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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22화 (122/195)

122화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루는 책장을 덮은 것 외에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에 나와 하녀장의 대화 역시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넘어갔다.

“저는 가능한 한 빠르게 진실을 밝히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분위기를 잘 타셔야 해요. 상대의 기분이 좋은 상태여야겠지요. 최악은 그분에게 청혼을 받은 직후, 거절과 함께 진실을 밝히는 겁니다. 상대의 자존심을 짓밟는 최악의 대처죠.”

“으음. 역시 그렇겠지.”

좋아, 그렇다면 사냥제가 시작한 당일 밤에 밝히자.

라갈 혹은 황성에 머물며 보내는 연회이므로, 라파엘로의 반응이 어떻든 며칠간은 억지로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 혹여나 관계가 틀어지더라도 회복의 기회가 남아 있는 것이다.

이후, 말리콥스와 집사 암살자가 대화에 참여하면서 이전과 사뭇 다른 진중한 분위기로 뒤바뀌었다.

새 홍차를 준비해 온 하녀장이 네 개의 잔에 차를 따르며 첫 서두를 뗐다.

“나타샤에 대해 물으셨었죠.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주인님께서 기대하신 내용은 들려 드릴 수 없을 거예요. 다른 형제들이 그러했듯 저와 나타샤의 관계도 몹시 소원한 편이었거든요. 어릴 땐 형제라는 게 다 그런 건 줄 알았죠.”

“나타샤도 비슷한 소리를 했던 것 같네.”

“그 애는 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주변 사람들이 도피성 참전이라 비하했을 정도니까요.”

마도 전쟁 발발 전까지만 해도 나타샤의 세력이 몹시 미미했다는 뜻이었다.

“종전 후 황실은 자연스럽게 나타샤를 다음 대 황제로 추대하는 분위기였어요. 제나일 공작과 로즈벨 백작, 칼펜위버 후작을 등에 업은 그 아이의 기세는 아주 대단했거든요. 황제의 검이라 불리는 검성과도 우호적인 관계였으니 적수가 없을 만했어요. 실제 황위 후계자 자리에 오르기까지 했고요.”

가장 첫 번째 잔이 내 앞으로 준비됐다. 나머지 잔 역시 각자에게 건넨 하녀장이 자신의 의자에 앉았다.

말리콥스가 말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군. 종전 반년이 채 되지 않아서, 선황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것부터가 시작이었던가?”

“네. 그때 나타샤가 황위 후계자에서 폐위됐거든요.”

폐위?

‘폐위까지 됐었어?’

하녀장이 홍차를 한 입 마셨다.

“‘전시에 즉위한 임의 후계자에게는 정당성이 부족하다’라는 게 폐위의 근거였습니다. 폐위 후 새롭게 황위 후계자가 된 황족이 바로 아슈네이케 오라버니예요.”

“하녀장을 비롯한 형제들도 전혀 모르고 있던 사안인가 보지?”

“네. 추측하건대 선황 폐하와 나타샤 그리고 아슈네이케 오라버니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던 것 같아요. 반발이 컸음에도 선황 당신께선 어떠한 입장도 나타내지 않으셨고, 이틀 후 눈을 감으셨죠. 그리고 그대로…… 아슈네이케 오라버니가 황위에 올랐습니다.”

“당시 나타샤 황녀의 대처에 관해 이런저런 말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네. 참전파 귀족들과의 연락도 일절 끊고 잠적하지 않았었나?”

“맞아요. 폐위라는 수에 곧바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죠. 많은 이야기가 돌았어요. 나타샤가 아슈네이케 오라버니에게 아주 큰 약점을 잡혔다느니, 전란의 악귀에 사로잡혀 끔찍한 정신병을 앓는다느니, 황위에 오를 그릇이 못 되느니…….”

메피스토 성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나타샤의 얼굴이 떠올렸다.

친구를 위해서라면 함께 지옥으로 뛰어들 영웅이었는데. 그보다 더 큰 그릇이 과연 세상에 존재할 것인가?

