 질문에서 그러했듯 망설이지 않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대의 생명이나 수명에 큰 문제가 생겼나?”
한데 설마 그런 노골적인 질문을 건넬 줄이야.
‘그도 내가 디안 케트의 유산을 찾는다는 걸 아는 건가.’
나는 곧장 긍정하지 못하고 잠시간 망설였다.
상대는 검성이다.
디안 케트의 유산을 모으고, 소생 실험과 연관되어 있으며, 높은 확률로 라파엘로와 대척점에 서 있을 확률이 높은 자.
그런 그에게 과연 내 상태를 알려도 되는 것일까?
“답은 이미 알고 있다. 한데 왜 내 앞에서 망설이는 거지?”
아, 알고 있구나.
“그냥 잠깐 고민을 좀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는 거지?
검성이 차게 식은 얼굴로 내 눈을 들여다봤다.
“나를 적으로 여기나?”
“…….”
“이상하군. 마귀도 아닌 그대가 어찌 내 적이 되지? 아, 방금은 질문이 아니라 혼잣말이었으니 답하지 말게. 이유가 어찌 되었든, 내 앞에서 조심하고 싶다면 몸가짐을 바로 하는 게 좋을 거다.”
그가 언급한 몸가짐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지 되짚으려던 때였다.
문득, 두꺼운 가을용 재킷이 내게 내밀어졌다. 검성이 걸치고 있던 의복이었다.
곧장 받아 들지 않고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의 차가운 눈이 내 한쪽 어깨에 짧게 머물렀다.
‘아.’
카디건이 없어 훤히 드러난 어깨에 흉측한 상흔이 박혀 있었다.
어깨 위에서 겨드랑이 안쪽으로 길게 이어진 흔적. 열 바늘 이상 꿰맨 자국이라 유독 더 울퉁불퉁하고 거칠어 보이는 자국이었다.
이 재킷은 상처를 가리라는 의미일까, 여인의 어깨를 가리라는 의미일까.
가벼운 의문은 금방 해결됐다. 검성의 재킷을 어깨에 걸친 후에도, 무겁게 가라앉은 시선이 내 어깨 부근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뱉었다.
“잊을 수가 있을까? 너덜거리는 팔로 마귀를 베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해. 벌써 10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
“그대가 살아 있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설마 이런 꼴로 고생하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 탓이야. 미안하다는 사죄밖에 할 말이 없어.”
“이해되지 않는군요. 그게 왜 공작님의 탓입니까?”
검성이 뱉는 말은 중요한 조각이 소실된 미완성 퍼즐처럼 들렸다. 내 생사를 확신하다 못해,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라…….
설마.
“공작님. 혹시 내게 심장 결정석을 먹인 사람이 당신…….”
“내가 책임을 지겠다.”
“인 겁니, ……예?”
책임져? 뭘 책임져?
“요즘 귀족들 사이에 그대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던데. 잘됐어. 나를 선택하면 크게 번거로운 일도 없을 거다.”
그러니까 뭘요? 스승을? 지금 스승으로 선택하라는 뜻인가?
검성은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이 됐군. 자세한 건 사냥제에서 따로 이야기하지. 진을 잘 부탁하네.”
회중시계를 한 번 더 확인한 후, 허리를 살짝 숙여 재킷으로 내 어깨를 더 꼼꼼히 덮은 그가 미련 없이 국립 평화원을 떠났다.
어느새 깊은 잠에 빠진 진과 나를 덩그러니 둔 채로.
……그래서 뭘 선택하라는 건데?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