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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13화 (113/195)

113화

메피스토의 심장.

그 단어를 들은 남성이 마른침을 삼켰다.

끔찍한 악마의 심장이 황실 수중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은, 황실 주축만 아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이 이상 머무는 건 위험해. 바로 라갈로 돌아갈 테니 이 공간은 폐쇄하도록 해.”

-좋다. 그 전에 한 가지만 더 물으마. ‘베리드 렛’은 어찌할 생각이냐?

베리드 렛.

세간에는 잔혹한 정보 길드로 알려져 있으나, 진짜 정체를 아는 자들 사이에선 ‘황실의 지하’로 불리는 단체.

베리드 렛은 나타샤와 더미의 주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암약 길드이다.

주요 목적은 북대륙 내 로궤와 연관된 정보 탈취와 마도 연구로, 메피스토의 심장이 없었다면 창설되지 못했을 길드이기도 했다.

나타샤가 무슨 뜻이냐는 눈으로 쳐다보자, 더미가 차분히 뒷말을 이었다.

-우리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빠르고 크게 성장한 길드다. 쓸데없이 몸집이 크면 이목만 모이는 법이지. 필요한 부위만 남기고 나머지는 도려내 버리는 게 좋겠다.

“필요한 부위라면?”

-어디를 말하는지 알고 있지 않느냐. 적어도 제국 내 분산된 시답잖은 지부들은 전부…….

“안 돼.”

단번에 거절한 나타샤가 피곤함에 잠긴 눈을 깊게 감았다 떴다.

“아직 일러. 찾아야 할 것을 찾지 못했어. ……그러니 안 돼.”

나타냐가 찾는 그것.

그것의 정체를 아는 남성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려 4년 동안 찾지 못했다. 형체가 온전한 물건이라면 몰라도, 어디서 썩어 문드러지지 않으면 다행일 ‘그것’을.

하지만 차마 포기하라 말할 수도 없었다. 나타샤에게 있어 ‘그것’…… 아니, 그자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겠다. 일단 라갈로 올라오렴. 얼마나 걸리니?

“넉넉잡아 열흘.”

-사랑하는 내 동생, 그럼 그때 보자꾸나.

“응.”

더미의 입이 닫히자, 아늑한 공간은 끝없는 정적에 휩싸였다.

다시금 후드로 얼굴을 가린 나타샤는 더미를 지나쳐 문밖으로 나섰다.

그녀의 고향, 라갈로 돌아가기 위해서.

* * *

어둠이 무겁게 깔린 밤.

나는 짙게 낀 안개를 올려다보며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짧다. 협곡을 둘러본 마도 연합의 정찰대가 거점으로 돌아오기까지만 여유로웠으므로, 지금부터 고작…….

‘3분 정도 되나.’

대마법사 메피스토의 성으로 잠입하기까지 3분.

주변은 고요했다. 동료들에게 시달리던 방금 전까지의 상황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막사 뒤편에 홀로 남은 내게, 그 누구도 다가오지 않았다.

작별 인사는 이미 남겼다.

잠입은 자살 행위라고 극구 말리던 이와도.

조금만 더 지켜본 후 결정하자며 일정을 미루던 이와도.

차마 그만두라 하지는 못하고, 말없이 어깨만 두드리던 이와도.

……그러나.

“안데르트.”

사념에 잠길 찰나. 재빨리 다가온 그림자 하나가 내 귀를 잡아끌었다. 나타샤였다.

한데 어째서인지, 나타샤의 낯빛은 시체보다 어두웠다.

“얌전히 있어. 귀에 걸어 줄 테니. 이건 민감도가 높은 마 감지기다. 밤이 깊은 데다, 홑몸으로 움직이기까지 하니 주위 상황을 온전히 파악하기 어려울 거야. 착용하는 게 이로워.”

“……이 물건 때문에 얼굴이 그 꼴이 된 거야?”

마도구에는 제작자의 마가 깃든다.

다만 감지기 같은 마도구는 일회용이 아니기 때문에, 사용자의 마를 주기적으로 충전해야 계속 사용할 수 있었다.

마도구를 충전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특히 나타샤가 챙겨 온 물건처럼 민감도가 뛰어난 마도구는 충전을 서두르다가 물리적으로 큰 타격을 받을 수 있었다.

나타샤는 급작스레 결정된 잠입 계획을 위해, 마찬가지로 급작스럽게 감지기 마도구를 충전한 것 같았다.

붉게 충혈된 눈과 미약하게 떨리는 손끝이 마음 쓰릴 정도로 안쓰러웠다.

“고맙다. 꽤 든든한걸?”

귀걸이를 매만지며 웃자, 나타샤가 심히 노곤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나는 마음이 더 흐무러지기 전에 그녀를 내쳤다.

“이제 가. 남자는 가끔 혼자 사색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나타샤는 곱게 자리를 옮겼다.

겨우 열 발자국 너머로.