조롱과 악담을 홀로 견뎌야 했을 나타샤를 생각하니 가슴 안쪽이 쓰라렸다.

또한 궁금해졌다. 나타샤는 어째서 순순히 황위 후계자 자리를 내놓았는가?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나타샤는 아슈네이케 오라버니 즉위식에 홀연히 나타났다가 또 홀연히 사라졌어요. 그 이후로는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사이 황실 지하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 있었다는 말이로군.”

이쯤 되면 누구나 비슷한 추측을 내놓게 될 것이다.

“결국 폐위는 나타샤의 선택일 확률이 높은 건가?”

“…….”

“나타샤가 밥 먹듯 하던 말이 있지. 자신의 진정한 가족은 라갈이 아닌 이곳에 있다고. 동료들이 전사할 때마다 가장 힘들어하던 사람이 바로 나타샤였어. 황위 후계자란 위대한 자리에 즉위하기 전, 우리에게 했던 말도 그와 비슷해.”

“…….”

“먼저 떠난 전우들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황제가 되겠다.”

내게, 황위의 무게는 단지 그 죗값에 불과하다.

하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황제라는 건 펜 로타 황실의 얼굴이니까요. 소생 실험에 필요한 자원, 정보, 기술자들을 모으는 데 직접 움직이는 건 어려워요. 너무 바쁘거든요.”

“나도 꽤 그럴싸한 주장이라고 생각하네. 그 중심부에 메피스토의 심장이 존재한다면 더욱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했겠지. 심장을 활용한 생체 실험은 연합의 그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테니.”

대화가 오가던 테이블에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창가에 앉은 루가 빈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내내 조용하던 집사 암살자가 처음으로 입술을 열었다.

“하녀의 증언에 의하면 <베리드 렛>은 확실히 수상한 조직입니다.”

“하녀?”

내 반문에 미간을 구긴 집사 암살자가 적절한 단어를 찾아 다시 말했다.

“산적.”

아, 그 하녀.

“제대로 협박하기도 전에 순순히 우리 쪽에 가담했었습니다. 마침 소속된 길드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새로운 진로를 고민 중이었다고 하더군요.”

진로? 산적 하녀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너무 건전한 단어였다.

“석 달 전 상부 명령으로 산사태에 파묻힌 전시 마도구 탈취 임무에 참여했었는데, 꽤 엄청난 양의 물건이 발견됐음에도 수뇌부는 시체 두어 구만 챙길 뿐, 정작 임무 목적이었던 마도구는 뒷전이었다고 합니다.”

“시체…….”

“비슷한 일이 수년 동안 반복되니 <베리드 렛> 내부에서도 흉흉한 소문이 도나 봅니다. 베일에 싸인 길드장이 죽지 않고 살아남은 메피스토일 수 있다며 퍽 진지하게 말하더군요.”

가까이서 보면 두렵지만, 멀리서 보면 한참 우스운 이야기였다. <베리드 렛>의 길드장은 메피스토가 아니라 메피스토를 토벌한 시대의 영웅인데 말이지.

메피스토가 언급되자 말리콥스의 안색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기실 메피스토의 심장에 관해서는 나도 할 말이 없네.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사실이니까.”

그리 말하는 노인의 얼굴은 아직까지도 깊은 의문에 잠긴 채였다.

맨 처음 내가 ‘펜 로타 황실의 소생 연구와 메피스토의 심장 사이의 관계성’ 조사를 요청했을 때만 해도, 황실이 메피스토의 심장을 탈취했을 거라 예측하지 못한 말리콥스였다.

‘그만큼 비밀스럽게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뜻이겠지.’

말리콥스는 이어서 말했다.

“다만 펜 로타 황실이 로궤의 기술을 탈취한 점은 우리도 꽤 오랫동안 주시해 온 부분이라네. 전시에 로궤가 지원병으로 보낸 마법사들 중 일부가 행방불명됐고, 아직 시신도 못 찾았지. 아마 그들을 통해 일부 주요 정보들이 누설됐을 걸세.”

