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아슈네이케라면…… 나타샤가 종종 말했던 그 몸 약한 황자 아니었나?’
황녀인 나타샤의 형제는 보통 두 부류로 분류할 수 있었다.
나타샤가 ‘쓰레기’라 칭하는 부류와 ‘혈연’으로 칭하는 부류.
이나스타샤라는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슈네이케라면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타샤가 형제들 틈에서 짓눌리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형제로서 돌봐 주었던 유일한 황족이었던 까닭이다.
‘그자가 황위에 올랐구나.’
그러고 보니 나타샤는 어디로 간 걸까. 왜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지?
“하녀장은 그럼 나타샤와도 알아?”
하녀장은 새침한 눈초리로 나를 흘겨봤다. 그다지 마음에 드는 화제가 아니었나 보다.
“멍청한 질문이군요. 그래도 명색이 형제인데 모를 리가요. 제 순서는 끝났으니 진 양? 다음을 부탁하겠습니다.”
진이 특유의 올곧은 시선으로 우리를 둘러봤다.
“저는 진입니다. 말도 못 하던 어린 시절에 동생과 함께 버려졌고, 그래서 성도 없습니다. 대마법사 메피스토를 죽이겠다는 목표 하나만으로 검을 배웠으며 결국 검귀의 길에도 발을 디뎠습니다.”
“……검귀?”
하녀장이 다소 경계심을 띤 시선으로 진을 살폈다.
“자칫하면 이성을 잃을 수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맞습니다.”
“아직도 검을 배우는 건가요?”
“예.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이 내게로 고개를 돌리자, 나머지 둘의 고개도 나를 향했다.
“선배님이라면 저를 저지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까 전에는 말하지 못했지만.”
작게 헛기침을 한 진은 다소 작아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아스트로사를 다녀온 후…… 선배님과 함께하면 더 먼 세상을 구경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웨더우즈의 집사로 머무는 지금이 좋습니다. 특별하거나 이상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처럼 느껴져서…….”
말은 어영부영 끝났다.
말리콥스의 얼굴에서는 의아한 기색이 사라지지 않았으나, 하녀장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대단할 것 없는 몇 마디였는데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가 눈에 띄게 수그러져 있었다. 마치 깊게 공감하는 양.
“이번에는 데이지 양 차례일세.”
세 쌍의 눈빛이 내게로 모아진다.
‘고마워, 하녀장.’
당신 덕택에 내 과거를 밝혀도 반응이 뜨뜻미지근할 것 같아. 역시 비밀 중의 비밀은 숨겨진 태생이지.
“내 이름은, 모두가 알다시피 데이지 파거야. 퀸 섬 태생이고, 안데르트 파거라는 이름으로 마도 전쟁에 참전했어.”
드셰로에게 한번 들킨 후여서 그런가?
수개월 동안 기를 쓰고 숨겨 온 비밀인데도 어렵지 않게 술술 뱉어졌다.
“마지막에는 메피스토와도 한탕 했지. 죽었지만.”
“……지금 한 번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건가?”
“안데르트…… 파거라고요?”
“예?”
셋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하기야, 죽었던 사람이 멀쩡하게 살아 있다고 하면 나도 놀라 까무러치겠다.
“과거형이야. 죽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죽은 게 아니었더라고. 4년간 잠들어 있다가 몇 달 전에 눈을 떴고, 몸에 문제가 생겨서 대처법을 찾기 위해 미드윈트리까지 흘러들어 왔…….”
“잠깐, 잠깐만요.”
하녀장이 다급하게 내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의 진짜 이름이, 안데르트 파거라고요?”
“따지자면 진짜 이름은 아닌데…….”
“다른 안데르트 파거가 아니라, 라파엘로의 검이자 연합군의 영웅인 안데르트 파거?”
“죽고 살아나 보니까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 같기도…….”
“메피스토를 죽인 디어사이드(신을 죽이는 자) 안데르트 파거?”
아니, 그런 낯부끄러운 별칭은 좀. 어떤 빌어먹을 새끼가 만든 건데?
언짢은 기분에 대답하지 않자 말리콥스까지 나서서 내 정체를 의심했다.
“믿기지 않는군. 자네가 정말 영웅 안데르트 파거라는 겐가?”
“데이지 양, 설마 지금 우리와 말장난하는 건가요?”
“안데르트 파거는 남성이었네. 한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까지 했지. 조금 먼 거리에서였지만.”
“그분은 호쾌하며, 정직하고, 예의가 바르지만 친근하며, 언제나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위트 있는 분이라 했어요. 화술도 뛰어난 건 물론이죠. 데이지 양일 수가 없어요.”
“영웅과 똑같은 이름의 연합군 출신인 게 아닌가?”
이런, 의심이 많아도 너무 많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행동으로 직접 보여 줄 수밖에.
파지지직.
나는 진주 검을 뽑아 들며 진을 바라봤다.
“어때, 진 한판 할까? 영웅 안데르트 파거께서 네 조악한 검술을 상대해 주마.”
진이 바짝 마른 혀로 입술을 훑었다.
