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솔직히 말해서 적잖이 당황했다.
루가 제안한 ‘돕는다’는 방식이 몹시 급진적이면서 이질적이었던 까닭이다.
‘이게 반신의 사고?’
하지만 이제까지는 대체로 여유롭고 시큰둥할 뿐, 일반인들과 별다를 것 없는 언사를 보여 줬었는데.
나의 소중한 친구를 죽이자는 루의 제안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이 들었다.
“그…… 살인은 나쁜 거야.”
루는 한쪽 눈썹을 들썩이며 대답했다.
“아주 놀라운 진실인데? 덕분에 이제껏 몰랐던 대단한 진리를 깨달았…….”
“잠깐. 거기까지.”
루가 나머지 한쪽 눈썹도 들썩이려던 순간, 나는 황급히 뒷말을 이었다.
“지금 네 태도, 제나일 성에서와 똑같아.”
정곡을 찔린 것일까? 루의 입술이 곱게 다물렸다.
“평소라면 코웃음 치고 넘어갈 부분에도 더 열심히 비꼬기만 하고. 왜 그러는 거야? 혹시 그때 생긴 불만이 아직도 해결이 안 됐어? 이쯤 되면 그냥 터놓고 이야기해. 우리 사이에 숨길 것도 없잖아.”
루는 계속 입을 다물었다. 내 눈에는 그 모습이 어쩐지 고집부리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어린아이?’
아니, 그건 단순한 비유에 불과하다. 내 눈에는 지금의 루가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뛰어난 통찰력과 초연한 시선으로 모든 사건을 해석하는 이가 아닌, 주위에 널리고 널린 일반인 중 한 명으로…….
루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너, 나를 너무 잘 알아.”
껄끄러운 감정이 차고 넘쳐서 비난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이것 봐. 반신은 무슨. 지극히 인간적이잖아.
‘인간적이라.’
그때 내 머릿속이 한 가지 사실로 번뜩였다.
‘아, 균형?’
그제야 지금의 루가 유독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진 이유를 알 듯했다. 그의 균형이 어긋나면서, 지극히 인간적인 부분이 도드라지게 된 것이 아닐까?
‘더 자극적이고 강렬한 감정에 노출될수록 인간에 가까워진다고 했지.’
그래, 맞아. 그런 거였어.
요 며칠 루가 까칠하게 행동했던 근본적인 원인을 깨달아서인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 루는 아직 신이 아니야.
그는 신에 비해 한참 어리숙한 반신에 불과해. 균형이 무너지면 지극히 인간다워지는, 그런 반신.
루가 얇게 뜬 눈으로 나를 훑었다.
“나랑 대화할 때는 딴생각에 빠지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음음, 그렇구나. 루는 나로 인해 사람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거구나. 제나일 성에서도, 지금 이 순간에도.
머릿속에 전에 없던 부드러운 허밍이 흐르는 듯했다.
두 발이 하늘로 날아올라 갈 것처럼 가벼워졌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딴생각 아니야. 그냥, 내가 루에 대해 아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나에게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 줬으니까.”
헛기침하며 작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래 보여도 나는 항상 너를 주시하고 있거든. 솔직히 결혼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 줄 줄 알았는데, 아니, 물론, 대단한 조언을 기대한 건 아니고, 음. 내 상황을 정확히 아는 건 루밖에 없는 데다가 결혼이라는 게 너무 가볍게 이루어져서는 안 되니까…….”
내가 머저리처럼 말을 길게 끌 동안, 딱딱하게 굳어 있던 루의 표정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그는 어느새 작은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온 루가 내게 되물었다.
“안 돼?”
“어?”
“결혼이 너무 가볍게 이루어져서는 안 돼?”
어색하게 뺨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뭐…… 보통 그렇지 않나?”
그런 나를 물끄러미 응시한 루가 대뜸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말했다.
“안겨 봐.”
“뭐?”
“이리 와서 안겨 봐.”
“미, 미쳤어? 내가 왜?”
“이유가 중요해? 말하자면 내가 너를 안고 싶어서인데.”
그의 뻔뻔한 태도에 이번에는 내 입이 다물렸다.
내게도 솔직하고 뻔뻔한 구석이 있다는 걸 아는데, 루는 종종 그런 나보다도 더한 모습을 보이고는 한다.
덕분에 나 또한 때때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지러운 상황에 처해야 했다.
왜냐고? 날 이런 식으로 대하는 사람은 세상천지 그밖에 없으니까!
“쯧.”
혀를 짧게 찬 루가 굳어 있는 내 곁에 다가왔다. 근사한 웃음에 심장이 콩닥콩닥 기분 좋게 뛰었다.
“무정한 우리 왕자님. 항상 공주가 안아 들게 만들지.”
그러고는 예고대로 날 번쩍 안아 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리고 또 어느 방면으로는 익숙하게 루의 목을 부둥켜안았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루는 창가 쪽 흔들의자에 앉아 내 두 다리를 팔 받침대 위에 가지런히 올려 두었다.
자신의 팔과 의자 사이에 낀 의복 천까지 세심하게 편 후, 루가 속삭였다.