“황실이 로궤의 마법사들을 납치했을 거란 뜻인가요?”

“납치일지, 아니면 지극히 자의적인 결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그쪽이 가장 확실한 경로로 보인다네.”

하녀장이 작게 한숨을 내쉬자, 말리콥스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안을 건넸다.

“속상해 말게. 이 세상에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중앙 국가 기관은 없어. 얼마나 깨끗하게 꾸며내 보이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저도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어요, 말리콥스 님. 황실의 이면은 어린 시절 지겹게 겪고도 남았죠. 아주 지겹게요.”

“그래서 그 메피스토의 심장을 이용하면 실제로 소생이 가능할 수도 있는 거야?”

힐긋, 루를 살펴본 말리콥스가 조용히 헛기침했다.

“흠흠. 자작에게는 말해도 되겠지……. 사안이 사안인 만큼, 스쿨드 님께 직접 연락을 취했다네. 그리고 소생은 가능하지만 그 이후는 확신할 수 없다는 답을 받았지.”

“확신할 수 없다는 건?’

“이를테면, 육체는 되살아나도 육체의 주인과 하등 상관없는 영혼이 돌아온다거나.”

“…….”

“본래의 영혼이 돌아온다고 해도, 소생한 의미가 없이 금방 다시 죽을 가능성도 높다더군.”

말리콥스는 용케 ‘자작처럼 말이지.’를 덧붙이지 않았다. 그 역시 내가 시한부란 사실을 하녀장에게 숨기는 쪽이 좋다고 판단한 듯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쿨드의 판단은 논리적이야. 하지만 나타샤가 과연 그 사실을 모를까?”

“자작, 자네도 알겠지만 강한 욕망은 이성을 억누른다네. 메피스토가 그러했듯 말이지.”

지금 나타샤와 메피스토를 비교하는 건가?

불쾌한 대입이었지만 입을 닫았다. 오랜 동료라는 이유로 한쪽만 두둔한다면 시야가 좁아질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했다.

잠시 머리를 정리하던 나는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루도 그렇게 생각해?”

루는 어느새 다시 펼친 책 『펜 로타 가정 요리 100선』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너야말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한걸, 데이지.”

“뭐를? 소생 실험?”

“라파엘로 제나일.”

“……라파엘로?”

이렇게 갑자기?

“그건 왜?”

너무 뜬금없이 떠오른 주제라, 나도 모르게 멍청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옆에 앉아 있던 말리콥스가 아주 조용히 기침했다.

“큼. 자작? 전달하려 했던 사안은 얼추 끝난 것 같으니 우리는 이만 나가 보겠네. 집사? 하녀장? 내려가서 술이나 한잔하지.”

“먼저 내려가시오, 장로. 나는 아직 주인님에게 할 말이…….”

“아스트로사 폴 위스키 28년산.”

“…….”

“향이 미치도록 근사하다네. 좋은 말로 할 때 일어서게.”

“…….”

말리콥스가 집사 암살자와 하녀장을 데리고 침실을 나간 후.

루가 <사프란을 곁들인 양갈비구이>라고 적힌 장을 넘기며 다시 운을 뗐다.

“내가 널 도울 수 있다면 내 도움을 받겠어?”

루의 도움? 당연히 받는다.

그는 지금의 내가 진심을 다해 신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그런데 루가 말하는 ‘돕다’는 기준이 영 모호하다.

“나와 라파엘로의 관계가 틀어지지 않도록 도와주겠다는 거야?”

잠시 눈을 감았다 뜬 루는 눈에 띄게 피곤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조금 고민해 봤는데”

“응.”

“그냥 죽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뭐?

“그를 죽이고 내가 제나일 라파엘로 노릇을 한다면 네게도 더 확실한 정보들을 넘길 수 있을 테고. 주변인들은 세뇌하면 되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야.”

“…….”

“어때, 내게 맡기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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