“……안 가고 뭐 하냐?”

“기다리는 거다.”

“뭘?”

“너를.”

“나를 왜?”

“나는 너를 따라간다.”

뭐? 설마 메피스토 성을 말하는 건가? 헛웃음을 삼키고 고개를 내저었다.

“필요 없어.”

“필요 없다니? 내가 없으면 누가 네 완전 동화를 막지? 쓰러져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라파엘로가? 아니면 네게 그 지옥도의 상황을 브리핑해 줄 칼펜위버 후작이?”

“내가 알아서 잘 조절할 거야.”

“믿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내가 네 곁에 있어야 너의 이성이 유지된다. 그래야 메피스토를 처치할 확률이 조금이라도 더 높아져. 이건 다분히…….”

“나타샤.”

대뜸 말이 끊겼음에도, 나타샤는 화 한 번 내지 않고 차분히 답했다.

“말해.”

“……고맙다.”

살짝 풀린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이내 곧 무언가 눈치챈듯, 나타샤의 손이 다급히 내게로 뻗어 왔다.

“안데…….”

하지만 잔상처로 가득한 손이 내 몸에 닿는 것보다, 그녀의 몸이 실 끊긴 인형처럼 쓰러지는 게 더 빨랐다.

나는 가벼운 타격으로 기절한 나타샤의 몸을 단단히 안아 들었다. 힘없이 늘어진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지난 10년간 함께해 온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네 마음은 고맙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나타샤, 네가 할 일은 나를 뒤따라오는 게 아니야. 전쟁으로 황폐화된 펜 로타를 재건하는 일이지.

짧은 한숨과 함께 나타샤를 막사로 옮기려던 때였다. 아까부터 쭉 나를 살피고 있던 드셰로가 조심히 다가왔다.

“안데르트.”

“어, 그래. 귀찮겠지만 나타샤 좀 데려가. 기절했어.”

드셰로는 복잡한 얼굴로 나타샤를 안아 들었다.

“……안데르트, 나타샤는 당신을…….”

“돕고 싶겠지. 알아.”

“…….”

“하지만 나타샤의 자리는 내 옆이 아니라 황위야.”

나는 드셰로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건강하고. 뒷일을 잘 부탁한다.”

누군가 비명처럼 내 이름을 내질렀다.

나는 그 부름을 등에 진 채,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그 길로.

* * *

깊은 잠에서 어렴풋이 깨어났을 때.

나는 주홍빛 노을이 은은히 내려앉은 방 안에 누워 있었다.

“……아.”

컨디션 최악.

우울한 꿈을 꾼 데다, 목이 아주 칼칼했다. 그럴 만도 하다. 피를 토해 버렸으니까.

이런 식의 갑작스러운 건강 이상은 거의 처음 겪는 일이었다. 웨스트윈트리에서 검에 찔렸던 게 아직도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건 아닐 거야.’

라파엘로와 맹세를 나눴을 때, 심장이 쿡쿡 찔리는 듯했던 그 감각.

‘웨더우즈에서 피의 맹세를 나눴을 때도 똑같이 느꼈었지.’

뭐가 문제지. 설마 심장병?

다행인 건 컨디션만 안 좋을 뿐, 몸을 움직이는 데는 무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유 모를 각혈까지 한 몸을 반쯤 정상으로 되돌릴 능력자는 한 명밖에 없다.

“루?”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살펴도 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쓰러지기 직전에 본 모리안의 얼굴은 환각이었던 건가?’

분명 환각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루가 진짜 제나일 성에 도착했다면 내 곁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나를 만나러 온 게 아니고서야 이곳까지 찾아올 이유가…….

“윽.”

그때였다. 극심한 통증이 등줄기를 타고 뇌리를 흔들었다.

이토록 선명한 고통은 회생한 후 처음이라, 사지를 웅크린 채 몸을 떨어야 했다. 다행히 통증은 오래가지 않고 4초 내로 사라졌다.

“후…….”

느낌이 좋지 않다.

나는 침대에서 아주 천천히 일어섰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사실을 재차 확인한 후, 겨울용 내의를 재빨리 벗어 던졌다.

그리고 거울 쪽으로 다가가 등의 상태를 확인한 순간.

“하.”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건.’

등 전체를 가로지르는 깊고 선명한 상흔.

그뿐만이 아니다. 어깨 아래는 불로 지진 흔적이, 골반 위에는 열 바늘 이상 꿰맨 흔적이 선명하다.

“이게 대체……”

…….

아, 제길.

나는 이 상흔들을 기억한다. 그래, 기억할 수밖에 없지. 죽어도 잊지 못할 흔적들이니까!

마도 전쟁에서 생긴 상처들.

10년간 마귀와 싸우면서, 완전 동화에 저항하면서 쌓아 온 상흔들.

안데르트 시절에 생긴 피의 흔적들이, 내 몸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마치 내 몸을 갈가리 찢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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