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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05화 (105/195)

105화

“말씀하세요. 최대한 들어드릴…….”

“웨더우즈의 가주는 나야. 둘의 바람대로 디안 케트의 유산을 찾는 데 최선을 다하겠어. 대신 둘 역시 나를 주군으로 모셔야 해.”

나는 세 번째 의자에 자리 잡으며 두 남녀를 차례로 응시했다.

“하녀장, 이제 당신의 주인은 전 가주가 아닌 나고.”

“…….”

“할아범이 최우선으로 모셔야 할 사람도 칼레파가 아닌 나여야 한다는 거지.”

이건 일종의 경고였다.

“서로의 이득을 위한 거래가 아니라, 나를 웨더우즈 가문의 주인으로 완전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야. 상명하복의 관계로서.”

말리콥스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하녀장은 아주 잠시 당혹한 눈빛을 띠었을 뿐, 이내 굳게 다짐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좋아요. 오히려 이쪽이 바라던 바예요. 데이지 양이 웨더우즈 가주로서 책임을 다하겠다면, 저 역시 당신을 온전한 주인으로 받들 겁니다.”

“할아범은?”

말리콥스의 눈이 어두워진다. 복잡한 계산에 빠진 얼굴이었다.

“……데이지 양은,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 레냐의 부탁을 들어줬었지.”

벌써 보름이 넘은 이야기였다.

“정신을 차린 후 많이 놀랐네. 기껏해야 하루쯤 본 아이의 부탁을 망설임 없이 들어주다니. 실력도 여러모로 경악할 만했어.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의 가로쉬 버클리그레이튼을 상대로 도망쳤다지?”

다른 부분은 다 넘어가도 이 부분은 곱게 못 넘어가겠다.

“틀려. 도망친 게 아니라 쥐어패다가 중단한 거야.”

“어느 쪽이든, 그만큼의 강자란 사실은 변하지 않지.”

“틀리다니까?”

“사실 나는 자네를 주군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네. 아무리 제국으로 내려왔다지만 이미 로궤에 귀의한 몸일뿐더러, 알게 모르게 그 연줄로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 이건 내 나름의 신의의 문제라네.”

“그럼 거절하는 거야?”

“자네만 괜찮다면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제안하고 싶네. 나는 자네의 종이 아니라, 보…….”

“가?”

“보…….”

“가?”

“보, 보호…….”

머뭇거리는 말리콥스가 답답했는지, 하녀장이 냅다 끼어들었다.

“뭘 그리 주저하시나요? 보호자가 되겠다고 말씀하시려는 거잖아요.”

“……보호자?”

갑자기? 말리콥스가 한층 더 복잡해진 얼굴로 하녀장을 흘겨보곤 나를 바라봤다.

“흠흠! 대단한 의미가 아니네. 나는 데이지 양의 영혼 상태를 알지 않은가? 적어도 생전에는 어른으로서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제안이야.”

“그 말은 내 친부나 조부가 되겠다는 거야?”

“그렇지 않네. 웨더우즈 가문의 장로로도 충분해. 또 로궤에 자네를 내 제자로 알린다면 여러모로 편리한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걸세. 내가 나이를 꽤 먹기는 했어도, 제국에 분산된 로궤 세력 틈에서는 영향력이 큰 편이니까.”

내 쪽에서는 손해 볼 것 없는 호의였다.

‘첫 만남은 조금 이상했어도, 꽤 신경 써 주는 느낌인데.’

아무래도 디안 케트의 일기장을 수거해 온 일로 큰 호감을 산 모양이었다.

“좋아. 그러지, 뭐.”

“고맙네.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네.”

이제 대충 정리가 됐다.

나와 하녀장은 주종 관계, 나와 말리콥스는…… 따지자면 부녀 관계쯤 되는 건가?

“그런데 주종 관계의 증명은 어떻게 하지? 서약이라도…….”

그때,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은발의 인형이 튀어나왔다.

“피의 맹세.”

“헉.”

덜커덩, 의자가 뒤로 밀렸다.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자세로 벌떡 일어선 하녀장이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까, 깜짝이야!”

“이 자리에서 피의 맹세를 나누면 될 것 같습니다.”

“진 양? 당신이 어떻게…….”

“저만 빼고 세 분이서 몰래 대화를 나누시기에 들어와 봤습니다.”

쌀쌀한 음성에 미세한 서운함이 담겨 있었다. 음, 서운할 만했다.

하녀장이 한시름 놓은 얼굴로 진에게 다가갔다.

“그랬군요. 미안하지만, 현재 중요한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라 잠시 나가 있어 줄 수…….”

“저도 나누겠습니다.”

“……뭐를요?”

“피의 맹세요.”

재차 입을 여는 진의 눈동자에서는 동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투여서, 누가 보면 진도 이 회의에 참석해 온 줄 알 것이다.

피의 맹세.

이 살벌한 명칭의 마법은 맹세 마법의 일환이다.

다만 기존의 맹세 마법과 달리, 일방적이기보다는 상호 동등한 관계의 맹세에 가까웠다.

서로의 비밀 혹은 치부를 공개해 맹세로 묶고, 영원한 친구 혹은 가족 혹은 연인으로 살아가리라 약속하는 것.

한쪽이 배신한다고 하여 영혼이 파괴되지는 않는다. 다만 신체 한 부위에 죽을 때까지 그 각인이 남는 만큼 더없이 신중해야만 했다.

