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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07화 (107/195)

107화

“황족 출신인 게 도움이 될 때가 다 오네요. 게다가 말리콥스 님 덕택에 장부가 꽤 두둑해졌어요. 당분간은 자작님의 품위 유지를 위한 가을 및 겨울 의복 여러 벌과 저택을 새 단장 하는 데 신경 쓸 예정입니다.”

아닌 척해도 오늘의 하녀장은 꽤 신나 보였다.

새 인력을 고용하고 멋진 가구를 사들일 미래가 기대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날 꾸밀 때의 눈이 최상의 식재료를 발견했을 때처럼 반짝였다.

“그런데 루 씨는 언제 돌아오는 건가요?”

“……언젠가?”

“저택을 새 단장 하려면 새로운 요리사와 정원사가 필요할 거예요. 다른 집안이야 하녀나 하인이 도맡는다지만, 우리는 엄연한 귀족 가문이니까요.”

며칠까지만 해도 다 같이 나눠 했으면서.

마지막으로 베일이 달린 보닛을 내 머리에 씌워 준 하녀장이 만족스레 웃었다.

‘빨리 안 돌아오면 내쫓아 버리겠다, 이거구나.’

사실 루가 돌아오더라도 고용인 일을 계속할지 의문이다. 그래도 명색이 칼레파이지 않은가?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섰을 땐, 웬일로 근사하게 차려입은 말리콥스가 1층에 내려와 있었다.

“오, 이런.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지 뭔가? 정말 아름답네, 가주. 그 누구도 자네가 하녀, 아니, 군인…… 영웅 출신이란 것을 생각하지 못할 게야.”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현관을 나섰다.

정문을 지나쳐 마차에 오르기 직전. 살짝 고개를 돌려, 화단 안쪽에 소담히 핀 하얀 꽃밭에 시선을 뒀다.

로궤로 떠나 있는 사이에 내가 심어 두었던 데이지 꽃은 소리 소문 없이 진 후였다.

‘……저 꽃이 다 필 때쯤, 루가 자신의 정체를 알려 준다고 했었지.’

결과만 따지면 거짓말은 아니게 됐다. 로궤에서 그의 정체를 알게 됐으니.

뒤따라 나온 하녀장과 말리콥스가 나를 배웅했다.

“무탈하게 다녀오세요, 주인님.”

“다녀오게, 웨더우즈 자작.”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진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나는 웨더우즈 자작, 데이지.

오늘부로 하녀 일은 작별이다.

이번 일정에 내게 주어진 여유금은 많다 못해 넘칠 정도로 풍족했다.

하녀장이 귀족으로서의 체면을 중시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나는 제나일 가문까지 이동하는 데 비행정이 아닌 열차를 골랐다.

‘비행정은 이제 질릴 만큼 탔어.’

내가 오른 열차 칸은 일반 열차 좌석 값의 7배를 지불해야 오를 수 있는 귀빈 전용 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웨더우즈 자작님. 저는 이번 열차의 기장인 로우드 메든이라고 합니다. 자작님을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열차 한쪽에 자작님을 위한 승무원이 항시 대기 중이므로, 크고 작은 불편 사항이 있으시다면 곧장…….”

무려 ‘웨더우즈 자작’이 쉴 공간이라고 알려 두어서일까? 기장까지 직접 나와 자신을 소개하고 짧은 담화를 마친 후 떠났다.

나는 그런 기장과 눈도 안 마주치고 내내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탁.

그리고 객실의 문이 닫히기 무섭게 보닛을 풀고 내던졌다.

“후우.”

시중을 위해 뒤따라온 진이 보닛의 짓눌린 레이스를 정갈하게 펴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직 미드윈트리도 벗어나지 못했는데 벌써 지치시면 안 됩니다.”

“나도 알아.”

“그런 식으로 순순하게 대답하시면 안 됩니다, 자작님. 하녀장님의 조언을 잊으셨습니까?”

장갑을 벗으며 진을 흘겨봤다.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까지 피곤하게 굴래?”

“사람은 안과 밖이 같아야 합니다. 그렇게 허술하게 구시면 필시 난감해질 상황이 올 겁니다.”

“시끄러. 주제넘게 참견하지 마.”

“훌륭하십니다.”

얄밉게 엄지를 올린 진이 객실에 비치된 신문을 집어 들었다.

이게 다 하녀장 때문이다.

기실, 어젯밤 제나일행 관련 회의에 들어가면서 내가 처한 상황을 깔끔하게 설명해 둔 참이다.

“완벽하게 남남으로 숨길 건 아니고, 영웅 안데르트의 누이로 소개할 거라고요? 흐음. 우리 가문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계책이네요. 그러나 확실히 준비해 두고 가는 게 좋겠어요. 제나일 공작은 무서울 정도로 감이 좋으니까…… 의심받을 수 있는 상황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게 좋겠죠.”

그 결과로 나온 게 바로 ‘재수 없고 까칠한 웨더우즈 자작’ 콘셉트이다.

애초 대하기 껄끄러운 인물이 되어, 깊은 대화를 원천 차단하자는 의도였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묻자, 하녀장은 “그러고 보니 영웅 안데르트는 호쾌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데, 지금의 자작님은 어쩜 그렇게 제멋대로…… 아니, 독특한…… 아니, 개성 있으신 거죠? 어느 쪽이 진짜 성격인 거예요?”라며 혼란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맞받아쳤다.

