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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12화 (112/195)

112화

찰나였다지만 아주 잠시 8년 전쯤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라파엘로가 내게 보여 준 모습은 그만큼 편안할 때나 보여 주던 모습이었다.

“한데 그에게서는 누이가 죽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이렇게 되살아날 줄 알았다면 전쟁 통에 헤어지게 됐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아까 리웨인 경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도 내가 누이라고 믿는 건가요?”

“믿는다라. 그건 잘 모르겠군. 하지만 당신이 안데르트와 긴밀히 연결된 인물임은 확실해 보이니, 지금은 그것으로 되었어.”

나는 높은 구두 굽에서 기인한 불편한 압박감을 피하기 위해 창틀에 엉덩이를 기댔다.

“강자의 감이라는 거야? 하기야 그 감이라는 게 참 편하기는 하지.”

라파엘로의 표정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왜 저런 눈으로 쳐다보는 건가 싶었는데, 말 좀 편히 놨다고 언짢아하는 것 같았다.

아니, 나는 그냥 옛날 생각이 조금 나서 반쯤 습관적으로 답했을 뿐인데.

“……요.”

작게 덧붙인 뒷말에 그의 시선이 다시 스윽 돌아갔다.

쪼잔한 놈. 지는 반쯤 말 까면서 나는 안 돼? 더러운 신분 사회. 모든 인간은 평등해야 한다!

물론 라파엘로와 나의 상황이 예전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쯤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속 알맹이는 그대로라 그런 건지. 아니면 옛날의 그 더러운 속세의 때가 묻지 않은 정의의 용사 라파엘로를 알아서 그런 건지. 배배 꼬인 속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대화해 보니 알겠네요. 내 동생이 날 죽은 사람으로 취급했던 이유.”

새것처럼 닦인 유리창에 라파엘로의 눈썹이 아주아주 미세하게 들썩이는 게 비쳤다.

나는 내가 아는 가장 열받는 미소, 그러니까, 루의 미소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저를 제나일 각하에게 소개하고 싶지 않았나 봐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단둘이 살아와서 그런가, 우리 남매가 유독 서로를 아끼…….”

……그런데 말이지.

아무래도 내 시력에 큰 문제가 생긴 것 같거든.

창 너머 보이는 기사단 본관. 그 본관에서 이 본성으로 이어지는 정원 안쪽에, 빌어먹게 익숙한 저 얼굴.

저 얼굴은 이곳에 있어선 안 될 텐데?

“서로를, 아끼…….”

탱글탱글하고 윤기 흐르는 낯짝. 거기에 여왕처럼 고고한 기품이 서린 몸짓.

‘……루?’

루가 왜 여기 있지?

아니, 여기 있다는 것도 문제인데 왜 모리안 세레니예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야?

“……아끼는 감이 있거든요.”

이게 웬 어이없는 상황이란 말인가.

누구는 방에 처박혀서 심문당하고 있는 처지인데, 다른 누구는 훤칠한 기사 놈 옆에서 좋다고 시시덕거리고 있다니. 그것도 심지어 사람 하나 홀릴 기세로 어여쁘게 웃으면서!

욱한 심정에 눈이 세모꼴로 올라가려던 순간. 루와 눈이 마주쳤다.

날 지그시 바라본 여인의 눈매가 천천히 얇아진다. 마치 날 골리기라도 하듯이.

“그런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나도 웨더우즈 자작을 귀이 여기며 아낄 수밖에. 안데르트의 누이는 나의 누이이기도 하니까.”

……잠깐. 누구의 뭐?

그 순간만큼은 다시 라파엘로를 쳐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쳤어? 누가 당신의 누이야?”

그때, 폭소라 표현해도 부족하지 않을 커다란 웃음이 터졌다.

나는 소년처럼 웃는 라파엘로를 벙찐 얼굴로 쳐다봤다.

내 존재는 눈에 뵈지도 않는다는 양 실컷 웃음을 터트린 그는 한참 만에야 본래의 차가운 얼굴로 돌아왔다. 그리고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였다.

“아, 이런. 실례했습니다. 방금 누이가 지은 표정이 안데르트와 너무 똑같아서.”

이런 뻔뻔한 자식을 다 봤나. 웃을 거 다 웃어 놓고 실례는 무슨 실례?

라파엘로는 원탁 위에 올려 둔 펜던트를 집으며 몸을 일으켰다.

“우습군. 마음에서 떠나보내는 게 그와 나를 위한 일이라 여겼었는데. 결과적으로 이렇게 당신이라는 흔적을 찾아냈으니…….”

그러고는 내게 다가오기 전.

중대한 선언이라도 하듯, 한 글자 한 글자를 또박또박하게 내뱉었다.

“이 이상 만족스러울 수 없겠어.”

나는 라파엘로의 저 눈을 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눈.

이유는 모르겠지만 뒷목이 서늘해졌다.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다가온 라파엘로가 오른팔 안쪽을 내게 내보였다. 맹세를 요구하는 건가. 나는 일부러 맹세의 흔적이 새겨져 있지 않은 반대쪽 팔을 내밀었다.

우리의 뜻을 관철한 펜던트에서 영험한 기운이 흘러나온 순간.

“아.”

심장이 저릿하다.

‘뭐지?’

눈앞이 노래지면서 무언가 울컥 차올랐다. 불처럼 뜨겁고, 쓰라린 무언가가…….

