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미끼.
언뜻 들으면 대단한 역할이 아닌 것 같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라파엘로가 내게 요구하는 바는 명확했다.
“나와 안데르트의 관계를 세간에 밝힐 생각이야?”
“설명이 필요 없어 편하군요.”
상대는 안데르트의 시신을 포함해, 일부 마도 전쟁 전사자들의 시신을 찾는 이들. 안데르트와 관련된 인물이라고 밝히는 순간, 그쪽에서 자연스레 먼저 접근할 것이다.
‘……소생 연구라.’
죽은 자를 살리는 연구. 정확히는 마도 전쟁에서 희생된 일부 용사들을 살리는 목적.
일단 정상적인 목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나 정도로 그들 무리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릴 수 있겠어?”
“예. 나타샤 밀리오르그 펜 로타라면 순순히 미끼에 걸려 줄 겁니다.”
잠깐, 지금.
“……나타샤라고?”
예기치 못한 이름에 머리가 하얗게 물들었다.
내가 아는 그 나타샤를 말하는 거야?
“<베리드 렛>에 관해 들어 봤는지 모르겠군요.”
나는 반쯤 멍한 상태로 그의 질문에 답했다.
“지하 정보 길드.”
“대외적으로 그런 행보를 보이고 있기는 합니다만. 실체는 황실이 저지른 더러운 일을 뒤처리하고, 마도 연구를 진행하는 황실 전용 사냥개들입니다. 나타샤 황녀를 중심으로 움직이지요.”
“…….”
<베리드 렛>과 황실.
웨더우즈 저택을 나서기 전, 집사 암살자가 이와 비슷한 상황을 암시하는 말을 전했었다.
“<베리드 렛>이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위험한 자들을 뒷배로 둔 것 같다. 요. 대처법을 새로이 짜야겠더군. 요. 자세한 이야기는 돌아와서 나누지. 요.”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베리드 렛이 전국에 지부를 두고 계속 확장해 가던 이유가…… 내 시체를 찾기 위해서였던 거야.’
나타샤가 <베리드 렛>의 주인이라니.
그리고 그 <베리드 렛>의 숨은 목적이 소생 연구라니?
쉬지 않고 밀려들어 오는 정보에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소생 연구란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목숨의 무게가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 나타샤가 얼마나 깊숙이 파고든 상태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소생에 대한 집착이 심해질수록…….
‘메피스토의 군대가 실행했던 생체 연구와 다를 바 없어지겠지.’
입 안이 바짝 메말랐다. 종전 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타샤, 황녀는.”
“예.”
“마도 전쟁 참전자 아닌가? 듣기로 메피스토의 군대에서 끔찍한 생체 실험이 행해져 왔다는데…….”
“그 사달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나타샤 황녀가 어째서 비슷한 짓거리를 저지르느냐고 묻고 싶은 거겠지요.”
라파엘로는 서늘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내게 되물었다.
“그렇다면 저도 한 가지 묻겠습니다. 그 행위의 이유가 납득되면, 누이도 나타샤 황녀를 지지하겠습니까?”
그의 입에서 나온 ‘나타샤 황녀’는 마치 타인처럼 느껴진다. 과거 우리의 연을 떠올리면 너무나 이질적인 태도였다.
라파엘로와 나타샤의 관계가 어긋났다.
이름을 짧게 언급할 때마다 여지없이 느껴지는 한기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갑작스럽게 마주하게 된 오랜 동료들의 반목은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라파엘로의 흔들림 없는 곧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나는 그녀의 행동과 판단에 대단한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두둔하거나 못 본 체할 마음도 일절 없지요.”
아, 나는 이제껏 잊고 있던 ‘라파엘로’라는 인물에 대해 또렷이 상기해 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은 전우들을 볼 면목이 없을 겁니다.”
라파엘로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라파엘로는, 언제나 정도를 걷는다. 옳음과 그름 사이에서 저울질하지 않는다. 욕망 앞에 판단력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라파엘로가 나타샤를 ‘남’처럼 대한다는 뜻은…….
옛정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그 나름의 다짐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타샤는 어째서 지탄받아 마땅한 길을 선택했는가?’
라파엘로의 단호하고 무정한 태도를 고려했을 때, 나타샤가 대국적인 목적으로 소생 연구를 진행하고 있을 확률은 낮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이런 식으로 머리를 굴려 봤자 확답은 나오지 않아. 결국 나타샤를 직접 만나 보는 수밖에 없어.’
그래, 결국 라파엘로의 손을 잡는 게 최선의 수다.
……하지만 최고의 수는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지. 네 뜻은 이해했어. 내게 기밀 맹세를 요구한 까닭도 확실하게 납득했고. 하지만 그것들이 내 알 바는 아니야.”
조금 다른 시점에서 이 상황을 생각해 보면 더 나은 결론에 이를 수 있다.
