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21화 (121/195)

121화

그런가.

하녀장의 경고는 그럴싸했지만, 머리로만 이해될 뿐 마음으로는 전혀 공감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라파엘로와 나 사이의 염문설이 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이었는데…….

‘그건 좀.’

상상이 잘 안 된다.

우선 나는 라파엘로를 평생 속이고 싶지 않다. 차마 그를 상대로 거짓말을 이어 갈 자신이 없었다.

기실, 사냥제 기간 동안 반드시 치러야 할 중요 사안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라파엘로에게 과연 어떤 방식으로 내가 안데르트임을 밝힐 것인가?’

아, 머리야. 아직 별다른 해결책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두통이 다 올라오네.

“하녀장, 내가 요즘 고민에 빠진 일이 하나 있거든.”

“말 돌리지 마세요, 주인님. 지금 저희는 결혼에 관해 대화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내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해. 어쩌면 라파엘로가 청혼을 할지도 모르거든.”

“……예?”

나는 놀란 눈을 한 하녀장에게 대략의 사정을 설명했다. 대충 안데르트 시절에 아무 생각 없이 뱉었던 말이 내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소재가 퍽 흥미로웠는지, 다과를 직접 내오던 집사 암살자도 제 볼일을 잊고 하녀장 옆에 섰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한쪽 팔을 들었는데.

“질문 있어?”

“예. 지금 계속 언급하시는 안데르트라는 인물이 마도 전쟁의 영웅이자 라파엘로의 검이라 불리는 안데르트 파거인지?”

“응.”

“……그 말은 주인님과 그 안데르트 파거가 동일 인물이라는 뜻인지?”

“응.”

집사 암살자의 무표정에 커다란 금이 갔다.

언제 어디서나 틀에 박힌 무표정을 유지하던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저를 그렇게 개 패듯 팰 수 있던 거군요! 집사 다나한, 드디어 모든 의문이 풀렸습니다. 괴물 같은 전 주인님을 수족처럼 부리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군요.”

뭐, 바로 납득이 갔다면야 다행이긴 한데.

“비밀이야.”

“누구에게 떠들고 다닐 처지도 못 됩니다.”

“미드윈트리를 벗어나 자유를 찾는 게 일생의 목표라며?”

“집사 일도 천직인 것 같습니다. 은식기를 닦을 때마다 전에 느껴 본 적 없는 마음의 안식이 느껴지더군요.”

“루 때문이지?”

루의 이름이 언급되자, 서서 졸기라도 한 것처럼 시선을 내려 못 들은 척한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집사 암살자가 입도 벙긋 못 하는 것일까?

내가 아는 루는 여러 방면으로 재수 없지만 기본적으로 한없이 다정한 이였기에,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집사 암살자가 말했다.

“그냥 결혼하시죠. 상대는 펜 로타에서 손에 꼽는 권력가인데.”

“귓구멍 막혔어? 난 내가 안데르트라는 걸 밝힐 생각이야. 우리의 우정이 유지되든 말든, 내 정체를 밝히는 순간부터 라파엘로에게 나는 여자일 수가 없어.”

하녀장이 능숙하게 내 말을 뒷받침했다.

“그리고 주인님도 여자로 보일 생각이 없으시고요. 정체를 밝히려는 것도 괜한 오해로 더 깊은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이시죠?”

“맞아, 바로 그거야.”

진지한 얼굴로 턱을 쓸어내린 집사 암살자가 조금 다른 질문을 건넸다.

“한데 제나일 공작이 주인님의 정체를 모르는 게 정말 맞습니까?”

“맞다니까.”

내 긍정에 집사 암살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주인님. 제나일 공작이 단 한 번이라도 주인님을 의심하는 모습을 보인 적 없었는지 말입니다. 그는 검성과 비슷한 남자입니다. 주인님이 기억하시는 4년 전의 라파엘로와 동일하다고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더욱 강하고, 유능하며, 정치에 능숙해졌지요. 자신의 표정과 생각쯤 아무렇지 않게 숨길 수 있을 겁니다.”

하녀장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안목이었다. 게다가 그의 전직이 암살자임을 떠올렸을 때 과한 의심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의 말대로, 라파엘로는 ‘안데르트의 형제’라는 내 주장을 순순히 받아들였었나?

아니다.

“……어제 일, 연기가 아니었군.”

“아무리 나라도 피 토하는 연기까지는 힘들어, 동생. 설마 나를 신뢰하지도 않으면서 협력을 요구한 거야?”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의심의 여지를 남겨 뒀을 뿐입니다.”

그때, 그는 나의 어떤 점을 의심했던 것일까?

안데르트의 누나라는 나의 신분? 아니면…….

“그래, 데이지. 너는 조금 더 신중해야 해.”

