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안데르트 파거.
나는 리웨인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으며, 옆방에 자리해 있을 네 명의 남성을 떠올렸다.
한 명, 한 명이 역사의 위인으로 남을 마도 전쟁의 영웅들.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은 조합이라 여기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퀸 섬의 생존자로서 제나일 가문을 방문한 것이지, 마도 전쟁 군부 관련인으로서 방문한 게 아니다.
단순한 참관인일 뿐이라 해도 네 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는 것 자체가 나를 압박하는 모양새였다.
‘내가 안데르트 파거라는 명확한 증거를 찾은 건가?’
아니면 드셰로처럼 단순한 눈썰미로?
제나일 성에 도착한 이후.
나는 행동 패턴을 완전히 바꾸었다.
왼손잡이라는 걸 숨기지 않았고, 평범한 귀부인의 보석 귀걸이를 착용했으며, 걸음걸이, 사소한 몸가짐 모두 억지로 꾸며 내기보단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내보였다. 환절기용 의복으로 맹세의 흔적을 꼼꼼히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외에도 내 정체를 알아챌 방도가 과연 있을 것인가?
‘아니, 없어. 이건 확실해. 되살아나기 무섭게 미드윈트리로 올라갔었으니까. 나라는 인물 자체를 정밀 탐색하거나, 웨더우즈 구성원을 심문하는 방법 외에는 내 정체를 알아채지 못해.’
확신을 가지기 무섭게 리웨인이 내 답을 독촉했다.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군요.”
그럼 이자는 대체 무슨 근거로 나를 몰아세우는 것일까.
순수한 감?
“……너무 뜬금없는 질문이라,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나 싶어 머리를 좀 굴렸지.”
“대단한 속뜻은 없습니다. 제가 드리는 질문은 여쭌 바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자작님께서는 마도 전쟁의 영웅, 안데르트 파거입니까?”
나는 실내를 주욱 둘러보며 작게 코웃음 쳤다.
“시력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한 가지 짚어 주자면, 라파엘로의 검은 남성이고 나는 여성이야.”
“그 점은 저도 보면 압니다.”
“아는데도 묻는 이유는? 대단한 증거라도 찾아낸 건가?”
“자세한 사항은 기밀입니다.”
“아하. 마땅한 증거도 언급하지 못하는 주제에 안데르트 파거라고 묻는 거였어?”
나는 허리를 곧게 편 채 리웨인을 응시했다.
“그 말인즉, 경은 지금 내게 심문관이라는 권력을 휘둘러, 거짓 답을 강요하는 건가?”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 강요가 아니야?”
나는 작게 웃었다.
“강요가 아니라고…… 좋아, 대답하지.”
쾅.
“컥!”
나는 리웨인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원탁을 오른 다리로 올려 쳐 내 뒤집어엎은 후, 정면에 빈자리가 생긴 틈을 타 그의 목덜미를 잡고 벽 쪽으로 내던졌다.
“이게 내 답이야, 리웨인 경.”
숙련된 기사인 리웨인은 벽에 부딪치기 무섭게 자세를 가다듬고 발검하려 했지만.
“내가.”
안타깝게도 이쪽이 한발 더 빨랐다.
“안데르트 파거라면…….”
“크윽.”
리웨인은 내게 목이 졸린 상태로 벽에 쓸린 채 끌어 올려졌다. 나약한 귀부인의 팔목을 분지르려던 움직임도 오래가지 못하고 바닥으로 서서히 떨어졌다.
“너 같은 젊고 혈기 왕성한 기사의 모가지쯤. 한 손으로 비트는 건 일도 아니지 않겠어?”
구두라는 건 참 좋아. 체격 좋은 성인 남성과 나 사이의 신장 차도 줄여 주고.
나는 목 줄기를 쥔 손에 더 강한 힘을 가하며 친절하게 물었다.
“그래, 내가 안데르트 파거다. 이런 답을 원하는 건가? 그렇다면 이쪽도 묻고 싶은 게 있어, 리웨인 경. 영웅의 손에 죽어 가는 기분은 과연 어떠한지 말이야.”
총기 가득했던 눈동자가 서서히 흐릿해져 가는 게 보였다. 연민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죽일 생각도 없었으니까.
이런 상황까지 오자 강한 의문이 들었다.
‘라파엘로는 어째서 이런 어리숙한 기사를 앞세웠을까?’
나는 기본적으로 어린 기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마도 전쟁에서 날 가장 악질적으로 괴롭힌 놈들은 마귀도, 지휘관들도 아니었다. 바로 치기 어린 젊은 기사들이었다. 힘과 명예를 추구하는 젊은 기사들(대부분이 귀족 자제였다)은 검성의 눈에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조직적으로 날 따돌리고 괴롭혀 왔다.
물론, 과거의 경험을 리웨인에게 곧이곧대로 돌려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홧김에 리웨인을 내던진 게 아니다.
이건 일종의 경고였다.
리웨인이 아닌, 라파엘로와 참관인들을 향한 경고.
“제나일 공작에게 전해, 경. 이런 식으로 사람 기분 더럽게 떠보려 들지 말고, 할 말이 있으면 확실하게 하라고. 나도 나름 바쁜 몸이거든.”
이런 어리숙한 기사를 들이밀면서까지, 라파엘로가 내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의문이 더 짙어지려던 순간.