“제가 못 미더우신 것 압니다. 하지만 제 팔에 새겨진 버클리그레이튼 공작 각하의 맹세는 웨더우즈 가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진 양.”

진은 하녀장이 아닌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선배님을 보좌하게 해 주십시오.”

보좌?

‘보좌라면…… 라파엘로와 드셰로 사이의 관계 같은 거겠지.’

어, 이런. 너무 끌리지 않는다.

하녀장 옆에 새로운 잔소리 기계가 생긴다는 뜻이지 않은가? 그냥 제자로나 살 것이지…….

내가 깊은 고뇌에 빠져 있을 때. 말리콥스가 넌지시 진에게 물었다.

“그것보다는 구태여 웨더우즈 가문에 묶이려는 이유가 궁금하군. 젊고 능력 있는 검사가 뭐가 아쉬워서 데이지 양의 보좌가 되겠다는 건가?”

잠시 입을 다문 채 생각을 정리한 진이 답했다.

“저는…… 고아입니다. 부모도 형제도 없습니다. 친구도 없죠. 웨더우즈에서 절 받아 주지 않는다면, 길거리에 내몰려서 하루하루 배를 곯다가 아사할 일만 남았습니다.”

나왔군. 상대의 측은지심과 죄책감을 자극하는 권법.

지상 최강의 대화술답게 효과는 뛰어났다. 세상의 쓴맛이란 쓴맛은 전부 맛본 노인의 눈에 안쓰러움이 깃든 것이다.

“아니, 물론. 친족이 없다는 이야기는 들었네만…….”

“좋아.”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하녀장이 경악하며 나를 쳐다봤다.

“데이지 양! 섣부르게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이미 나는 진을 제자로 받아들였어. 보좌 따위보다 한술 더 뜬 관계지. 그리고 자작은 나야, 하녀장. 당신이 아니라.”

짧은 경고에 하녀장의 입술이 오므라들었다.

나는 진을 곁으로 이끌어, 원형 탁자를 중심에 둔 채 하녀장에게 요구했다.

“이제 피의 맹세를 걸어 줘.”

하아아. 긴 한숨과 함께 하녀장이 팔목을 내밀었다.

남은 셋이 그녀를 따라 팔목을 모으자, 서늘한 공기가 피부를 훑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여기, 웨더우즈에 모인 4인이 피의 맹세를 나누려 한다.”

우우웅.

정중앙에 황금빛 원형의 기운이 발현했다.

한 줄기 끈이 되어 떨어진 빛은 우리 넷의 팔목에 각각 나뉘어 퍼졌다. 손바닥 위로 긴 황금색 잔상이 이어졌다.

“피의 맹세로 묶인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부모이자 형제이며, 친구로서 책임을 다할 것이다. 내면에 숨겨 둔 가장 깊숙한 비밀 혹은 치부를 나누어 맹세를 공고히 하리라.”

순간 심장 안쪽이 잘게 저리듯 따끔거렸다.

‘……뭐지?’

피의 맹세 영향인가.

“누구부터 맹세에 나서면 되겠습니까?”

“중한 맹세인 만큼, 연장자인 나부터 나서겠네.”

가장 먼저 말리콥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말리콥스 조. 로궤의 예테로서, 대마법사 메피스토의 생체 실험을 조사하기 위해 제국에 자리 잡았지. 현재는 디안 케트 님을 포함한 로궤의 유물을 찾는 데 집중하고 있다네.”

뒤늦게 진실을 전해 들은 진이 놀란 눈을 했다.

자신의 비밀을 맹세로 건 말리콥스가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하녀장이 선 방향이었다.

그에 목울대가 크게 울렁일 정도로 크게 침을 삼킨 하녀장이 바짝 마른 입술을 뗐다.

“제 이름은.”

착각이 아니라면 입꼬리 끝이 덜덜 떨리는 것 같았다.

“제 이름은…….”

착각이 아니라면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듯했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나와 달리, 말리콥스는 십분 이해한다는 얼굴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하녀장. 서두르지 말게. 모든 것은 자네 스스로의 의지야. 두려워할 필요 없어.”

그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하녀장이 뒷말을 이었다.

“……제 이름은, 이나스타샤 밀리오르그 펜 로타. 펜 로타 제국의 황녀이자 전 웨더우즈 가주님의 제자였죠. 제 생명의 은인이자 유일한 가족이셨던 그분을 위해 웨더우즈에 남았습니다. 생전 이루지 못하셨던 바람을 제가 대신 이뤄 드리고 싶어서요.”

긴 정적이 흘렀다. 아주 긴 정적이.

‘황녀.’

정적 끝에서, 나는 넋 빠진 이성을 바로 세웠다.

‘황녀? 방금 이나스타샤 황녀라고 했어?’

이 깐깐한잔소리청소기계요리악마 하녀장이 펜 로타 제국의 황족이었다고?

그리고 내 친구, 나타샤의 형제?

“거짓말.”

“거짓말 아니에요.”

“농담.”

“안타깝지만 농담도 아니랍니다.”

하녀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이 손목을 내민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황녀 전하.”

“……하아. 일어나세요, 진. 나는 황성을 나온 지 오래입니다. 아슈네이케 오라버니가 황위를 이은 후에는 연을 끊다시피 했죠. 지금은 그저 웨더우즈 가문의 하녀장에 불과해요.”

여러모로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놀라운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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