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장기간을 이동해 왔는데 쉴 틈도 주지 않는다는 건 몹시 불협한 대우였다.
이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자.
“죄송합니다, 자작님. 참관인 분들의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너른 이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리웨인은 능숙하게 맞받아쳤을 뿐, 개선할 여지를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재수 없고 깐깐한 웨더우즈 자작은 웃어넘길 마음이 쥐똥만큼도 없었다.
“그게 부탁하는 태도인가? 이해가 필요하다면 좀 더 간절해야 하지 않겠어? 무릎을 꿇는다든지.”
“자작님.”
진이 나를 말릴 동안 리웨인의 연두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깜빡인다. 내 말이 진심인지 농인지 판별하려는 시선이었다.
맞아, 나 농담 아니야.
왜냐하면 진상이거든.
다른 누구도 아닌, 아스트로사 왕국에서 만난 메데이스 후작이 내 롤 모델이다. 남의 눈치를 안 보고 우길 자신이 있었다.
라파엘로와 드셰로는 앞서 자리를 비운 참이다. 따라서 리웨인을 도울 수 있는 상사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리웨인은…….
‘이 녀석, 고민하지 않고 무릎을 꿇을 기세인데?’
내 예상이 옳았다. 주저 없이 무릎을 구부리는 리웨인의 시야가 단숨에 내려앉았다.
막상 그 꼴을 보고 있으려니 속이 답답해졌다. 메데이스 후작에게 천대받으면서도 당당히 제 주장을 굽히지 않던 예거시가 떠오른 것이다.
‘……하아.’
이것 봐. 못된 짓도 아무나 못 한다니까.
나는 곱게 접히려는 상대의 무릎을 구두코로 찍어 버렸다. 일순, 중심을 잃은 리웨인의 몸이 아주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나는 그의 턱을 힘껏 잡아당겨 올렸다. 마주치는 시선에 턱을 부드럽게 쓸며 웃었다.
“조심해야지.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잖아? 농담에 불과했는데 진짜 무릎을 꿇어서 이 웨더우즈 자작을 곤란하게 만들려던 건 아니겠지?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말이야.”
내내 인형 같았던 남자의 표정이 일순 어긋났다.
“안내해. 여섯 걸음 앞에서. 최대한 천천히.”
리웨인은 말없이 일어나 허리를 숙이고 등을 돌렸다.
그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채 느리게 뒤따르는 내게 진이 속삭였다.
“적당히 선을 지킬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네가 뭘 몰라서 그래.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거야.”
내가 똥이 되어야, 저런 도움도 안 되는 놈들이 알아서 피해 준다. 안타깝게도 난 되다 만 똥에 그쳤지만.
그게 뭔 개소리냐는 얼굴로 굳어 있던 진은 작게 헛기침하고는 조금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래도 훤칠하게 잘생기지 않았습니까? 제나일 기사단의 기사들 대개가 용모 단정으로 이름났지만, 리웨인 웍호드는 그중에서도 특출합니다.”
“너 은근히 얼굴 밝히는구나.”
“아니요. 제 취향이 아니라, 자작님과 나란히 서면 좋은 그림이 될 것 같아서 드린 말씀입니다.”
“그래? 나도 내 일격에 저 자식이 나뒹구는 꼴을 보면 조금 통쾌할 것 같기는 해.”
“하아…… 그런 의미에서 드린 말씀도 아닙니다. 이번 외출의 부차적인 목표를 벌써 잊으신 겁니까?”
……아?
그러고 보니.
“주인님께서 새로운 웨더우즈 자작이 되신 만큼, 가주로서의 의무도 지키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결혼과 후계 문제가 있겠죠.”
“나도 야매로 가문을 이은 마당에 후계가 무슨 소용이야?”
“그래도 결혼은 하셔야 합니다. 당장 어렵다면 약혼이나 염문설이라도 뿌리셔야 해요.”
“왜?”
“그게 멀쩡한 귀족 가문이니까요!”
