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99화 (99/195)

99화

맨 처음.

나는 놀랐다.

그다음.

나는 당황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소리쳤다.

“거짓말.”

차갑게 식은 벽에 더 편히 등을 기댄 루가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납득되는 반응이야. 너무 위대해서 놀랐겠지.”

“뭐라는 거야? 신이 당신처럼 가볍고 음흉한 변태일 리 없어!”

“아하하.”

이토록 건조하고 무던한 웃음을 내뱉는 이는 온 세상을 뒤져도 루밖에 없을 것이다.

그 웃음이 들린 순간, 뻣뻣하게 굳어 있던 뒷목이 녹아내리듯 풀어졌다. 동시에 가짜처럼 느껴지던 루의 모습이 더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루다.’

루야. 세레니예 백작이 아닌 루가 맞아.

머릿속으로 이곳, 칼레파에 오기까지의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녀장을 설득시키던 개고생.

비행장에서 몸을 구겨 자던 개고생.

말똥 후작에게 무시받던 개고생.

불난 칼레파에 뛰어들었던 개고생까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나는 루의 멱살(이지만 신장 차이 때문에 사실상 가슴팍보다 조금 높은 부근을) 짤짤 흔들었다.

“이 변태 자식! 뭘 잘했다고 이제야 나와? 나를 이렇게 개고생시켜 놓고선!”

꼴에 양심은 쥐똥만큼 남아 있었는지, 그는 내 손을 쳐 내지 않고 얌전히 흔들렸다.

“그래, 내가 조금……. 변태 같기는 해. 근래 꽤 절실히 느끼고 있어. 한, 14년쯤 전부터.”

은근한 시선이 ‘너 때문에’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 말에 갤러리를 가득 채운 내 모습이 떠올랐다. 루의 뻔뻔한 낯짝과, 매 사진마다 박혀 있던 내 얼굴이 겹쳐졌다.

“루 씨는.”

나를 왜 지켜봤어?

나를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어?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 밖으로 애먼 말만 떨어졌다.

“루 씨는…… 네 개의 벽을 모두 넘은 반신인 거야?”

손에 힘이 빠지면서, 양손에 쥐고 있던 그의 옷자락이 손아귀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루가 속삭이듯 대답했다.

“한참 됐지. 그래도 반은 아직 인간이야. 완벽한 신이 되지 못했거든.”

그런가.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반신이라 칭할 수 있는 거였어.

‘메피스토 따위를 감히 반신이라 칭했다니.’

그 악마를 처음 봤을 땐 그보다 더한 정점이 없을 거라 여겼는데.

그조차도 루의 발끝에 겨우 미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반신.

네 번째 심신일체의 벽을 넘은 자. 인간이 닿을 수 있는 경지의 극에 달한 자.

신이 된 마법사.

로궤의 지주.

그리고 나의…… 은인.

[착각은 거기서 그만두게.]

머리가 무거워졌다.

나도 안다. 내가 루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그에게 있어 조금은 특별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말이다.

물론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착각이면 뭐 어떤가? 조금 머쓱하고 말지. 어차피 나 혼자 품고 있을 생각이잖아.

그럼에도 두려웠다.

정말, 착각일까 봐.

‘한심하네.’

루 덕분에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

나는 내가 겪어 보지 못한 생소한 감정에 한해 몹시 소극적인 인간이 되고 만다.

나는 겁쟁이다.

나는 바보다.

나는 소심한 거짓말쟁이다.

나는…… 루가 좋다.

그래서 나는, 루에게 있어 내가 특별하지 않을까 봐 두렵다.

“뭐가 문제야?”

하얀 손가락이 내 턱을 들어 올렸다.

웃고 있지만 어쩐지 등골이 서늘한 눈매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나랑 대화할 때는 나를 봐야지.”

손톱 아래의 부드러운 살이 내 턱 아래를 조심히 쓸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말해 봐.”

“……당신이 문제야.”

계속해 보라는 듯, 루가 긴 속눈썹을 깜빡였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꾹 참고 있던 내 마음의 둑에 구멍이 났다.

“당신이 가장 문제라고. 나를 왜 불렀어? 어째서 이 먼 칼레파까지 오게 한 건데? 나한테 원하는 게 대체 뭐야?”

“…….”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거야? 그 약속 하나 때문에 14년 동안 나를 지켜보고, 웨더우즈 저택까지 찾아와서 시간을 내버린 거야?”

“…….”

“만약 그런 거라면…….”

“그런 거라면?”

서리가 뚝, 뚝 떨어지는 냉기 서린 목소리가 내 귓가에 틀어박혔다.

“그런 거라면 어쩌려고?”

뭐?

그런 거라면 어쩔 거냐고? 지금 나한테 어쩔 거냐고 물어본 거야?

울컥했다.

누구는 없던 용기를 끌어모아 겨우 입 밖에 꺼냈는데. 그따위 어투밖에 사용할 줄 모른다니!

“어쩌기는 뭘 어째? 고맙다고 해야지! 14년이나 지난 약속을 아직까지 잊지 않고서…… 아.”

숨이 막혔다.

숨이 턱 막힐 만큼, 루가 아주 세게 나를 끌어안았다.

‘뭐지?’

그의 심장 소리가 들린다. 당연했다. 내 얼굴이 그의 가슴에 닿아 있으니까.

왜 안은 거지?