“웨더우즈 자작.”
기척도 없이 다가온 누군가가 내 턱 아래로 검을 들이밀었다.
“리웨인 경의 실례는 내가 대신 사과할 테니 진정하십시오.”
칼펜위버 후작.
검성과 한 몸처럼 움직이던 자. 마도 전쟁에서 가장 널리 이름을 날린 책략가.
“그의 목을 놓아준다면 지금 일은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천천히 손을 놓자, 깊게 숨을 들이켠 리웨인이 재빨리 내게서 물러섰다.
“콜록, 콜록.”
“……너무 방심한 것 같네, 리웨인 경. 나처럼 연약한 귀부인에게 목이나 졸리다니. 수련이 시급해 보여.”
알아들었으면 깝치지 마라.
눈빛으로 열심히 경고를 보내는데, 칼펜위버 후작이 우리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는 검을 갈무리한 후 리웨인을 향해 차갑게 명령했다.
“리웨인 경, 경은 밖으로 나가 대기해라.”
“알겠습니…….”
“후작 각하. 지금 일을 문제 삼지 않겠다니요?”
칼펜위버 후작에게 반기를 든 이는 외눈 검사, 라그휘르텐 백작이었다.
날렵한 인상의 칼펜위버 후작과 달리, 라그휘르텐 백작은 민간인이 마주치면 오줌을 지릴 만큼 사나운 인상을 지녔다. 그리고 나랑 동갑이다.
“리웨인 경은 순전히 심문에 임했을 뿐입니다. 물론 예정되지 않은 질문이 나오긴 했습니다만…… 그것이 상대의 목숨을 위협하거나, 본인이 위협당해야 할 수준의 실례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가녀린 나를 거칠게 쏘아본 외눈박이가 칼펜위버 후작에게 주저리주저리 지껄였다.
자기 쪽 사람만 챙기는 좀생이 심보는 여전하구나. 맞는 소리라서 할 말은 없네.
‘그건 그렇고. 내게 안데르트 파거냐고 물었던 건 독단적인 행동이었던 건가.’
조금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리웨인을 바라봤다.
대선배들이 넷이나 지켜보는 와중에 대단한 깡인데? 이건 좀 인정이야.
그런데 넌 무슨 근거로 그런 질문을 싼 거니?
“리웨인 경은 제국군 소속입니다. 군인을 위협하는 행위는 넓은 의미로 해석했을 때 테러 위협이나 다름없으니, 없던 일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로즈벨 백작?”
외눈박이 좀생이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문가에 서 있던 중년 남성에게로 향했다.
“……글쎄, 그보다는 웨더우즈 자작의 실력이 놀랍군.”
나는 알고 있다.
남성, 로즈벨 백작이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렇지 않나? 제나일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인 리웨인 경을 한 손으로 제압할 정도의 실력자라니. 기껏해야 스물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말일세.”
“…….”
“정말, 안데르트 파거라 해도 믿겠어.”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하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올해 여름에 퀸 섬에서 발견되고 웨더우즈 가문에서 하녀로 일했다고 하지 않았나? 한데 뒤늦게 웨더우즈 가문과의 인척 관계임이 밝혀지다니. 흔히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지.”
느릿하게 다가온 로즈벨 백작이 내게 요구했다.
“웨더우즈 자작. 실례되지 않는다면 자작의 손을 확인해 봐도 되겠나?”
“아니요.”
“부탁하겠네.”
언제나 느끼지만.
나는 노장에게 약하다.
어쩔 수 없다. 이들, 마도 전쟁의 노장들은 따지고 보면 내 검술과 삶의 스승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인 법. 그놈의 고운 손 때문에 드셰로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았던가?
나는 로즈벨 백작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은색 티스푼을 벽에 박아 버리는 묘기를 선보였다. (아무도 박수를 쳐 주지 않았다.)
“보셨죠? 손의 골격 가죽 따위가 어찌 되었든, 예상하신 대로 전 훌륭한 무인이랍니다. 결혼도 안 한 미혼 여성의 맨살을 함부로 확인하려 들면 안 되죠. 이 이상 깊은 탐색은 삼가 주세요.”
“……이런 실력자가 제국에 숨어 있었다니. 자작의 스승이 궁금해지는군.”
“궁금하세요?”
“아니라는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네.”
“비밀이에요.”
“아쉽군. 그럼 한 가지 질문만 받아 주겠나?”
“들어 보고요.”
“자작은 안데르트 파거와 어떤 관계지?”
정중한 물음이었다. 나는 똑바로 선 로즈벨 백작의 눈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지겹네요.”
이보다 더 신물 날 수 없다는 듯이.
“안데르트, 안데르트…… 그놈의 안데르트 파거. 죽은 지 4년이나 지난 옛 군인. 마도 전쟁의 영웅이라는 거, 그래요. 세상 모두가 알죠. 하지만 이미 오래전에 떠난 이 아닌가요? 내가 그자와 어떤 관계이면. 어쩌시려고요? 저를 통해 고인의 명복이라도 비시려고?”
명백한 조롱에 실내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는.”
로즈벨 백작이 한참 만에 입술을 뗀 순간.
“거기까지.”
뒤늦게 나타난 라파엘로가 축객을 놨다.
“지금부터 내가 직접 심문을 이어 가지. 웨더우즈 자작만 남고 모두 자리를 비우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