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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16화 (116/195)

116화

그리고 아무런 말도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고는 멀거니 창밖을 내다본다. 너 사람 멋쩍게 만드는 데 뭐 있구나.

나는 고래 사이에 등 터지게 생긴 진을 끌고 제나일 기사단의 본관으로 향했다.

내 양산을 빼앗아 직접 씌워 준 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작님.”

“왜.”

“수명이 10년 남았다는 건 무슨 소리입니까?”

“……뭐, 그냥. 듣는 그대로지.”

드셰로 그 녀석. 왜 진이 있는 자리에서 그렇게 당당히 지껄인 거야? 내 측근들이라고 해서 모든 비밀을 알지는 못한단 말이야.

잠시간 침묵하던 진은 눈에 띄게 딱딱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치료는 힘든 겁니까?”

“해결법을 찾고 있는데 쉽지는 않아. 그래도 10년이면 넉넉한 편이지.”

1년 따위의 수명에 비하면야 아주 넉넉하고말고.

그때. 진이 욱한 음성으로 날 질타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뭐가?”

“자작님이 그간 얼마나 험난한 시간을 보내오셨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감히 이해하지 못할 경험들이란 것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한부의 삶을 사는 것이 별일 아닌 것은 절대 아닙니다. 외려 제국의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전부 달라붙어 자작님의 병을 치료해야 하는 상황 아닙니까? 자작님은 억울해하셔야 합니다.”

“…….”

“…….”

“음, 그래. 경솔했네. 미안.”

근데 이거 내가 사과해야 할 일 맞는 건가.

진과 함께 제나일 본관을 거닐어서일까? 기사들이 힐끔힐끔 우리를 쳐다봤다.

그들을 무시하고 실내 연무장에 도착하니, 운 좋게도 검술 대련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을 햇빛을 피한다는 핑계로 연무장 중앙에서 가장 먼 자리에 앉아 대련을 구경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실력이 쓸 만하잖아?’

내심 놀라면서 힐긋 진을 바라봤다. 눈이 아주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너도 낄래?”

“예? 아닙니다, 저는 자작님을 보좌…….”

“보좌 타령은. 칼레파씩이나 되는 인물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면 결과물도 확인해 봐야지. 여기!”

크게 외치며 번쩍 손을 들자, 기사들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내 보좌관이 당신들과 한판 뜨고 싶대서. 제국 최고의 검술 영재와 대련할 용기 있는 자 있나?”

“자작님…….”

진이 쪽팔려 죽겠다는 눈으로 나를 원망했다. 참아, 진. 저것 봐. 지들끼리 이야기 좀 나누더니 너한테 다가오고 있잖아?

검 휘두르는 놈들은 다 똑같아. 어떤 바보가 너랑 검 맞댈 기회를…….

“피를 한 움큼 토하고 다음 날 멀쩡히 걸어 다니는 경우는 또 처음 보는군.”

천천히 팔을 내린 후 고개를 돌렸다.

누가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말을 거나 싶었는데.

“제나일 각하.”

나는 바짝 긴장한 채 일어선 진의 등을 기사들 쪽으로 밀었다.

“너 찾는다. 가 봐. 다치지 않게 살살하고.”

“……예.”

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살피면서도 위풍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하여간 은근히 귀엽다니까.

그녀가 떠나자, 라파엘로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를 차지했다. 가벼운 활동복을 걸친 기사들 사이에서 오직 라파엘로만 빈틈없이 완벽한 제복 차림이었다.

‘저 습관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언제 어디서나, 제복을 걸칠 때만큼은 흐트러지지 않게 입는 습관.

그래서일까? 나란히 앉은 것만으로도 잊고 있던 옛 향수가 피어올랐다.

“내가 많은 사람의 처음을 가져가긴 했지.”

가벼운 대꾸에, 라파엘로의 시선이 내 얼굴로 진득이 달라붙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뒷말을 덧붙였다.

“왜? 안데르트의 누이는 당신의 누이도 된다며. 난 동생한테 말 안 높여. 아니면 다시 남남이 되실래요?”

잠시간 말이 없던 그는 짧은 답과 함께 연무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남이 될 수는 없지.”

이건 라파엘로를 대하는 내 나름의 전술이다.

나는 라파엘로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라파엘로는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박하다. 그에게 접근하려는 행위 중에 알은체하며 친근하게 구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행위가 없었다.

‘그러니까 피할 수 없는 관계로 묶인다 한들, 그가 불편해할 태도를 고수하면 적당한 선이 유지되겠지.’

더불어 나 개인적으로도 이쪽이 더 편했다. 덜 어색하니까.

“역시 남매는 괜히 남매가 아닌가 봅니다.”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이겠습니까?”

……성격이 비슷하다는 뜻?

그럴 리가 없는데. 안데르트 시절에 비해서도 일부러 더 까칠하게 굴고 있고.

“이상한 데서 고심하는군요. 말을 잘 돌린다는 의미였습니다.”

