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문이 닫히고, 이번에는 라파엘로와 단둘이 남았다.
원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라파엘로는 기록용 마도구를 망설임 없이 부숴 버렸다.
“많은 걸 바라지 않으니 한 가지 질문에만 대답하십시오.”
‘대답해 주십시오’도 아니고 ‘대답하십시오’다.
귀족회에서도 느꼈지만, 4년 동안 라파엘로는 많이 변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아마 그 변화의 책임은 내게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안데르트, 당신이 그렇게 떠난 후 공작 각하는 지독한 수면 장애에 시달렸습니다. 지난 3년간은 미친 듯이 당신의 흔적만 찾아 헤맸어요.”
그래서 나는 아무 말 않고 라파엘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안데르트 파거는 살아 있습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올 게 왔다고 해야 할지.
현재 라파엘로는 드셰로를 통해서 내 정체를 ‘안데르트의 누이’로 전해 들은 상황이었다. 그러니 혼자 찔려 할 것 없어.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맞받아쳤다.
“그걸 왜 내게 묻죠?”
“당신이 아니면 물을 사람이 없으니까.”
“그래요? 아무래도 각하께서는 심문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군요. 전 이만 미드윈트리로 돌아가 볼게요.”
벽에 박힌 티스푼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문으로 걸어 나갈 때였다.
“리웨인 경은 후천적으로 특수한 힘을 전수받아, 마의 특이점을 구분하는 민감성이 몹시 뛰어나지.”
……갑자기?
나는 문고리를 쥔 상태에서 등을 돌렸다. 다리를 꼬고 앉은 라파엘로가 내 티스푼을 손끝으로 가볍게 돌리며 말했다.
“강력한 영혼을 소유한 자일수록 인상적인 향을 풍긴다더군요. 하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한 만큼 본인의 감각을 맹신할 수밖에 없고, 종종 판단력을 상실할 때가 옵니다. 아주 드물게.”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웨더우즈 자작.”
그의 짧은 손톱 끝에서 희롱당하던 티스푼이 뚝, 멈추었다. 라파엘로는 완벽한 남을 대하듯 차갑고 딱딱한 눈빛으로 내게 경고했다.
“나는 지금 너와 내 영혼의 격이 동등하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소리 소문도 없이 나타나 웨더우즈 가문을 삼키고, 기껏해야 스물 내외로 보이는 너와 내가. 혹시 여기서 더 깊게 파고들기를 바라나? 그런 걸 바라지는 않을 텐데.”
“…….”
“안데르트 파거는 살아 있습니까?”
꿈결을 헤매듯 아득하도록 길게 느껴지는 정적이었다.
호흡을 고르며 라파엘로의 손끝을 바라보다가, 아주 작게 입을 열었다.
“죽었어요.”
가능한 담백하게 알리려 했다.
“……그래. 그런가.”
언젠가는 말해야 할 진실이다. 라파엘로가 크게 동요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래서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는데.
“정말 죽은 건가.”
그랬는데도 도저히 눈을 마주칠 자신이 들지 않았다.
길게 눈을 감았다 뜬 라파엘로가 손에 쥐고 있던 작은 양철 상자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나는 저 물건을 안다.
마도 전쟁에서 메피스토의 군대를 심문했을 때 사용했던 마도구.
‘거짓말 탐지기.’
붉은빛이 아닌 초록빛으로 깜빡인다는 말인즉 내 대답이 진실이라는 의미다.
그래, 진실이지. 나에게 있어 라파엘로가 말하는 안데르트 파거는 진정 죽은 이였으니까.
네가 아는 안데르트는 이제 없어.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눈앞의 라파엘로를 지켜보고 있기가 버거웠다.
나는 준비된 듯 내놓은 거짓말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게다가 상대는 라파엘로. 한때 나의 파트너이자 형제이며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이. 작별했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내 이름을 울부짖었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안데르트라고 속 시원히 말할까?’
사실 그렇지 않은가?
드셰로에게도 밝힌 진실을 라파엘로에게 못 밝힐 이유는 없다. 오히려 가장 먼저 진실을 알려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라파엘로였다.
그래, 그러자. 그냥 이 자리에서 모두 밝히자.
내가 안데르트라고.
죽지 않고 살아서 이 자리에 돌아왔다고.
“…….”
……아.
입술이 도저히 움직이지 않는다.
드셰로 앞에서는 잘만 터지던 말이 도저히 목구멍 위로 솟아오르지 않는다.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말해야 한다. 끝까지 속이는 건 라파엘로를 모독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조금만, 유예 기간을 두자.’
라파엘로를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렇듯 갑작스레 마음을 정하고 밝히기도 쉽지 않다.
아무래도, 마음을 다잡은 후 적당한 때와 장소를 골라서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내게 있어 라파엘로라는 존재의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았으므로.
