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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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 생활에서 때 빼고 광내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드물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한 가문의 수장이자 여인이기도 한 내가 어느 장소에서든 품격 있는 자태를 유지하는 건 의무나 마찬가지였다.
화장, 헤어, 의복, 액세서리, 구두, 가방, 모자, 장갑 등 ‘웨더우즈 자작’에 걸맞은 수준을 유지해야 얕잡혀 보이지 않는다. 품위는 하녀장이 말하는 귀족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자존심은, 하녀장이 수년간 뿌리처럼 박혀 있던 웨더우즈 저택을 벗어나게 한 원동력으로도 작용했다.
“그렇게 불안하면 다시 미드윈트리로 돌아가지 그래? 내 몸을 맡길 하녀는 라갈에서도 적당히 구할 수 있을 거야. 큰 도시일수록 인력은 넘쳐 나니까.”
그 말에, 벽에 바짝 붙은 채로 모자의 주름을 펴던 하녀장이 고개를 돌렸다.
나를 응시하는 시선은 전에 본 적 없는 전투욕으로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솜씨가 없다 못해 촌스러우면, 그건 하녀를 안 들인 것만 못하다구요! 이제는 주인님의 존재가 저의 자존심이나 다름없습니다. 다른 곳도 아닌 라갈에서 주인님이 추한 몰골로 돌아다니는 꼴은 죽어도 못 봐요.”
그리 단언하면서도 하녀장은 여전히 벽 근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녀장이 그늘만 맴도는 이유는 간단하다.
창문 근처가 무서워서.
“그냥 커튼을 치자. 그러면 창문 바깥으로 얼굴이 노출되지도 않을 거 아니야?”
“절대 안 돼요. 이 타운 하우스는 앞으로 주인님을 찾아올 수많은 방문자의 요람이 될 공간입니다. 항상 열려 있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은밀하거나 어두워 보이면 안 돼요. 사냥제는 주인님의 사교계 데뷔나 마찬가지이고 첫인상이 가장 중요한 법이니까요.”
하녀장의 고집이 저리도 확고하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다.
“하녀장이 외부에 얼굴이 노출될 일 없도록 잘 부탁할게.”
시종 두 명이 고개를 깊게 숙이며 대답했다.
“맡겨 주십시오.”
회개한 암살자들이 따라와 준 덕에 보안은 문제없을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수도인데 남의 집에 몰래 쳐들어오지는 않겠지.
그랬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장소는, 펜 로타 제국의 수도 라갈의 시내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부근의 타운 하우스였다.
하녀장은 타운 하우스의 위치를 몹시 아쉬워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마저도 말리콥스의 노력으로 아주 급하게, 겨우 얻어 낸 집이었으니까.
‘보통 재정이 부족하면 다른 집안의 타운 하우스에 더부살이한다고 했으니까.’
말리콥스 덕분에 최소한 웨더우즈 자작으로서의 체면은 챙긴 셈이다.
창문을 피해서 내 머리와 의복을 이리저리 만진 하녀장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런 스타일도 잘 어울리시네요. 청초하고 깨끗한 이미지만 고수할 필요는 없겠어요.”
나는 거울을 바라봤다.
앞머리를 빈틈없이 올려 묶고, 남색 챙 모자를 비스듬히 착용한 사나운 인상의 여자가 눈앞에 앉아 있었다.
붉다 못해 살짝 검은 기운이 도는 입술은 마치 뱀파이어라도 되는 것처럼 스산했다.
“성격 진짜 더러워 보여.”
“원래 그런 콘셉트 아니었나요?”
“음, 그렇지. 마음에 안 든다는 건 아니야. 남들이 쉽게 다가오지 못할 인상이라 좋은 것 같네.”
“그리 여기신다니 다행입니다. 오늘은 외출하지 마시고 집 안에서 편히 쉬세요. 요 며칠 이런저런 소문이 돈 탓에 주인님을 눈여겨보는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이럴 땐 미리 얼굴을 내보이지 않고, 사냥제 때 멋지게 등장하는 게 최고죠.”
“내 결혼에 관심이 넘치는 귀부인들을 옆에 줄줄이 달고서 말이지.”
“그래서 더 좋은 거예요. 펜 로타의 권력을 움켜쥔 상위 귀족들의 이목을 독점할 절호의 기회니까요. 제나일 공작을 비롯한 참전파의 후광을 받고, 영웅 안데르트의 혈연이라는 화제성을 띄울 수 있으니 올해 사교계, 아니, 지난 4년 동안의 사교계에서 이보다 더한 이슈가 없을 거예요.”
나는 평소에 비해 오동통해 보이는 입술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하녀장의 설명에 집중했다.
지난 일주일간 귀에 못이 박이도록 제국 사교계에 관한 정보를 전해 들었다.
사실, 이제껏 어렴풋이 알아 왔던 사안과 비교해 특별한 점은 없었다. 정치는 피가 난무하는 전쟁터에서도 일어난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거기서 거기란 뜻이다.
예측하기 힘든 문제가 있다면 역시…….
‘루겠지.’