예상외의 답을 밝힌 라파엘로가 제복 외투를 벗어 내 어깨를 덮었다. 기분이 아주 이상해지는 호의였다.

저기, 나 안데르트인데.

“필요 없는…….”

“마음 같아서는 곧장 침실로 돌려보내고 싶지만, 참고 있는 겁니다. 당신이 얌전히 돌아갈 성격은 아니니까.”

흠흠. 이틀 사이 참 많은 걸 파악했구나, 친구.

“의사가 전하기를 당신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더군요.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습니다만. 제가 모르는 척하길 바라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침묵으로 긍정을 대신했다. 다행히 그는 내 의사를 정확히 알아들었고, 그 이상의 언급을 삼갔다.

“좋아, 그럼…… 어제 하려다 만 말은 뭐야?”

기밀 유지를 위한 맹세는 이미 이루어진 상황.

신중한 그의 성격을 고려하면 어지간히 중한 정보일 것이다.

“일단 자리를 옮깁시다. 보는 눈이 많군요.”

나는 라파엘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연무장을 나섰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한 걸음 한 걸음 나설 때마다 수십 쌍의 눈이 뒤따라왔다.

‘지금 약간 동물원 우리에 갇힌 곰이 된 기분인데.’

진과 걸어 다녔을 때만 해도 이런 눈총을 받지는 못했다. 그 말인즉.

“라파엘로, 실례되는 질문 하나 해도 될까?”

그는 이름으로 불리는 게 영 어색한지, 내 얼굴을 한 번 스윽 쳐다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하십시오.”

“혹시 만나는 여자 있어?”

“없습니다.”

아, 굉장히 쿨한 대답이네.

‘그래서 다들 관심이 많은 거였구나.’

하긴. 나 같아도, 이성에 관심 없던 상관이 웬 낯선 여자에게 상의씩이나 걸쳐 주는 모습을 본다면……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겠어.

이거 부담스러워서 미치겠구먼.

어깨에 걸치고 있던 제복을 벗어 라파엘로에게 내밀었다.

“날 위해 주는 마음은 고마운데, 이건 돌려줘야 할 것 같아. 주변 시선이 굉장히 따갑게 느껴지네.”

“마침 잘됐군요. 그럼 이대로 함께 누이의 침실로 이동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니, 그건 안 되는데? 가면 분명 루랑 마주칠 건데? 셋이 한방에 머무는 순간을 상상하니까 숨 막혀 죽을 것 같은데?

나는 라파엘로의 협박에 순순히 굴복하기로 했다.

그의 제복을 다시 어깨에 걸치려던 순간, 저만치서 드셰로가 다가왔다.

“각하, 방금 서신이 한 장 도착했습니다.”

“웨더우즈 자작과 있을 때는 가능한 한 자리를 피해 달라 하지 않았던가?”

“죄송합니다, 기다리시던 서신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에 라파엘로는 곧장 드셰로가 건넨 서신을 뜯었다. 이어서 내용을 확인한 즉시 드셰로에게 명했다.

“마침 잘됐군. 누이와 함께 참석하겠다고 전달하게.”

“……누이라면?”

“웨더우즈 자작.”

드셰로가 심히 거북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내가 누이로 불리는 게 그렇게 언짢아? 나도 그래.

그런데 지금 누구 마음대로 함께 참석하느니 마느니 하는 걸까. 눈빛으로 설명을 요구하자, 라파엘로가 들고 있던 종이를 내게 건넸다.

종이의 정체는 초대장이었다.

‘게다가 이 인장은…….’

황실 인장.

『제나일 가문 수장 귀하

서신 송부 기준 보름 후 개최될 사냥제에 귀하를 초대합니다.

금년 최고의 사냥꾼이 되어 사냥제를 빛내 주십시오.』

사냥제.

‘그래, 지금은 가을이었지.’

하녀장의 말에 따르면, 현 펜 로타 제국의 사교계에는 다섯 가지 큰 기념일이 있다.

신년제, 건국제, 대보름절, 평화절, 사냥제.

이 중에서 신년제와 대보름절은 성회교를 주축으로 운영되고 나머지 기념일이 황실 주도하에 축제식으로 진행된다.

‘웨더우즈 가문도 4년 만에 활동을 시작한 만큼, 올해 사냥제에 필참해야겠지.’

뭐, 그건 그거고.

“난 함께 참석할 마음이 없는데. 왜 멋대로 정해?”

서신을 드셰로에게 돌려준 라파엘로가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상상하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내 놨다.

“제국 내에 안데르트의 시체를 찾는 이가 있습니다.”

순간, 나는 내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내용이 놀라울 뿐더러 몹시 엉뚱한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내 동생의 시체를? 무엇을 위해?”

“소생을 위해.”

“…….”

“안데르트뿐만이 아닙니다. 마도 전쟁에 참전했던 일부 용사들의 시신이 이미 그쪽 손에 넘어갔습니다.”

앞서 걷던 라파엘로가 결의 만만한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그러니까 누이, 당신이 그들을 뭍으로 이끌어 낼 미끼가 되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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