깊어지는 사념을 꿰뚫고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일어서서 고개를 돌리자, 늦가을 햇빛이 떨어지는 창가 의자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다리를 꼰 채 느긋이 책을 편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너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치밀하지 못하거든.”

“루!”

“토마토 수프 색 원피스도 잘 어울리네. 네 집 바닥에 나뒹굴던 깡통이 생각나는걸.”

“토마토색이라니.”

웅얼거리는 하녀장의 한탄이 들렸지만 정작 나는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마 그가 언급한 ‘네 집 바닥에 나뒹굴던 깡통’ 때문일 것이다. 퀸 섬에서 함께 지내던 시절, 루에게 주어진 몇 없는 역할 중 하나가 그 깡통에 찬 빗물을 비우는 일이었으니까.

나는 집사 암살자가 두고 간 홍차를 쭈욱 삼킨 후(그는 내가 루의 이름을 외치자마자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루의 건너편 자리로 갔다.

“지금 도착한 거야?”

푸른 머리의 미남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보시다시피.”

“말도 없이 먼저 움직여서 미안해. 라파엘로가 내 몸 상태를 운운하며 제나일 성에 잡아 두려고 했었거든. 그때가 아니었으면 미드윈트리로 돌아오기 번거로웠을 거야.”

가만히 내 말을 듣던 그는 둥근 손톱 끝으로 책 끄트머리를 툭, 툭 건드리며 웃었다.

“우려대로 시작부터 시건방지군.”

아마 라파엘로를 가리키는 말 같았다.

“내 눈치를 볼 건 없어. 나는 너의 그런 실행력이 마음에 드는 거니까. 지지부진하며 일이 엉키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음. 그래도 그렇게 말없이 두고 왔던 건 심한 게 맞아.”

“그런가? 확실히, 나를 개처럼 부리는 인간은 네가 처음이긴 하지.”

“개?”

그놈의 개는 정말. 항상 날 애완견 취급하더니, 잘됐네. 너도 비슷한 기분 좀 느껴 봐.

내 눈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루는 마치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양, 옅은 비소를 지었다.

“그건 그것 나름대로 흥분되는데?”

“……방금 내 생각을 읽은 건 아니지?”

“안 읽어도 보여.”

“어떻게? 마법이야?”

“아니, 연륜의 힘.”

이건 179세식 농담인가.

가만히 듣고 있던 하녀장이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주인님. 설마, 제나일 성에 루 씨도 함께 머물렀던 건가요?”

답은 루가 대신했다.

“걱정 마시죠. 파란 머리 요리사가 아닌 모리안 세레니예로서 머물렀으니까.”

복잡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하녀장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렇다면 한 가지 묻겠습니다, 루 씨. 당신은 앞으로도 웨더우즈 가문의 정원사이자 요리사인 루 씨입니까? 아니면 새로운 주인님의 친척으로서, 사교 활동을 도울 모리안 세레니예입니까?”

루의 한쪽 눈썹이 살짝 들썩였다. 하녀장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이 의외였던 듯했다.

하지만 곧 의자 등에 편히 몸을 기대며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흠. 푹신한걸? 이제 좀 쓸 만한 의자가 들어왔군. 하녀장 당신의 질문에 답하자면, 이제 내가 모리안의 모습으로 돌아다닐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그런 치렁치렁한 꼴로 움직인 건 순전히 데이지를 곤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니까요.”

하녀장이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느리게 고개를 주억였다.

“제아무리 나라도 여자의 몸으로 활동하는 걸 선호하지는 않습니다. 변신 상태에서는 마를 활용하기가 영 불편해서.”

이론에 따르면 마법의 중첩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루가 중첩 상태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추측건대 그가 반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리안의 모습은 버린다니. 그럼 앞으로는 어떤 신분으로 나와 돌아다니겠다는 거지?’

어디로 나가든 함께 움직인다고 했으면서. 진의 보좌관 역을 빼앗기라도 하려는 건가.

“하던 이야기나 계속 나눠. 시간이 그리 많지도 않을 텐데.”

그에 기다렸다는 듯, 하녀장이 두 눈을 부릅떴다.

“결혼. 결혼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지요, 주인님.”

나 참. 그걸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어떻게 해?

나는 스리슬쩍 루를 훔쳐봤다.

‘…….’

예상과 달리 루는 ‘결혼’이라는 단어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대화에 참여하거나 귀를 열기는커녕 미약한 관심도 없는 눈치라, 그를 신경 쓰기 바쁜 내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신경 쓸 거라 여긴 건 내 착각이었나…….’

루라면 내가 어떤 결정을 하든 지지해 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고마운 마음이 들기보다는 뭔가 좀 힘이 빠졌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하녀장을 바라봤다.

“그 전에 더 중요한 게 있잖아. 라파엘로에게 어떤 식으로 진실을 밝히느냐의 일.”

라파엘로.

그 단어에 루가 이전과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다. 한참 집중하고 있던 책을 덮은 것이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