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24화 (124/195)

124화

‘아이라고?’

내 귀가 잘못됐나? 지금 루가 나와 아이를 갖겠다고 선언한 게 맞아?

“너도 면식 없는 남자와 생산 활동을 전제로 만나느니 내 쪽이 더 괜찮겠지?”

어떤 부분이 괜찮다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면식 없는 수준까지 갈 것도 없어. 당장 신도 말리콥스와 나 중에서 아이의 아버지를 골라야 한다고 생각해 봐. 누구를 고르겠어?”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와중에서도 어느 쪽이 더 나은 선택지인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조금 욱했다고 해야 하나.

“왜 하필 말리콥스 할아범인데? 리웨인 경이랑 비교하면 모를까!”

“그쪽이나 저쪽이나 나보다 한참 어린 애송이인 건 똑같은데.”

아니, 물론 그건 그렇겠지만.

루의 눈초리가 조금 사나워졌다.

“아아, 어린 쪽이 좋다?”

지금 내게 말리콥스가 179세의 루보다 연하라서 더 좋으냐고 묻는 것일까?

“아니, 그건 아니야. 나이랑 상관없이 무조건 확실히, 절대로 루 쪽이 좋아.”

“네가 관리하는 펍의 가장 어린 요리사가 열여덟이었지.”

“어떤 얼굴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 기억나도 엮일 일 없어.”

“드셰로 콘타나와 나 중에서는?”

우욱. 왜 하필 그런 비교를 하는 건데? 드셰로와 결혼하고 아이를 가져서 오순도순 살라고?

“무조건 루야.”

“나타샤 황녀와 나 중에서는?”

“그쪽은 아예 아이 자체를 못 만드니까 언급할 가치도 없지.”

“네 동생 안데르트 파거는?”

“미쳤어? 차라리 죽을래!”

“라파엘로 제나일은?”

10년간 내 등 뒤를 맡긴 파트너와 부부가 되라고?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인데.”

일단 내 머리가 허용하지 않는다.

“얼굴 모르는 어린 남자도 싫고, 늙은 남자도 싫고, 여자도 싫고, 동료도 싫고, 가족도 싫으니 결국 나밖에 없군. 그렇지?”

“그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잠깐만. 왜 자꾸 나를 몰아가? 생각을 좀…….”

도도하게 턱을 치켜든 루가 질타하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다.

“생각까지 필요해? 어느 부분에서 시간이 부족한 건데? 결혼? 아이? 상대? 설마 내가 네 취향이 아니란 소리는 못 할 거고. 틈만 나면 얼굴 훔쳐보는 거 알아.”

“취향……이 맞기는 한데.”

“그럼 뭐가 문제야? 합리적으로 따져.”

“합리적?”

물론 합리적으로 따진다면 루가 최고의 선택지이기는 했다.

그는 내가 아주 잘 아는 남자이며 강인하고, 풍족하다. 게다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복잡하게 얽힌 관계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루인데?’

내 의문 따위는 같잖다는 듯, 크게 비웃은 루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

“그게 이럴 때 쓰는 말인 거 맞아?”

“응.”

루는 내 왼쪽 귀에 달린 청록색 진주 귀걸이를 매만지며 설득 아닌 설득을 이어 갔다.

“너도 나를 가장 믿잖아. 동생이나 라파엘로 제나일 따위보다는 훨씬 더.”

그 둘을 따위라고 표현하고 싶지 않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지.

“그러니까 그냥 나와 아이를 가져. 웨더우즈 가문이 네게 요구하는 의무를 가뿐히 이루라고. 10년 넘게 널 지켜봐 온 나 아니면 누가 너를 한 아이의 어머니로 만들 수 있겠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책임하게 아이만 낳고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왕 태어날 아이라면(가정이다, 가정) 루처럼 책임감 넘치는 아버지를 택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게다가 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을 때 그리 오래 살지 못하고 눈감을 운명이었다. 루라면 내가 눈을 감은 후에도 그 나름대로 성의껏 아이를 돌볼 터였다.

