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08화 (108/195)

108화

드셰로와 함께 마차에 오른 나는 ‘데이지 파거’가 웨더우즈 자작으로서 활동하게 된 대강의 경위를 설명했다.

물론 제아무리 오랜 동료라고 한들, 그에게 속 깊은 사정까지 알릴 수 없었다. 단지 웨더우즈 가문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고 설명했을 뿐.

진은 드셰로가 내 정체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눈을 하면서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현명한 태도다. 진이 입을 열어서 필요 이상의 정보를 풀어내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그래서, 라파엘로에게는 내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했지?”

“당신이 외부인이기 때문에 자세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나도 안다, 드셰로. 말대답하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그 말투는 정말 적응하기 어렵군요. 당신이 요구했던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일단은요.”

“……‘일단은요’는 뭐야?”

반문에도 드셰로는 가볍게 어깨만 으쓱였다. 뭘까, 불안하게.

찝찝한 말미를 남긴 그를 탐색하는 와중에도 마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마차 안은 조용했다.

드셰로는 드셰로대로 상념에 빠져 있었고, 나는 나대로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하느라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종전 4년. 서로의 세계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다는 게 피부에 와닿았다.

반갑지 않은 현실감이 몰려오는 느낌이다. 나는 억지로 생각을 전환시켰다.

‘라파엘로가 퀸 섬 출신의 데이지 파거를 심문하려는 건, 순전히 생존자를 감시하는 의무를 지녔기 때문일까?’

상대가 상대여서 그런지 아까부터 마음이 편치 않다. 밤을 새운 상태에서 은근한 긴장감이 유지된 탓에 피로감도 적잖았다.

‘일단…… 긴장을 풀 필요가 있어. 오늘 바로 만날 가능성은 낮아.’

웨더우즈 가문은 귀족회 소속이나, 지난 수년간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아 정치계 및 사교계에서 입지가 좁아진 실정이다.

게다가 웨더우즈 자작 부인(루)은 라파엘로의 명령 아닌 요구를 은근슬쩍 회피해서 웨더우즈 자작을 보냈다.

보통 이런 경우엔 웨더우즈 가문의 기를 누르기 위해서라도 며칠 찬바람을 맞춘 뒤 얼굴을 보여야 했다.

왜냐고? 그게 바로 귀족들의 에티켓이자 기 싸움이거든.

문제는 라파엘로가 그럴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었지만.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습니까?”

나는 의자에 널브러지듯 누운 자세 그대로 눈동자만 슬쩍 굴려 드셰로를 쳐다봤다.

“어쩔 수 없어. 잠을 못 잤으니까.”

“설마 긴장한 겁니까?”

“글쎄…… 긴장은 둘째 치고, 한 가문의 수장이 된 시점에 머저리처럼 움직일 수는 없으니까.”

“……그 자리에 진심인가 보군요.”

그 자리? 웨더우즈 자작이라는 위치를 말하는 건가.

“진심이 아닐 이유가 있어?”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그럼?”

“단지 우리 사이에 긴 시간이 흘렀음을 몸소 깨달았을 뿐입니다. 한 가문의 주인이 된다는 건 영원히 얽매인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당신이 그런 선택을 하는 날도 다 오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런가.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죠.”

문이 열리고, 앞서 내린 드셰로가 나를 에스코트했다. 나는 싱긋 웃으며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난 내 보좌의 에스코트만 받아. 쓸데없는 참견 말고 저리 치워.”

“……하아.”

“뭐 하는 거지, 보좌? 빠릿빠릿하게 못 움직여?”

“죄송합니다, 자작님.”

진은 나에게 구박받는 역에 꽤 진심인 듯하다.

나는 발을 접질리지 않기 위해 조심히 땅을 밟았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렸을 때.

“이건 또.”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예상치 못한 그림이군.”

라파엘로.

호흡을, 아주 잠시 멈출 뻔했다.

행동도 마찬가지다. 못된 짓을 하다가 걸린 사람처럼 몸이 꽁꽁 얼어 버렸……지만 바로 풀었다. 위축된 것처럼 보이기 싫어서.

‘이렇게 바로 얼굴을 보여 준다고?’

예상 밖인데.

진이 내 손을 꽉 부여잡는 게 느껴졌다. 나보다 더 긴장한 듯했다.

라파엘로가 무엇에 관해 ‘예상치 못한 그림’이라 표현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아마 그레이 웨더우즈가 아닌 하녀 데이지가 직접 움직였다는 점이 의외이지 않았을까.

무심한 눈으로 아주 잠시간 내 얼굴을 훑던 그는 드셰로를 바라봤다.

답을 요구하는 시선에, 드셰로는 전혀 기죽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웨더우즈 자작을 맞이하러 간 후에야 알았습니다.”

“웨더우즈 자작?”

“예. 데이지 파거……로 알고 있던 여인의 신분이 사실은 웨더우즈 핏줄이었다는 이야기죠.”

라파엘로의 선명한 적안이 나를 향했다.

그에게서 이토록 차가운 시선을 마주할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찌나 무정한 눈빛이었는지, 등골이 조금 오싹해졌다.