“한 수 배우겠습니다.”
“아니, 잠깐! 이 작은 방에서 어떻게 싸우겠다는……!”
우리는 서로의 검을 휘둘렀다. 가장 가볍고 진중한 한 수를.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커흑!”
진은 횡으로 그려진 검격 한 번에 먼지처럼 날아가, 벽에 처박히고 쓰러져야 했다. 힘을 적잖이 줘서 그런지 잠시 정신을 잃은 진의 입가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죄책감이 좀 들지만 어쩔 수 없다. 사람들은 원래 좀 과격하게 굴어야 얌전해지거든.
“이제 좀 믿을 마음이 생겨?”
‘그’ 진 버클리그레이튼을 한 수에 쓰러뜨렸는데, 못 믿으면 더 난감해진다.
“나, 안데르트 파거야. 피의 맹세에서는 거짓말 못 하는 거 알지?”
영혼이 빠진 눈으로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하녀장이 느릿느릿 입술을 뗐다.
“사.”
“사?”
“사, 사인을…….”
뭐? 사인? 연극배우나 가수들이 종이에 그리는 그거?
“그딴 거 없는데.”
거부하기 무섭게, 바닥에서 벌떡 일어 선 진이 내게로 달려왔다.
“안데르트 님! 한 수 더 가르쳐 주십시오!”
“그, 주인님. 사인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잠깐. 다들 진정하게. 더 중요한 일이 있어. 이보게, 웨더우즈 자작.”
고맙게도, 말리콥스가 직접 나서서 난동 부리는 고용인들을 진정시켜 주었다. 그는 옅은 경악과 의문이 서린 얼굴로 내게 조심히 물었다.
“혹시…… 자네의 정체를 우리만 아는 겐가? 당장 내일 만나게 될 라파엘로 제나일 공작은? 그도 아는가?”
말리콥스의 지적은 아주 훌륭했다.
“아니, 몰라.”
라파엘로야말로 지금 내게 당면한 최고의 문제거든.
“그렇다면 한 가지를 더 묻지. 앞으로도 계속 과거를 숨길 생각인가? 아니면 머지않은 언젠가 다시 세상에 나타날 예정인가?”
세상에 나타나다라.
멋진 표현이다. 그와 동시에 나와는 조금도 인연이 없는 문장이기도 했다.
나는 긍정이나 부정을 하지 않았다. 대신 바닥을 나뒹구는 나무 의자를 일으켜 세우고 편히 자리 잡았다.
“안 그래도 그에 관해 할 말이 많거든. 마침 서로 신뢰도 다졌겠다…… 이제 제나일행과 관련한 회의를 시작해 볼까?”
* * *
제나일 공작가로 떠나는 당일의 새벽.
“허흡.”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쉰 채 침대 기둥을 꽉 끌어안았다. 허리와 갈비뼈가 조여지는 기분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허리 뒤편의 마지막 리본을 묶은 하녀장이 다급히 의복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어요. 그래도 요즘은 예전만큼 미친 듯이 허리를 조이지 않는 시대예요. 다행인 줄 아세요.”
“그래도 불편해. 꼭 이래야 해?”
“아니어야 할 이유는 있나요?”
“어차피 주먹 앞에서는 다들 얌전해져.”
“그렇겠죠. 하지만 주인님. 제가 주인님의 허리를 조인 건 주인님이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파격적인 미녀인지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랍니다. 평범한 귀족처럼 보이기 위해서죠.”
“뭐가 다른데?”
“사람들…… 특히 펜 로타의 상류 귀족들은 첫인상에 굉장한 노력을 다해요. 또 상대를 재단하는 데 겉모습만큼 중요하게 여기는 점이 없지요.”
그렇기야 하지.
전시에도 최소한의 품위(어떤 품위인지는 모른다)를 갖춰야 한다고 말하던 이들이다.
딱히 잘못된 사상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하녀장이 무엇을 위해 내 외형에 이토록 신경 쓰는지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고.
“그러니 책잡히지 않고 조용히 녹아들기 위해서는 그들의 룰에 따라 주는 것이 옳아요. 평범한 귀부인들이 걸치는 평범하게 값비싼 맞춤복. 세련되거나 혹은 조금 투박하더라도 커다란 다이아가 박힌 귀걸이. 느긋한 걸음걸이와 차분한 웃음. 노골적이지 않은 시선…….”
“한 번에 배우기에는 난이도가 너무 높아.”
“그러니 더욱 겉모습에라도 신경 써야 하는 거예요. 주인님이 웨더우즈 자작으로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정이니까요.”
나는 놀라울 정도로 딱 맞는 실크 블라우스와 재킷, 푸른색 고어드스커트 걸친 채 거울을 바라봤다.
‘루가 입지 못한 옷인데. 이렇게 쓸모를 다할 때가 오네.’
내 사이즈에 맞춰 제작한 게 다행이었다.
문 근처에 서 있던 진이 넌지시 말했다.
“그래도 하녀장님이 자작님께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입니다. 황실 예절이나 귀족 매너에 정통하실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