“그런데 루는 괜찮아?”

“뭐든 괜찮아.”

“대충 대답하지 말고. 아이나 결혼이라는 게 나 혼자 일방적으로 하는…….”

“하는?”

차분히 이어지던 말이 돌연 콱 막혔다.

아이와 결혼.

내게는 당연히 처음이면서 낯선 이야기이다.

성인이 되기 무섭게 전쟁터로 나가 검을 휘둘렀고, 남동생의 신분을 대신 사용해 온 탓에 그 흔한 연애 한번 해 본 적이 없었다. 특별히 해 보고 싶다 여긴 적도 없었고.

그런데 루는?

‘루도 처음인가?’

한 세기 반은 거뜬히 살아온 반신인데, 연애 정도야 질리도록 경험해 봤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혼도 해 봤을까? 사랑을 나눈 아내나, 그 결실인 자식이 있었을까? 있었다면 그들은 지금 어찌 되었을까?

한번 시작된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더 길게 이어져 갔다. 나 자신도 주체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해진 감정이 서로 뒤엉켜 가던 어느 시점.

“주인님.”

노크가 사념을 깨뜨렸다.

“웍호드 가문에서 웍호드 자작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웍호드?”

퍼뜩 정신을 차리고 루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그사이, 하녀장은 사라진 후였다. 나는 답답하던 숨통도 트일 겸 문 쪽으로 다가갔다.

손잡이를 돌려서 당기기 직전, 등 뒤에서 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거절인가?”

거절이냐고?

루는 이런 관계가 처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유로? 맹세컨대 절대 그럴 마음은 없다.

‘200년 가까이 살아온 남자에게 순정이나 순결을 바라는 건 이기적인 거지.’

다만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을 뿐이다.

무엇이 그리 복잡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간 내게 이런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토록 강렬한 소유욕을 느낀 적도, 그 상대가 남자인 적도 모두 처음이었으니까.

처음에는 뭐든 서투른 법이잖아. 아무리 나라 해도 조금 답답하게 굴 수밖에 없다.

나 자신을 객관화한 덕인지, 마음이 조금 홀가분해졌다.

“거절한 게 아니야. 괜찮다면 사냥제까지 마음을 정리한 후 받아들이고 싶어.”

뭐, 그게 청혼이 맞는다면 말이지.

루의 얼굴이 느리게 식어 갔다. 여유롭게 호선을 그리던 입꼬리 역시 비릿한 조소에 가까워졌다.

“라파엘로 제나일 때문에?”

그냥 죽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나긋하게 읊조리던 목소리가 뇌리에 되살아났다. 팔 위로 살짝 소름이 일었다.

“왜 자꾸 그 이름이 나와? 라파엘로와는 그럴 마음 없어. 그냥, 결혼이나 출산이라는 게 원래 마음의 준비를 동반하는 거잖아? 여자는 보통 그래. 남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기실 지금 당장 루에게 물을 수도 있었다. 너도 내가 처음이냐고.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루에게는 속 좁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고, 무엇보다 루의 과거를 낱낱이 파헤치고 싶지 않았다. 그의 과거를 알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연인이라든지 아내라든지. 알아 봤자 별로 기분 좋을 것 같지는 않네.’

그러니까 이건…… 어느 정도는 내 심술이나 마찬가지였다.

제멋대로인 데다 뭐든지 쉽고 간단하게 해결하는 내 마법사, 루.

간절히 바라는 김에 안달도 좀 내 줬으면 싶고. 마음도 조금 불편했으면 싶고……. 나 참.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

“여자라.”

묘한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이해와 인내 그 사이 어딘가를 오가던 금색 눈동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긍정을 표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더는 재촉할 수도 없겠군. 좋아, 기다리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루가 다시 나를 안아 들었다.