“그의 주장이 맞습니까?”

나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턱을 치켜올린 후 고개만 살짝 까딱였다.

칭찬해 줄 줄 알았던 진이 이번에는 불안한 눈으로 나를 살폈다. 상대를 봐 가면서 쪼는구나. 똑똑하네.

라파엘로는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갑작스럽군. 가주직이야 넘길 수 있다 쳐도, 그레이 웨더우즈 본인은 충분히 방문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정해 둔 거짓말을 술술 뱉었다.

“건강이 원체 위독하셔서요. 골로 갈 날만 앞두고 있으니 편히 쉬게 두세요. 어쨌든 조사 대상이 직접 왔으니 상관없지 않나요?”

“진 버클리그레이튼까지 대동할 줄도 몰랐고.”

“그 점이야말로 그쪽이 상관할 일은 아니죠.”

라파엘로의 잘생긴 미간에 옅은 주름이 졌다. 내 신랄한 어투가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

하지만 이내 곧 무표정으로 돌아와 등을 돌린 채 앞서 걸었다.

“따라오십시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너른 등을 뒤따랐다.

‘좋아, 이걸로 당장의 큰 산은 넘었어.’

사실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기는 했다.

라파엘로는 갑작스레 변한 웨더우즈 가문의 사정에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내가 웨더우즈 가주가 되든 말든, 결국은 지극히 개인적인 집안사에 불과한 까닭이다.

웨더우즈 가문의 위신을 떨어뜨리려는 목적이 있지 않는 이상, 라파엘로는 내 신분에 트집 잡지 않을 것이다. 애초 그럴 성격도 못 됐고.

성내로 이동할 거란 예상과 달리 라파엘로는 우리를 본성 뒤편 별관으로 안내했다.

‘……연무장?’

아무래도 이 별관은 제나일 기사단의 본관인 듯했다. 군데군데 보이는 백색 제복 때문인지 제나일 공작성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구경이라도 시켜 주려는 참인가.’

하녀장의 말에 따르면, 제나일 가문과 버클리그레이튼 가문 소속 기사들은 군 특수부대에 속한다고 했다.

특이점이 있다면 군 통솔권은 황제가 소유하나 이 두 특수부대의 통솔권만은 각 가문의 수장과 양분한다.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은 제국의 가디언이라는 특수성 때문이고, 제나일 가문은 제도와 북대륙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특수성 때문이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꽤 보이네.’

조금도 흥미롭지 않은 척하며 기사들의 얼굴을 샅샅이 훑을 때였다.

빠른 걸음으로 저 멀리 나아간 라파엘로가 젊은 기사의 보고를 받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옆의 진이 속삭였다.

“리웨인 웍호드입니다. 웍호드 자작 가문의 삼남인데, 어린 나이에 대위를 달았고 현재 제나일 기사단 소속입니다. 전도유망한 검사죠.”

“……너보다 강해?”

“아니요. 하지만 제나일 공작의 적잖은 신임을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라파엘로의 신임이라. 대충 어떤 인물일지 가늠이 갔다.

내 곁으로 돌아온 라파엘로가 리웨인을 내게 소개했다.

“인사 나누시길. 이쪽은 제나일 기사단 소속의 리웨인 웍호드입니다. 리웨인? 이쪽은 데이지 웨더우즈 자작님이네.”

금발의 훤칠한 미남인 리웨인이 나를 응시했다.

뭘 저렇게 노려보나 싶었더니, 내가 손등을 건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하마터면 습관대로 악수를 청할 뻔했다.

나는 내키지 않은 척하며 툭, 손등을 내보였다.

“좋은 날씨입니다, 웨더우즈 자작님. 리웨인 웍호드입니다.”

누가 봐도 까칠한 태도였는데 언짢은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음.”

침착한걸? 마음에 들어. 게다가 검사로서 완벽한 골격을 타고났네. 라파엘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호의의 눈길로 살피고 있을 때, 리웨인은 일말도 흥미롭지 않은 뒷말을 덧붙였다.

“더불어 오늘 자작님의 심문을 맡았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심문?

라파엘로가 아닌 리웨인을 상대하게 되는 건가? 내 입장에서 환영할 일인 건 차치하고.

“심문이라. 듣기 불편한 단어네, 웍호드 경. 그렇지?”

“자작님께서 불편하시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편안히 진행하겠습니다.”

리웨인은 내가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든 말든 평온하기만 했다. 침착한 성정이 마음에 든다는 거 취소다.

아랫사람에게 성을 내 봤자 무얼 하나 싶어, 라파엘로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싫은 소리를 내뱉었다.

“첫 만남 때부터 알았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제멋대로시네요.”

물론 이쪽은 리웨인보다 더 침착하다.

“오늘 자작과의 일정은 군사 및 정치적인 관점에서 중요도가 높습니다. 따라서 나와 리웨인 경을 제외한 일부 참관인도 함께할 겁니다. 리웨인, 웨더우즈 자작님을 모셔라. 곧바로 심문을 시작하지.”

“예.”

어째, 예상보다 일이 더 커지는 기분인데.

느낌이 좋지 않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