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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26화 (126/195)

126화

“하지만 그건 자작님과 상관없는…….”

“정말 상관없다고 생각하나?”

“…….”

“물론 ‘완전한 정착지를 찾았을 때, 내게 보고할 것’ 정도를 대단한 맹세로 볼 수는 없지.”

그게 둘 사이의 맹세였다니. 검성의 말대로 대단할 것 없는 맹세였…….

“잘했다, 진. 너의 그 순수함이 웨더우즈 자작을 내 앞으로 이끌었구나.”

웨더우즈 자작이라고?

‘나를 불러내는 게 목표였던 건가?’

서늘한 비웃음이 검성의 입가에 걸렸다.

“그레이 웨더우즈인지, 하녀인지, 안데르트 파거의 누이인지 모를 여인을 말이지.”

진이 마른침을 삼키며 검성을 노려봤다.

“……자작님을 어떻게 하실 심산이십니까?”

“네가 알 것 없다. 맹세는 실현됐고, 네 쓸모는 여기서 끝이다. 대화는 나와 자작이 나눌 테니 돌아가도록.”

“그럴 수는 없습니다.”

“진.”

나직한 음성이 진에게 경고했다.

“내 손으로 옛 제자의 목숨을 거두게 하지 말렴.”

진이 자신의 검을 꽈악 움켜쥐었다.

입술에 피가 나도록 깨문 진은 내 앞을 더 단호하게 막아선 채 속삭였다.

“……자작님, 도망치십시오.”

-와라! 오면 끝낸다. 나는 지지 않아!

이어서 진의 검이 외치는 선명한 공명이 귓가를 울렸다.

“아무래도 자작님을 노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하르크 공작은 한번 처치하기로 마음먹은 상대를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그건 내가 더 잘 안다.

검성은 나를 죽이려 한다. 지금 그가 내게 보이는 살의가 그 증거였다.

‘어째서……라는 의문을 갖기에는 생각보다 꽤 오래 얽힌 관계였지.’

그는 디안 케트의 유산을 찾고 있다.

웨더우즈 가문에 지속적으로 암살자를 보내고, 황실 보고로 직접 숨어들어 가 훔쳐 낼 만큼 몹시 적극적으로

게다가.

‘버클리그레이튼은 황제의 검이라 불리는 가문. 황실이 주도하는 소생 실험과 <베리드 렛>의 근원을 검성이 과연 몰랐을까?’

외려 그의 행보는 황실과 연관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나타샤와 이어져 있을 거야.’

검성은 어떤 면에서, 아니, 거의 모든 면에서 라파엘로보다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러나 나도 더는 물러서기만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부딪힌다.

“진. 오늘 일은 나중에 물을 테니 내 뒤로…….”

하지만 내가 진을 뒤로 물리는 것보다, 급발진한 진의 신체가 정면으로 날아가는 쪽이 훨씬 빨랐다.

“잠깐, 진!”

저 호전적인 검사 같으니라고!

날카로운 검기가 진의 흰 검날을 감싸 안았다. 검성은 그런 그녀의 호방한 도전을 피하지 않았다. 능숙하게 맞받아치며 한 번씩 빈틈을 건드리는 모습이 마치 대련하는 모습 같기도 했다.

“어리석구나, 진. 나는 너의 스승이자 은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은 거냐?”

여유로운 움직임으로 느리지만 확실하게 몰아치는 검성과 달리, 진은 유독 더 허둥거리는 느낌이었다.

바보 같은 녀석. 검 휘두르는 법만 주야장천 배우면 뭘 해? 마음이 급해서 그간 가다듬은 검술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데.

“그런 저를 이용해 무고한 이를 해치려 한 건 당신입니다!”

“우습군. 그런 책임 전가라니. 맹세의 흔적을 남기면서까지 웨더우즈 가문으로 떠난 건 내가 아닌 너라는 것을 잊지 마라.”

“당신은……!”

“내가 너를 과대평가했다. 버클리그레이튼에서 내보내면 안 됐어. 자신만만했던 것과 달리 아주 형편없게 변했구나.”

진의 평정심이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다.

-간다! 내가 가서 끝낸다. 너를 쓰러뜨리겠어…….

더욱 소란스러워지는 공명이 그 사실을 방증했다.

‘육체의 급소뿐만이 아니라 심리적 급소까지 완벽하게 파악당했어.’

하지만 검성의 화법은 수단에 불과하다. 나는 검성의 목표에 주목했다.

그가 어떠한 연유로 나를 끌어내려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유는 차치하고, 지극히 검성다운 계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검성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이든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모든 일면이 검성다운 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 모습은 그래.’

그는 필요 이상으로 진을 도발하고 있었다.

검성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적을 존중한다. 이런 식의 소비적이기만 한 자극은…….

“똑바로 봐라, 진.”

그때, 쉼 없이 진을 압박해 가던 검성의 움직임이 아스라이 흐려졌다.

“강함을 좇는 너의 헛된 욕망이 네가 지키려는 자를 죽음으로 몰아갈 테니.”

우아한 일격.

비스듬하게 떨어지는 검성의 검을 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내가 아는 검사 중 그만큼 정갈하고 그림 같은 검술을 구사하는 검사가 없다. 그러니 나를 노리는 검 역시 감탄을 자아낼 만큼 깔끔한 것이겠지.