생각을 정리하자 심정이 조금 편안해졌다.
“……안데르트는.”
“안데르트는.”
공교롭게도, 동시에 꺼낸 서두가 겹치고 말았다.
나는 황급히 순서를 양보했다.
“먼저 말하세요.”
“먼저 말하십시오.”
하지만 그마저도 겹치자 전에 없던 어색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젠장. 세 번째로 겹치면 온몸에 소름이 돋을 것 같아, 짧게 헛기침 해 신호를 보낸 후 먼저 입을 열었다.
“안데르트는 자신의 희생을 자랑스럽게 여길 게 분명해요. 물론 내 눈으로 직접 그의 끝을 보지는 못했지만…… 당신들의 마음속에 망령으로 남고 싶지 않겠죠.”
잠시간 말이 없던 라파엘로는 미묘한 감흥이 흐르는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조금 다른 화제를 꺼냈다.
“지난 4년 동안 퀸 섬에 머물렀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안데르트의 시신이라도 찾고 있었던 겁니까?”
그다지 선호하는 화제는 아니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진작 그쪽이 찾아냈겠죠.”
“못 찾아냈으니 물은 겁니다. 그의 시신을 찾아냈느냐고.”
착각이 아니라면, 시신을 운운하는 라파엘로의 모습에서 전에 본 적 없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아니, 라파엘로는 어느 방면으로는 검성보다도 더 이성적인 성격이야.’
그러니 분명 안데르트의 죽음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한데 어째서 시신 따위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게 중요한가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안데르트 파거의 시신은 남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메피스토와 공멸한 만큼 먼지가 되어 흩어졌을 확률이 높겠죠.”
그는 첫 만남과 비교해 훨씬 누그러진 어조로 물었다.
“되살릴 수 있다면 살릴 겁니까?”
“못 그래요.”
“나는 분명 되살릴 수 있다면, 이라고 물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제나일 공작 자식아. 그럴 수 있다는 가정 자체가 의미 없다고! 불가능한 마법인 건 차치하고 이미 이 자리에 멀쩡히 살아 있으니까!”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나는 이제 안데르트가 아닌 데이지니까.
“안 돼요. 당사자인 안데르트가 절대로 바라지 않을 거예요.”
라파엘로의 표정에서는 미세한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10년 가까이 그와 함께한 나는 어렴풋이 알아챌 수 있었다.
그가 안도했다는 사실을.
‘무엇에 안도한 거지.’
상의 안쪽에서 작은 펜던트를 꺼낸 라파엘로가 내게 말했다.
“지금부터 들려줄 이야기는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기밀입니다.”
기밀? 와, 전혀 반갑지 않은 단어잖아?
덕분에 저 펜던트의 정체도 곧장 알아챌 수 있었다. 확신컨대, 맹세를 걸기 위한 마도구일 것이다.
공작씩이나 되어서 대놓고 비윤리적인 행위를 저지르다니. 라파엘로, 나는 너를 루 같은 남자로 키우지 않았는데!
“그래요? 세상에. 궁금해라. 하지만 가능하다면 나도 평생을 모르는 채 살고 싶네요. 기밀 같은 건 조금도 궁금하지 않거든요.”
라파엘로가 처음으로 피식 웃었다. 내가 기억하는 14년 전의 미소 그대로라 심장이 아주 살짝 간질거렸다.
“후회할 텐데.”
“후회쯤이야, 뭐. 항상 해 오던 거라서요.”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미안한데 나는 그 방면의 문외한이 아니에요. 살릴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아요.”
“아니, 살릴 수 있습니다. 영혼을 구속한다면.”
순간 머릿속이 번뜩였다.
영혼.
구속.
그리고 회생.
‘……그거, 지금 내 상태잖아?’
혼란을 눈치챈 라파엘로가 은근한 조소를 지으며 재차 물었다.
“이제 들을 마음이 생겼습니까?”
마음? 미안한데 내게 생긴 건 새로운 의심이다.
설마 내게 디안 케트의 심장을 먹인 게 라파엘로, 너였어?
‘아니, 아니야.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돼.’
그가 말한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방식’이 로궤의 심장 결정석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연관되어 있을 확률도 충분히 높아. 제나일 가문도 디안 케트의 유산을 찾고 있다고 했으니까.’
이건, 절대 내빼서는 안 된다. 라파엘로가 말하는 방식이 어떤 방식인지 반드시 알아내야만 했다.
“……기밀 유지를 약속하면 내게 그 대단한 비밀을 알려 주겠다는 건가요? 내가 뭐라고? 대단히 의심스럽군요.”
무뚝뚝한 표정으로 입꼬리만 끌어 올린 라파엘로가 능숙하게 받아쳤다.
“의심스러울 것 있나. 당신은 안데르트의 누이인 것을. 그런 소중한 존재에게, 내가 감히 덫을 놓을 리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