벌컥 문을 연 그는 문 앞에 서 있던 시종을 지나쳐,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마침 잘됐어. 첫 번째 적수의 친모가 방문한 건가? 꽤 적극적인걸. 눈에 걸리적거리게.”

“자, 잠깐만! 뭐 하는 거야? 날 내려놓고 나가야지!”

“우리 왕자님의 발을 땅에 닿게 하라니. 그런 불경한 짓을 저지를 수는 없어.”

“미쳤어? 당장 내려…….”

아, 빌어먹을.

눈이 마주쳤다.

하필이면 처음 보는 여인과.

‘웍호드 자작 부인.’

첫 만남 최악.

루의 가슴팍을 밀고 바닥에 내려온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선선한 미소를 띤 채 여인에게 다가갔다.

“웍호드 자작 부인? 웨더우즈 자작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오셨네요.”

당황한 눈으로 나와 루를 응시하던 웍호드 자작 부인은 능숙하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죄송합니다, 웨더우즈 자작님. 많이 놀라셨지요? 직접 드릴 말씀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애나 웍호드입니다. 편하게 웍호드 부인이라고 부르세요.”

“그러죠, 웍호드 부인.”

“감사합니다. 한데 이쪽 분은…….”

루는 입술을 달싹이려다 말고 내 눈을 응시했다. 나 편한 대로 대응하라는 의미의 시선이었다.

차마 그를 칼레파나 구혼자, 요리사 겸 정원사로 소개할 수 없던 나는 가장 적절한 단어를 골라 대답했다.

“제 친우입니다. 나중에 소개해 드릴 테니 괜찮으시다면 응접실로 가실까요? 저를 찾아오신 용건이 궁금하네요.”

놀란 것도 잠시 황홀한 표정으로 루를 응시하던 웍호드 자작 부인은 곧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군요. 친우……. 아, 저는 금속 알레르기가 있어서 차가 아닌 우유로 부탁드릴게요.”

손님 응접실에 자리한 후. 웍호드 자작 부인과 나 사이에는 간단한 안부 인사가 오갔다. 서로가 초면인 만큼 인적 조사나 다름없는 내용이었다.

“일전에 보내 드린 서신은 확인하셨나요?”

“네.”

“얼굴을 한번 뵙고 싶다고 연락드렸었지요. 결혼에 관해서요.”

그놈의 결혼.

작위를 물려받은 지 며칠 됐다고 벌써부터 연락이 밀려드는 걸까? 여러모로 놀라웠다.

“직접적이시네요.”

“괜히 점잔 빼다가 웨더우즈 자작님 같은 훌륭하신 분을 놓칠 수도 있으니까요. 혹시 저 말고 다른 가문에서의 방문도 약속되어 있을지 여쭈어도 될까요?”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렇군요. 다들 발이 참 빠르다니까요.”

입술을 가린 채 우아하게 미소 지은 웍호드 자작 부인이 내게 말했다.

“혹시 예정된 상대분이 계신가요?”

그 말에는 잠시 고민했다.

나는 아직 사교계에 무지한 상태다.

‘그리고 상대가 내게 일방적으로 바라는 것이 있을 때는…….’

잘만 이용하면 훌륭한 이득을 취할 수도 있는 법이지.

“아니요, 아직 없습니다.”

“아! 한시름 놓이네요. 그럼…….”

이후 나는 장장 한 시간 동안 웍호드 가문의 대단하신 역사와 리웨인 웍호드의 잘난 점을 귓구멍 터지도록 들어야 했다.

그 아들이 나한테 쥐어 터졌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겠지.

리웨인에 대해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귀부인의 낯을 보기가 부끄러워졌다.

‘아직은 내가 안데르트의 누이란 소문이 돌지 않은 건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 소문이 돈 후에도 웍호드 자작 부인의 입장이 그대로일까?

그렇게 일주일 동안 두 가문에서 방문한 손님을 맞이한 후.

나는 사냥제 참석을 위해 라갈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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