그렇다면 제나일은 맛이 가 버린 귀족 가문이겠네.
아무래도 하녀장은 결점 없고 평범한 웨더우즈 가문에 대한 환상을 가진 듯싶었다.
‘……뭐, 못 들어줄 건 없는데.’
보여 주기식 결혼이야 치를 수 있다. 하녀장의 말대로, 내게는 그럴 의무가 있었으니까.
문제는 루가 마음에 걸린다는 점이다.
‘루가 허락할까?’
자문하고도 우스웠다.
허락하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내 인생은 나만의 것. 타인이 감히 이래라저래라 훈수……라기에는 빚을 너무 많이 지긴 했네.
나는 괜히 복잡해지려는 사념을 내던지고, 저 멀리 나아가는 리웨인의 등을 살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쁘지 않아.’
오히려 괜찮은 편이지.
검사로서 완벽한 골격. 곧은 자세. 편안한 목소리. 진중한 눈빛. 깔끔하게 차려입은 옷차림. 거기에 웬만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까지.
‘저게 내 남편 후보 1번.’
나쁘지 않을지도?
‘그런데 나쁘지 않으면 뭐 해. 이렇게 쓰레기처럼 구는 나랑 결혼할 남자가 있겠냐고.’
나는 턱을 긁적이며 진에게 물었다.
“라파엘로의 신임을 받는 기사라고 한 것 같은데. 굳이 눈여겨볼 필요 있겠어? 내 입장에선 불편하기만 할 거야.”
우리는 리웨인의 귀에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 아침 신문으로 확인했는데, 최근 웍호드 가문이 재정난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군법 위반으로 장원 대부분을 황실에 몰수당했다는군요.”
“무슨 소리야? 제아무리 황실이라 한들 번듯한 귀족 가문의 장원을 몰수할 권한은 없어.”
“이번은 경우가 특수합니다. 웍호드는 장원의 절반이 마도 전쟁 이후 분배받은 땅입니다. 이 땅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기존 장원도 같이 빼앗아 버린 모양인데, 본보기성이 강하죠.”
“본보기성이라니, 어떤 의미의?”
“제나일파에는 마도 전쟁에 참전하여 영지 재분배 등의 수혜를 받은 귀족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황제파에는 마도 전쟁에 비참전한 귀족들이 많은데, 전부 영지 재분배의 수혜를 받지 못했죠.”
진이 설명하기를.
마도 전쟁 이후 수혜파가 분배받은 영지는 주인을 잃은 영지들이다.
선황이 타계하기 전이었던 이 시기에는 참전 가문 대우가 극진했으며, 선황 타계 후에는 라파엘로 제나일을 중심으로 참전 가문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고 한다.
“아슈네이케 폐하는 즉위 과정에서 침묵파(마도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가문) 세력의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떻게든 빚을 갚아야 하죠. 제나일파에게 분배됐던 영지를 다시 빼앗아서 침묵파에게 선물하면 황제 당신이 당장 잃는 것도 없고, 정적까지 견제할 수 있으니 최적의 수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마도 전쟁 수혜파와 비수혜파, 그리고 참전파와 침묵파에 관한 이야기는 블랙라갈호에서 대강이나마 전해 들은 기억이 있었다.
‘종전 과정에서 아슈네이케가 침묵파를 등에 업고 득세한 건가…….’
나타샤가 황위를 잇지 못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웍호드 가문에 돈이 떨어졌으니 허리띠를 졸라매기 위해 자제들을 전부 결혼 시장으로 내몰 거란 뜻이야?”
“예, 이왕이면 가문에 도움이 될 상대로 고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 상대로 내가 딱이기는 하겠다. 젊고, 여자고, 황제파가 아닌 데다, 귀족회 소속 가문의 수장이니까.
리웨인은 2층 계단과 가까운 방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진을 향해 말했다.
“진 버클리그레이튼 경은 바깥에서 대기하…….”
“진 버클리그레이튼이 아니라 진입니다. 웨더우즈 자작님의 보좌관이죠.”