“네 말이 옳아, 데이지. 살인은 나쁜 짓이야.”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목소리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균형의 문제가 아니라, 루에게는 실제로 살인이란 행위의 무게 자체가 가벼운 게 아닐까 하고.
“이틀 정도 칼레파에 머물다가 돌아와야겠어. 네게 다 들킬 정도로 내 상태가 추할 줄은 몰랐거든.”
추해?
‘루는 질투하는 자신의 모습을 추하다고 표현하는 건가.’
나는…… 별로 그렇게 느끼지 않는데. 오히려 그 원인을 알고 나니까 좀 귀엽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전에 네가 내게 말한 그 ‘결혼에 관한 조언’은 해결하고 가야겠지.”
그가 허공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하자, 침실 옆에 마련되어 있던 종이 경쾌하게 울렸다.
달칵.
이윽고 하녀장이 침실로 돌아왔다. 나와 루가 엉킨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란 그녀는 짧은 헛기침과 함께 시선을 멀거니 돌렸다.
말로 형용하기 힘든 기묘한 수치심이 든다. 쥐구멍에 숨고 싶은데 루의 팔은 떨쳐 내기 싫은 그런 이중적인 수치심이…….
루는 알 바 아니라는 얼굴로 싱긋 웃고는 하녀장에게 말했다.
“웨더우즈 자작의 결혼 문제는 내가 해결하겠습니다.”
두서없는 말이었음에도 하녀장은 칼같이 거절했다.
“안 됩니다.”
“이야기는 나눠 본 후 거절하시죠.”
“모리안 세레니예는 안 됩니다.”
루의 질타와 하녀장의 으름장은 거의 동시에 터졌다.
“모리안 세레니예?”
나의 반문에 하녀장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눈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무리 그대로 모리안 세레니예라는 가상 인물과 우리 주인님을 결혼시킬 수는 없어요!”
루가 이죽거렸다.
“하녀장의 상상은 데이지조차 한 수 무를 만큼 창의적이네. 모리안 세레니예와 데이지가 왜 결혼합니까? 그쪽은 이미 그레이 웨더우즈라는 짝이 있는데. 원래 그런 치정극을 좋아합니까?”
하녀장이 붉어진 뺨을 숨기며 두 번째 헛기침을 했다.
“……흠흠! 내 억측이었다면 미안해요. 당신이라면 어쩐지 그런 과거는 고려치도 않을 거라 생각했네요.”
하녀장,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 외로 되게 편견 없는 사람이었구나?
루가 날 끌어안은 상태로 가볍게 목을 풀며 대답했다.
“세기의 미녀와 결혼시키는 일. 보기에 나쁘지는 않겠지만 별 도움은 안 됩니다. 날파리들이 경계하지 않을 테니까.”
“날파리요?”
“그러니 가능한 한 남성인 편이 좋겠지. 당신이 바라는 웨더우즈 자작의 남편은 어떤 인물입니까?”
하녀장은 기다렸다는 듯, 루의 질문에 대한 답을 술술 내뱉었다.
“유서 깊은 집안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라 예술적 기질과 인문학적 소양이 뛰어나면 좋겠어요. 인격에도 하자가 없어야 하고, 입도 조금 무거워야겠고, 인맥은 앞으로 만들어 갈 예정이니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식견도 우리 주인님이 충분히 넓으신 만큼 필수 요건은 아니고요.”
바라는 게 너무 많은 거 아니냐고.
“온실 속 화초 같은 스타일? 데이지의 취향과는 너무 멀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
눈을 부릅뜬 하녀장이 검지를 들며 강조했다.
“아이를 가지는 데 하자가 없어야 합니다.”
그 발언에는 나도 모르게 질타가 나왔다.
“하녀장, 사람이 무슨 물건이야? 하자가 없다고 말하게.”
“결혼 시장에서는 사람도 종종 물건으로 취급되는 게 불편한 현실이죠. 웨더우즈 자작님의 짝은 성적으로도 건강해야 해요. 그래야 후계를 가질 기회도 더 많이 주어질 테니까요.”
다른 건 몰라도 하녀장이 웨더우즈 가문의 후계에 목을 맨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아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요소라는 듯, 황당하다 못해 조금 망연하기까지 한 반문이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데이지 파거의 아이?”
“…….”
“너와 다른 남자의 아이?”
이해도, 납득도 불가능하다는 눈빛이 내게 무언의 답을 종용했고, 나는 얼떨결에 긍정했다.
“그렇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아이를 가진다고?”
네가 나를 언제 키웠어? 나는 나 혼자서 잘 자랐는데?
‘……라고 하기에는 루가 날 오랫동안 지켜봐 온 게 사실이지.’
그래서 그냥 아무 말도 안 했다. 기실 내게 답을 요구하는 질문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깝기도 했고.
“꼭 가져야 하나?”
루의 의문에 하녀장이 단호한 얼굴로 긍정했다.
“후계는 수장의 의무입니다.”
고심에 빠진 듯 미간을 구긴 루가 가만히 내 정수리 쪽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이내 곧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의무라면 어쩔 수 없나. 그럼 내가 잘 노력해 보지. 데이지가 아이를 갖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