‘어느 쪽이 진짜 성격이냐고?’

그런 건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사실 안데르트 파거 때는 나름 내 동생처럼 행동하려고 애썼다.

사소한 습관, 사고, 성격……. 한데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내 본래 성격과 적절히 융합됐고 지금의 영웅 안데르트가 탄생했던 것 같다.

‘반대로 지금은 살짝 고삐가 풀린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언제까지 살지 모르는 시한부가 되었잖아? 어느 정도는 될 대로 돼라, 하는 식의 마음가짐을 지닐 수밖에 없다.

“조금 주무시는 게 어떻습니까? 자작님.”

신문을 읽던 진은 넋이 나간 내 표정을 보곤 넌지시 제안했다.

“새벽 내내 하녀장님으로부터 식사 매너를 비롯한 에티켓을 전수받으셨잖습니까.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보좌, 내 눈 많이 흐리멍덩해?”

“예.”

“다행이네. 더 재수 없어 보일 거야.”

“아, 그건 그렇겠군요.”

진은 내 보좌가 되겠다고 운운한 순간부터 사교계와 귀족 사회 쪽으로 큰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집사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제 검술 수련이 끝난 남은 시간에 사회와 시사를 공부했다.

식기를 닦을 시간에 서점에서 구해 온 <에티켓 북>을 읽었으며 화단에 물을 줄 시간에 하녀장으로부터 귀족회 정보를 습득했다.

물론 진에게도 그렇게까지 해야겠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제가 가장 잘하는 일이 검을 휘두르는 일인데. 정작 자작님께 도움 되는 실력은 아니지 않습니까? 항상 받고만 살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저도 자작님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펜 로타의 사교계…… 꽤 재밌더군요.”

당연히 재밌겠지. 세상에서 가장 자극적인 스캔들이 모이는 곳인데.

“오늘 저를 대신해서 집사직을 맡을 분이 들어온다던데…… 자작님도 아시는 분입니까?”

“응.”

“누구인가요?”

“있어. 집사 암살자.”

“……암살자?”

집사 암살자뿐만이 아니다.

말리콥스의 하녀였던 레냐와 임시직이었던 산적 하녀는 이제 완전히 웨더우즈 가문의 소속 하녀로 배치됐다. 집사 암살자 지휘 아래 일하던 시종들 역시 웨더우즈 가문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황녀 출신 하녀장, 로궤 스파이 출신 장로, 공작가 후계 출신 진, 암살자 출신 집사, 기타 등등 사나운 녀석들…….’

하나하나 얼굴을 떠올리자 한숨이 절로 나온다.

좀…… 위험한 거 아닌가?

나 이런 가문의 주인이 되어도 되는 거야?

원래 귀족들은 이런 답 없는 집안을 꾸려 나가는 거냐고.

“요즘 이 기사가 눈에 띄는군요. 황제파와 제나일파의 세력 다툼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최근 제나일파 가문 한 곳이 군법 위반으로 장원 대부분을 몰수당했다는데…….”

나는 멍하니 창밖을 응시한 채, 진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잠깐이라도 잠들고 싶지만 쉽지 않았다. 정말 루가 없어서인 건지…….

그렇게 기나긴 8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제나일 공작 가문이 터를 잡은 대도시, 올랑 루즈에 도착했다.

* * *

올랑 루즈.

제도 라갈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이곳은 문화와 향락의 요람으로 불린다. 비교적 산세가 약한 북데우스산맥과 인접해, 북대륙 국가들과 깊은 교류를 나눠 온 역사가 지금의 올랑 루즈를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올랑 루즈 역사부터 역사 인근 광장 분위기까지, 아스트로사의 풍경과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느낀 올랑 루즈의 첫인상은 이랬다.

‘라파엘로와 가장 안 어울리는 도시.’

그 성격에 이런 도시를 주무르는 대귀족이 되다니. 역시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올랑 루즈에 도착했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웨더우즈 자작님.”

승무원의 인사를 무시하고 역사를 나오자, 계단 코앞에 휘황찬란한 마차가 한 대 보였다.

그리고 그 마차 앞에 묵묵히 서 기다리고 있는 익숙한 낯.

“안녕, 드셰로.”

이 자리에 나타난 걸 봐선, 내가 로궤로 떠난 후 곧장 귀국한 모양이었다.

“……데이지?”

놀란 눈으로 주위를 살핀 드셰로가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어째서 당신이 직접 온 겁니까? 웨더우즈 자작이 직접 방문하기로 예정되어 있을 텐데요?”

입에 모터가 달린 것처럼 빠르게 뱉어진 말이었다.

나는 ‘재수 없고 깐깐한 웨더우즈 자작’으로서, 라파엘로 공작의 보좌관이자 간자인 그에게 답했다.

“네가 알 것 없다. 닥치고 나를 제나일까지 모셔라.”

“…….”

드셰로의 표정이 굳었다.

힐긋 진을 쳐다보자, 반짝이는 눈으로 만족스런 미소를 보인다.

이거,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꽤 뿌듯한걸?

우리 둘을 말없이 응시하던 드셰로의 눈가에 짙은 피로가 덧씌워진다.

하아아아. 천만 번째 한숨을 내쉰 그가 이마를 짚었다.

“대체. 또 무슨 짓을 벌이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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