“죄송합니다. 보좌관께서는 이곳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마뜩잖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 진이 내게 당부했다.
“문제가 생기면 저를 부르십시오, 자작님.”
끼익. 열린 문 안쪽에는 아늑한 소형 응접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안의 원탁을 둘러싼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로즈벨 백작.
칼펜위버 후작.
라그휘르텐 백작.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파엘로.
이들 모두 10년 전 전쟁터를 호령했던 마도 전쟁의 영웅들이었다.
‘……왠지 불안하다 싶었더니.’
이건 너무 살벌한 조합이지 않은가?
‘그런데 검성은?’
이런 조합에 검성이 없다니 이상했다. 단순히 시간이 나지 않아서 불참한 것일까?
“이번 심문에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하신 분들입니다. 이쪽은 로즈벨 백작님, 칼펜위버 후작님, 라그휘르텐 백작님이십니다.”
나는 차가운 눈으로 선 로즈벨 백작(웨더우즈 가문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충분히 비호의적일 만하다)을 시작으로 한 명씩 차례로 악수를 나누었다.
“만나서 반갑네, 웨더우즈 자작.”
“사정은 방금 전해 들었습니다. 그레이 웨더우즈 자작의 뒤를 이어 웨더우즈 가문의 수장이 됐다지요? 축하드립니다.”
“젊군요.”
안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무어라 대화를 나눌 틈도 없이 네 명 모두 옆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도구를 통해 이 방에서의 대화를 전해 들을 예정이라고 했다.
‘분위기가 춥다 못해 얼어 버릴 정도네.’
리웨인은 나를 텅 빈 원탁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탁상시계 모양의 마도구를 원탁 한가운데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자작님의 성함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 결국 시작인가.
나는 의자 등에 편히 몸을 기댄 채 답했다.
“데이지 웨더우즈.”
“감사합니다. 질문을 이어 가겠습니다. 자작님은 약 석 달 전 퀸 섬에 등장해 주둔군과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베르티 루샨’으로 소개했습니다. 맞습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자작님은 베르티 루샨 당사자가 아니었으므로 이는 신분 위조에 해당합니다. 더불어 ‘데이지 파거’라는 이름도 본명이 아니지요. 인정합니까?”
조금 찝찝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자작님의 용모와 퀸 섬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서 조사하기를, 자작님은 파거 가문의 일원이었으며 친부인 기드 파거와 친모인 아이린 파거를 여읜 후 남동생과 단둘이 살고 있었습니다. 맞습니까?”
오랜만에 듣는 이름들이다.
나조차 잊고 있었는데…… 가능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작님에 관한 기록과 증언은 14년 전 퀸 섬 사태 직후까지만 남아 있습니다. 퀸 섬 사태에서 전사한 남동생을 뒤따라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소문, 몰래 퀸 섬을 탈출했다는 소문, 남동생의 신분을 이용해 입대했다는 소문 등이 돌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중에 맞는 소문이 있습니까?”
무언가 이상하다.
이들은 이미 내 형제가 안데르트 파거이며, 마도 전쟁의 영웅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퀸 섬 사태에서 전사한 남동생’이라고?
‘미끼인가?’
미끼라면 무엇을 위한 미끼인 거지?
꺼림칙한 기분에 답을 미루자, 리웨인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입술을 뗐다.
“데이지 웨더우즈 자작님.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거짓이 아닌 진실만을 답해 주십시오.”
이 시점.
나는 리웨인이 당연히 ‘당신은 안데르트 파거의 친누이입니까?’라고 물을 거라 여겼다.
이는 마땅한 예측이다. 퀸 섬 주민들을 통해 조사했다면 눈에 뻔히 보일 사실이지 않은가?
그러나 이어진 질문은 내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자작님은 마도 전쟁에 참전해, 전쟁을 승전으로 이끌고 선황 폐하로부터 블라디에프 백작 작위를 수여받은 안데르트 파거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