‘미쳤나?’

미친 마법사라서 일단 안고 보는 거야?

평소라면 떠오르지 않을 별 갖가지 잡생각이 다 들었다. 그 떨림이 너무 낯설고 또 두려워서 난 억지로 루의 몸을 밀어냈다.

“하함부로 안지 마!”

빌어먹을. 인생에 하등 도움 안 되는 입술 같으니라고.

“하함부로 안지 마?”

웃음기 완연한 목소리로 내 말을 따라 한 그는 순순히 몸을 떨어뜨렸다.

“그럼 허락받으면 안아도 되나? 좋아, 데이지. 너를 안고 싶어. 그러니 내 손을 잡아 주겠어?”

그러고는 이제 내 앞에 손을 내민다.

손.

거절하자니 거절할 이유가 안 떠오른다.

아니, 무엇보다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얌전히 손을 잡고 싶지도 않다. 휘둘리고 싶지 않으니까.

‘머저리처럼 굴지 말자.’

정신 차려, 데이지. 네가 아는 남자가 몇인데?

네가 알몸을 본 남자가 몇인데?

너한테 목맨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백오십 살 넘게 먹은 노인 상대로 이렇게 어리숙하게 굴 거야?

“어서.”

모르겠고 일단 잡았다.

그러고 싶었으니까.

루의 입매가 기다렸다는 듯 매력적인 호선을 그렸다.

농락당한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러워졌다.

아니, 사실은 더럽지 않다. 너랑 손을 잡았는데 기분이 더러울 리 없잖아…….

“네게 딱히 무언가를 바란 적은 없어.”

가벼운 힘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는 걸었다.

정신 마법 트랩이 펼쳐져 있던 공간을 넘어,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지나쳤던 긴 통로를 통과했다.

“그런 시기는 지났지. 나는 너무 오래 살아왔거든. 신의 경지에 오른 후부터는 무엇을 느끼고 바라는가……보다는, 언제나 균형을 맞추는 데만 신경 썼으니까.”

“균형?”

“데이지, 한 사람의 삶을 14년 동안 지켜본 적 있나?”

있을 리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곁에 머물며, 그가 느끼는 희로애락을 함께하면 어떨 것 같아? 기나긴 연극을 관람하는 듯할까? 아니면 그자의 세상에 녹아들은 듯할까.”

루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 화제가 좋았다. 루가 옛이야기를 하는 날은 드물었으니까.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솔직히 어떻게 다를지는 크게 안 궁금했다. 나는 그냥 루와 손을 잡고 걷는 이 기분이 마음에 들었다.

신장 차가 커서 그런가, 약간 산책당하는 개……가 된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하지만.

“맞아, 달라. 그러니 어떻게 느꼈느냐는 상관없어. 사실 그런 건 전혀 중요한 게 아니거든.”

루는 기다란 길목을 나아가며, 시야를 가리는 흰 천들을 커튼 걷듯 하나씩 걷어 갔다. 한 장, 두 장, 세 장…….

그리고 마지막 천을 거두었을 때.

“널 만난 후 내 균형추가 기울었어.”

우리는 퀸 섬에 서 있었다.

휘이잉. 습윤한 비바람이 불면서 머리와 옷이 단번에 젖었다. 절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흰 파도가 괴물의 아가리처럼 거세다.

나는 루의 손을 잡은 채 해가 져 가는 해변을 내려다봤다.

물가를 벗어나 뭍으로 올라오는 소녀와, 그 소녀를 지켜보는 루를.

“불탄 섬에서 반쯤 넝마가 된 옷을 입고 헤매던 너.”

강한 소용돌이가 시야를 흐트러뜨리고 세상이 다시 한번 바뀌었다.

비바람은 메마르고 꽃잎이 떨어졌다.

절벽 끝에 두 남녀가 보였다. 돌무덤 앞에 선 나와 내 마법사였다.

“나를 만난 게 운명이라며 복수를 꿈꾸던 너.”

이제, 불어오는 꽃잎에 세상이 뒤집혔다.

아득하던 수평선이 사라졌다. 이제 우리는 망가진 도시 위에 서 있었다.

절뚝이는 다리로 검을 내리긋는 나와, 도망치는 도시민들 틈에서 그림자처럼 서 있는 루가 보였다.

“홀로 마귀를 헤쳐 나가던 너도.”

전쟁터에서도.

“사람들을 만나며 안정되어 가던 너와, 그런 와중에도 복수에 매몰되어 검귀가 되어 버린 너도.”

악마의 근거지가 된 퀸 섬에서도.

“메피스토에게 검을 휘두르는 널 봤을 땐 수십 년 만에 번뇌를 겪어야 했지만…….”

언제나, 내 곁에는 루가 있었다.

오직 루만은 그 자리에서 내 곁을 지켰다.

“내 곁으로 돌아온 이상 다시 놓칠 수 없지.”

나직이 읊조린 목소리와 함께, 우리는 다시 칼레파로 돌아왔다.

루가 내게 환상을 보여 준 건지,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보내 준 건지는 알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단둘뿐이었다.

“그래. 너는 결국 내 균형추를 무너뜨렸어.”

서늘해서 더 안도되는 온기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날.”

고요한 숨이 이마에 맞닿은 순간.

“그 섬에서 너는 내 눈에 띄지 말았어야 했는데.”

뜨거운 검날이 내 복부를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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