“안 돼! 데이지 님, 피하십시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있다.

검성의 검은 내 명치에서 아주 근소하게 비껴간 방향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실수일까?

‘그럴 리가.’

이건 검성이 의도한 바이다.

덕분에, 커진 의문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검성은 왜 계속 진을 도발했을까? 검성은 왜 내게 한 끗이 부족한 일격을 날리는가?

‘……그가 바라는 게, 설마?’

문득 떠오른 한 가지 가설이,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 예측이 맞을까? 도박에 가까웠으나 결국 나는 검을 피하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단두대처럼 떨어진 검은 그대로 오른쪽 어깨에 쑤셔 박혔다.

“큭.”

내가 아닌 진의 어깨에.

두어 걸음 뒷걸음질 친 진이 상처 입은 어깨를 부여잡았다.

“……검성.”

거친 음성에서 실망과 회한이 묻어 나왔다.

“그래도 당신은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다분히 감정적인 외침이었지만, 어쩐지 뼛속까지 서늘하게 하는 섬찟함이 느껴졌다.

신경을 자극하는 이 기운.

나는 황급히 진의 얼굴을 확인했다. 초점이 흐릿해진 눈동자에서 뜨거운 살의가 쏟아지고 있었다.

검귀의 완전 동화였다.

‘경험이 적어서 그런 건가? 동화가 너무 빨라!’

동요하지 않고 진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정신 차려, 진!”

바닥에 쓰러진 몸에 그대로 올라타, 발버둥 치는 오른쪽 다리에 검상을 만들었다.

“헉!”

“진정해. 호흡을 가다듬고 이 통증에 집중해. 오른쪽 허벅지의 상처가 느껴져?”

검의 공명이 들리지 않는다.

당연했다. 공명은 이미 진과 하나가 되어, 이성을 잃은 검귀의 형태로 발현하고 있었으니까.

“큭, 아으윽…….”

“검을 놓으라는 게 아니야. 그냥 받아들여, 진. 내버릴 필요도, 지배하려 들 필요도 없어.”

“…….”

“너는 검귀야. 그 사실을 잊지 마. 내가 뒤를 지켜 줄 테니, 너는 네 스스로에게만 집중해.”

통제라는 건 결국 개인 자제력의 문제다.

내 힘으로 진을 찍어 눌러 꼼짝 못 하게 만든다 한들, 진 본인이 검과의 동화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대로 쉬지 않고 발버둥만 치다가 굶어 죽어 버릴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그때였다.

“……진?”

진의 움직임이 실 끊긴 인형처럼 뚝 끊겼다. 죽은 듯 쓰러진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었다.

황급히 코 아래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다행히 호흡은 이어지고 있었다.

“내버려 둬.”

검성의 목소리였다.

“진이 벽을 넘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온전히 그 아이 본인에게 달린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육체의 평온을 지켜 주는 것뿐이지. 무아(無我)의 상태에서 공격받으면 뇌사 상태에 빠질 수 있으니까.”

무아(無我)의 상태.

다른 말로는 벽을 넘는 과정. 그랬다, 검성의 말에 따르면 지금 진은 첫 번째 벽을 넘고 있었다.

‘……역시.’

검성은 진을 일부러 몰아세웠던 거였어.

극한의 상황에서 첫 번째 벽을 마주할 수 있도록.

‘이게 본래 목적이었던 건가?’

그리 받아들이기에는 찝찝한 구석이 있다. 무엇이 찝찝하냐면, 그냥 검성이라는 존재 자체가 찝찝했다.

“처음 겪는 일도 아닐 텐데 어리숙하게 구는군.”

검성의 질책은 틀리지 않았다.

무아에 빠진 검사를 마주하는 건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다. 과거에 나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전시 중, 검성이 세 번째 벽을 넘었던 날에.

‘마치 내 정체를 아는 듯한 화법이야.’

불편하다. 상대가 검성이어서 더 그러했다.

구멍 난 카디건을 찢어, 진의 어깨를 지혈하며 대답했다.

“당신이 눈앞에 있는데 별수 있겠습니까?”

“내가 진을 해할 거라 생각한 건가? 그대답지 않게 따분한 판단이다.”

내 목숨을 노렸던 주제에, 검성은 아주 자연스럽게 진 건너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래도 눈치 빠르게 내 의도를 파악한 것은 칭찬할 만해. 그대 같은 검사는 드무니까.”

그대 같은 검사.

또 그런 표현이다. 그레이 웨더우즈가 아닌 데이지 웨더우즈는 아직 검성 앞에서 검을 든 적도 없는데.

“목적이 뭡니까?”

그 질문에, 검성의 시선이 오랜 과거를 더듬듯 흐릿해졌다.

“목적이라…… 그런 건 늘 많지. 사람은 일평생 한 가지 목적만 가지고 살 수는 없으니 말일세. 그중 한 가지를 묻는 거라면.”

하지만 그런 흐릿함은 이내 사라지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날카로운 녹안이 내 눈을 꿰뚫듯 직시했다.

“그대와 재회하는 것이 나의 첫 번째 목적이었다, 안데르트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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