“……데이지 웨더우즈?”

어울리지 않게 당황한 눈을 한 라파엘로가 내게로 달려왔다.

모든 순간이 느리게, 느리게 이어진다.

시야가 완전한 수평으로 넘어지기 직전, 작게 휘날린 셔츠 리본이 내 얼굴을 때렸다.

피로 붉게 물든 리본이.

“결과적으로 말해서, 지금의 자네의 영혼은 굉장히 불안한 상태야.”

몇 주 전. 말리콥스에게 들은 경고가 귓전을 울렸다.

“물론 두 개의 벽을 넘으면서, 영혼의 격 자체는 인간 수준을 탈피해 가고 있네. 문제는 깨진 상태라는 점이지. 오래 버티기 힘들 걸세.”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지금 상황으로는 기껏해야 10년 정도 더 버틸 수 있을…….”

“10년? 아니, 그건 영혼의 수명이겠지. 영혼 자체는 꽤 오랫동안 버틸 게야. 하지만 육체는 다르다네. 영혼의 불균형을 못 이긴 그릇이 점점 깨져 가고 있어. 만약 마땅한 대처 없이 이대로 계속 이어진다면…….”

이어진다면, 그다음은?

……그다음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같은 시각.

웨스트윈트리의 지하도 어딘가.

“컥, 커헉.”

목이 졸린 채 잘게 떨던 남성이 흰 거품을 물었다. 남성을 압박하던 후드를 쓴 인물은 피 섞인 거품이 제 피부에 닿자, 남성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또 다른 이가 입을 열었다.

“벌써 이곳까지 추격이 뒤따랐을 줄이야. 한시라도 빨리 거점을 옮겨야겠습니다.”

“…….”

“정보가 새어 나갈 구석은 완벽히 봉쇄했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상대는 라파엘로 제나일.”

“…….”

“어중이떠중이들과 같은 급으로 여기지 말라.”

“예.”

두 인영의 걸음은 곧 지하도의 끄트머리에 도달했다. 공간을 채우는 것이라곤 단단한 벽과 어둠이 전부인 그곳에, 꼽추 노인 한 명이 홀연히 서 있었다.

노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얼굴을 보이시오.”

검은 후드가 천천히 거두어졌다.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은발. 노인은 후드의 인물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타샤 님. 안으로 드십시오.”

쿠웅.

벽이 한 번 울었다.

티끌 하나 없이 견고하던 벽에 문이 생겨나더니, 느린 속도로 열리기 시작했다.

문 너머에는 지하도의 어둡고 습한 공기와 상반되는 아늑한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불꽃이 타들어 가는 벽난로와, 장인의 손길이 묻어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목조 가구의 배치가 시골의 정취를 풍겼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거칠게 쉰 음성이 방문자를 불렀다.

-……나타샤.

은발의 여인, 나타샤는 느릿한 걸음으로 벽난로 앞의 의자로 걸어갔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은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조잡한 형상의 더미였다. 외관과는 정반대의 영험한 기운이 풍겨 오는 더미에서 웬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간 잘 지냈니? 이런, 뺨에 더러운 것이 튀었구나. 추격자가 결국 그 거점마저 발견한 건가. 이틀 내로 옮겨야겠어.

얼굴에 묻은 핏물을 아무렇지 않게 닦아 낸 나타샤가 더미를 향해 말했다.

“연구 진전은?”

-매정한 동생아. 무려 반년 만의 재회가 아니더냐? 그간 쌓인 회포를 풀어도 모자란데, 꼭 그리 용건부터 밝혀야겠더냐.

“연구 진전.”

-……다행히 이번에는 네 구미를 당길 만한 성과가 하나 나왔단다.

“성과?”

-빌리.

“예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꼽추 노인이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나타샤에게 걸어왔다.

노인이 그녀에게 내보인 물건은 작은 유리관 안에 든 쥐였다. 쓰러진 채 가쁜 호흡을 잇는 쥐의 상태는 누가 봐도 좋지 못했다.

“한 번 죽었던 쥐입니다. 한 달 전에 소생했지요.”

그 말에 나타샤를 뒤따라온 남성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소생! 나타샤 님, 드디어……!”

그러나 나타샤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서늘한 눈빛으로 유리관 안의 쥐를 살피던 그녀는 다소 무겁게 입술을 뗐다.

“이걸 소생한 것으로 봐야 하나?”

“…….”

“거의 죽어 가는군. 맞느냐?”

“예. 아마 내일 밤을 버티지 못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더미가 말했다.

-서두르지 말렴, 동생아. 4년 만의 성공이다. 무려 4년 만에 소생이라는 성과를 거두었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란다. 너도 알잖니.

그 말에는 나타샤 역시 긍정하는지, 다른 대거리를 하지 않았다. 직전에 비해 조금 편안해진 낯이 더미를 응시했다.

“생명력 유지가 관건인 건가?”

-그런 듯하구나. 살펴본 결과, 소생된 영혼에는 전에 없던 미지의 기운이 뒤섞이는 듯한데……. 자세한 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 주마.

“그 ‘물건’의 상태는?”

그 물건.

쥐를 소생시킨 강력한 힘의 근원.

나타샤의 말을 곧장 알아들은 더미가 다정하게 답했다.

-‘메피스토의 심장’은 새것처럼 멀쩡하니 걱정하지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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