바로, 라파엘로가 내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결론.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바라는 것이 존재하는 순간, 관계의 균형은 깨져 버리기 마련이다. 주도권이 한 방향으로 기울게 되니까.
“그리 말하는 걸 보니, 누이가 내게 원하는 것이 있나 봅니다.”
“그럴 거라 생각해?”
“길게 끌 필요 없습니다. 누이의 성질머리가 급하다는 건 어제의 일로 충분히 경험했으니까요.”
네 눈치도 참 징글맞다, 라파엘로.
“네 소유물 중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 있어.”
“말해 보십시오.”
“디안 케트의 유산.”
기실 라파엘로가 내 요구에 순순히 응해 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 검성조차 제 후계자들을 이용해 먹으면서 얻으려 했던 보물이다. 디안 케트의 유산은 라파엘로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라파엘로에게 중요한 존재인 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그는 과연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둘까?
기대를 갖고 답을 기다리기 무섭게, 라파엘로의 선명한 적안이 빠르게 침전했다.
“……어제 일, 연기가 아니었군.”
연기라면, 설마 각혈 말하는 건가?
“아무리 나라도 피 토하는 연기까지는 힘들어, 동생. 설마 나를 신뢰하지도 않으면서 협력을 요구한 거야?”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의심의 여지를 남겨 뒀을 뿐입니다. 한데 그 고물을 노린다는 건, 당신의 목숨이 위급한 상황이라고 해석해도 괜찮겠습니까?”
“물건을 넘긴다고 약속하면 말해 주지.”
“낡은 새장쯤 누이에게 못 넘길 이유가 하나 없습니다.”
이렇게 쉽게 응한다니. 나는 의구심을 가진 채 물었다.
“고물 따위가 아니라 귀한 보물이라는 걸 알 텐데?”
“다시 말하지만.”
단호한 얼굴로 나를 돌아본 라파엘로가 이 이상의 반문은 받지 않겠다는 투로 말했다.
“당신이 진짜 안데르트의 누이라면…… 오랜 현자가 남긴 유산 따위, 내게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확신할 수 있다.
저건 거짓말이 아니다.
‘그럼 디안 케트의 유산은 왜 모으고 있었던 건데?’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순순히 넘겨준다니 다행이었다.
“이제 이쪽 질문에 대답하실 차례입니다.”
목숨이 위급하냐는 질문 말인가.
디안 케트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치료술사이다. 게다가 그가 남긴 유산은 어떤 불치병이든 치료한다는 풍문이 따르므로, 사람들이 욕심낼 이유는 크게 두 가지밖에 없다.
수집 욕구와 치료 욕구.
라파엘로가 흔쾌히 디안 케트의 유산을 넘기겠다고 단언한 만큼 나도 솔직하게 답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 눈치 빠른 놈을 상대로 오래 숨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네 말이 맞아. 내게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고, 마지막 희망을 잡는 심정으로 디안 케트의 유산을 모으고 있지.”
“그렇다면 그 물건 때문에 내게 접근한 겁니까?”
반은 뜨끔했고, 나머지 반은 억울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먼저 접근한 게 누군데 그래? 첫 만남부터 나한테 눈이 돌아가 있었던 거, 기억 안 나?”
그때, 라파엘로의 걸음이 멈추었다.
우리는 어느새 본성 메인 홀에 도착해 있었다.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거대한 메인 홀 한가운데에, 보란 듯이 놓인 고물 하나가 보인다.
……고물? 제나일 공작성 홀에, 고물?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가지런히 놓인 고물을 확인했다. 물건의 정체는 새장이었다.
‘아무래도 이 물건…….’
디안 케트의 유산. 그중에서도 네 번째 유산인 디안 케트의 새장 같았다.
“대놓고 전시했구나.”
누구는 숨기려고 급급한데 말이지.
“그럴 목적으로 구한 물건이니 당연합니다.”
전시할 목적이었다니. 누구에게 보여 주려던 것일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뭐, 최소한 라파엘로의 건강에는 문제가 없다는 뜻이니까. 다행은 다행이야.’
디안 케트의 유산을 조건으로 내밀면서도, 내심 라파엘로의 건강에 큰 이상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되던 차였다. 물욕 없는 그의 성정을 떠올리면 그 외 다른 이유는 생각나지 않았으니까.
“마지막으로 물을게. 중요한 물건일 텐데, 내게 넘겨도 되겠어?”
“이제는 당신이 더 중요합니다.”
더는 의심할 여지 없는 확언.
‘……중요하다니, 그렇게 여겨 주니 고맙기는 하지만.’
라파엘로와 대화하면 할수록, 이 새장을 거래의 용도가 아니라 순전한 선의로 넘겨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안데르트의 누이라서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것일까?
라파엘로가 나에게, 죽은 안데르트에게 느끼는 죄책감이 이토록 부담스러운 무게였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