루는 칼레파로 잠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는 균형을 되찾은 후 라갈로 직접 날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리 단언하는 루의 모습은 든든하기도 했고 언뜻 두렵기도 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방식으로 날 놀래려나 싶어서.
‘……따지고 보면 루만 문제인 건 아니야. 나타샤도, 크게 보면 라파엘로도.’
전부 예측하기 쉽지 않았다.
뭐, 언제는 모든 일을 예측했었나?
결국 나는 나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다.
스스로를 믿는다면 어떠한 위기 상황도 결국 해프닝에 불과해질 것이다. 두 개의 벽을 넘으며 깨달은 가장 확실한 진리였다.
그날 저녁.
시침이 자정을 넘어가던 때.
아주 은밀한 움직임이 타운 하우스 내에서 느껴졌다. 전직 암살자인 시종들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조용한 기척이었다.
첫날부터 어떤 간덩이 부은 자식이 찾아왔나 싶었는데, 찾아온 게 아니라 나가는 중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진이.
‘……어딜 저렇게 몰래 가는 거야?’
나는 눈을 감은 채 창문 틈으로 조심스레 떨어진 발걸음에 집중했다.
진답지 않은 처세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비밀스러운 용건이든 아니든, 내게 직접 외출을 허락받았을 테니까.
그래서 더 의문이었다. 평소와 다른 짓을 한다는 건, 보통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하므로.
‘모르는 척해야 하나.’
진의 사생활을 생각하면 그게 옳았다.
하지만 나는 웨더우즈 가문 구성원의 행복과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웨더우즈 자작.
진의 고용주이자 스승이며 보호자인 데이지.
‘몰래 나간다는 것은 곧 몰래 쫓아가도 할 말이 없다는 뜻.’
나는 루가 놓고 간 카디건을 한 벌 챙긴 채 타운 하우스를 나섰다.
멀찍이서 살펴보니, 진의 허리춤에서 검이 달랑거리고 있었다. 설마 누군가를 암살하러 가는 건가? 라갈에 원수가 있다든지.
진은 어둠에 감싸인 도시를 날아 유독 무거운 고요함이 깃든 땅에 멈춰 섰다.
『라갈 국립 평화원』
수리부엉이의 울음이 들렸다.
나는 국립 평화원 입구에 각인된 글씨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진을 뒤따라 묘지 안으로 천천히 발을 디뎠다.
끝없이 늘어선 비석.
그러나 내 마음은 시끄럽지 않다. 죽은 자의 비명이 귀에 박혀 들어오지도 않았고, 내 발목을 붙잡는 차디찬 환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 심신을 어지럽게 만드는 존재는 따로 있었다.
“각하.”
진이 부른 저 남자.
어둠 속에 가려진 그림자의 주인.
비석 사이에 선 이는 다름 아닌 검성, 지하르크 버클리그레이튼이었다.
‘……이런.’
남자가 지닌 특유의 정적인 기운을 인지한 순간, 절대 기껍지 않은 가설이 머릿속에 새로 세워졌다.
‘진은 검성의 간자였던 건가?’
그간 아무렇지 않게 나를 속여 왔다고?
그 진이, 나를?
불행히도 추측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정진하라.
등골이 쭈뼛 설 정도로 선뜩한 살의를 뿜는 공명이 내 목으로 날아왔다.
“각하!”
진의 비명이 터진 것과 내 상체가 다급히 비틀어진 건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공격은 가까스로 피했지만, 오른쪽 어깨 부근의 의복이 잘리고 말았다.
나는 너덜거리는 잠옷과 카디건을 붙잡은 채 뒤로 물러섰다.
“각하,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소리치지 말도록. 영면한 자들을 전부 깨울 셈이냐.”
진의 질타에 답하는 검성의 목소리는 휘두른 검의 살의가 무색할 정도로 차분했다.
발검한 채 달려온 진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자작님, 왜 쫓아오신 겁니까?”
“……왜 쫓아왔느냐고? 그야 네가 몰래 나갔으니까. 이 으슥한 시간에 검성과 무슨 볼일이 있는 거야?”
“그건…….”
느긋한 발걸음에 낙엽 짓이기는 소음이 났다.
“그자 앞에서 물러서라, 진.”
“자작님을 위협하지 마십시오. 이분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절 따라오신 겁니다.”
“아무것도 모른다?”
구름이 걷히고, 하얀 달이 드러났다.
환한 달빛에 검성의 얼굴에 드리웠던 까만 그림자가 사라졌다. 냉랭한 녹안이 진을 다그쳤다.
“우둔한 소리 하지 말고, 네 팔에 새겨진 우리의 맹세를 떠올려라.”
“…….”
검성을 노려보는 진의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다.
나는 진이 웨더우즈 가문에 고용됐을 때, 그녀의 팔에 새겨져 있던 맹세의 흔적을 떠올렸다.
“이 각인은 제가 짊어져야 할 짐입니다. 제 영혼에 맹세하건대, 웨더우즈 가문에는 절대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웨더우즈에는 피해를 주지 않겠다고 단언했던 그 맹세.
검성이 진에게 요구했다.
“네 입으로 직접 말해 봐라, 진. 우리가 과연 어떤 맹세를 나누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