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195)

98화

찰나의 순간 나는 판단력을 상실했다.

‘원래…… 타오르는 곳인가? 아니면 타이밍 좋게 화재가 난 거야?’

뜨거운 열기가 하늘 위로 솟았다.

저렇게 검은 연기가 구름을 가리는데도 땅 위에 있었을 땐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두 번째 벽을 넘은 내 눈까지 가리다니. 과연 엄청난 마법이었다.

‘그건 그렇고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마치 죽은 땅 같다. 영겁을 타오르는 지옥의 땅.

과연 이곳은 성역이 맞을까?

“뭘 더 생각해? 뒤돌아 가기에는 이미 늦었어.”

“……음. 간만에 옳은 소리를 하네.”

우리는 불꽃이 피어오르는 정원을 지나쳐 신전 내부로 들어섰다.

신전 역시 바깥 못지않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천장을 뚫고 떨어진 불꽃들로 안쪽이 환했지만, 다행히 아직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어쩌지.

‘여기서 루를 찾아야 하나?’

그런데 루를 찾으면…… 그 후에는.

-내부 침입이 감지되었습니다.

그때였다. 천장 어딘가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디안 케트의 눈알에서 들렸던 그 음성이었다.

-보안 유지를 위해 전 구역을 봉쇄하고 자동 폭파를 준비합니다.

-자동 폭파까지 100초. 99, 98…….

잠깐만요.

“자동 폭파라고?”

나 방금 들어왔는데?

쿵, 쿵, 쿵, 쿵.

낮 못지않게 밝았던 내부가 빠르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첫발을 디딘 입구에서부터 문과 창문이 차례로 봉쇄되고 있었다.

우리는 일단 정면을 향해 달렸다.

아니, 달리려 했다.

“93, 94……. 뭐 하는 거지? 넋 놓지 말고 덤벼라. 한시라도 빨리 죽여 줄 테니.”

일렁이는 열기 너머, 긴 은발의 남성이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마치 악마의 눈처럼 살벌했다.

성역 칼레파는 오직 칼레파의 출입만 허락하는 장소.

그리고 누가 봐도, 성역에 들어온 침입자를 처벌하기 위해 나타난 것 같은 인물.

‘그럼 저자가 세 번째 칼레파인 건가.’

날카로운 기세가 피부를 짓누른다.

긴장으로 솜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긴장감이었다.

은발의 칼레파가 말했다.

“지금 내 기분이 상당히 안 좋아. 간만에 휴가를 받아서 좋게 좋게 나갔더니. 한나절 만에 쥐새끼가 기어들어 와? 거의 15년 만의 일이로군.”

스릉. 안데르트가 검을 뽑았다.

“빌어먹을. 귀찮게.”

미간을 한 차례 꾸욱 누른 안데르트는 내 몸을 뒤쪽으로 밀었다.

“이쪽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가서 볼일 봐.”

팔뚝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게 미쳤나. 전쟁터의 아군이나 할 법한 X팔린 소리를 하고 있어?

“내가 뭐 때문에 온 줄 알고?”

“뭐 때문에? 그딴 걸 질문이라고 하냐? 그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를 찾으러 왔겠지. 안 그래?”

그렇기는 합니다.

“일단 너라도 그 또라이한테 보내야 나중 일이 편해지겠지. 빨리 꺼져.”

의도는 알겠다. 그러나 선뜻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왜냐고? 안데르트는 내 동생이니까.

내가 머뭇거린단 사실을 눈치챈 것일까. 안데르트의 검은 신형이 은발의 칼레파를 향해 쏘아졌다.

그 순간부터 고민은 의미 없어졌다. 나는 등을 돌려 다른 길로 향했다.

-70, 69…….

완벽하게 봉쇄된 내부는 동굴 못지않게 어두웠다. 연기에 질식하지 않게 몸을 최대한 낮췄지만 호흡이 가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이전과 조금 다른 길목에 도착해 있었다.

기다랗게 이어진 길목 사이사이, 천장 아래로 기다란 천이 매달려 있었다. 마치 로궤 비행선에 올랐을 때처럼.

첫 번째 천, 두 번째 천, 세 번째 천…….

그렇게 몇 장의 천을 넘었던가?

끊임없이 달려가던 와중에, 발아래가 쑤욱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처음에는 불길에 바닥이 무너진 건가 싶었다. 급히 벗어나려 했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몰려오는 어지럼을 느끼며 눈을 길게 감았다 떴을 때, 내 앞에 또 다른 이가 서 있었다.

이 자리에 있을 리가 없는 인물, 말리콥스가.

[이해가 안 되는군. 무엇을 위해 그리도 열심히 칼레파를 찾아 헤매는 게지?]

“……말리콥스 할아범?”

[디안 케트의 일기장을 되찾기 위해? 아니면 데이지 양 말마따나 웨더우즈 가문을 지킬 뛰어난 마법사를 데려가기 위해서? 아니면 홧김인가? 이런, 설마 그분이 자네의 바람대로 움직여 줄 거라 여기는 건 아닐 테지.]

노인 특유의 속을 꿰뚫는 시선이 나를 들여다봤다.

말리콥스는 모두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또 그렇기에 안쓰럽게 여기는 눈으로 나를 다독였다.

[이해하네. 세레니예 백작 성에서 큰 확신을 얻었겠지. 칼레파께서 자네를 특별하게 여기고 계신다고 말일세.]

어쩐지 명치가 따갑다.

정곡을 제대로 뚫려 버린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 짜증 나는 상황은 대체 뭐야?’

나는 목 뒤로 까끌하게 넘어가는 숨을 무시하며 주위를 살폈다.

붉은빛으로 쉼 없이 점멸하던 칼레파 내부는 보이지 않았다.

불을 끈 내면처럼 어두운 공간. 이곳에 있을 리 없는 말리콥스의 등장.

모든 점을 고려했을 때 지금의 나는, 아마.

[그건 아마 자네의 착각일 게야. 내가 생각하기에 칼레파는 그저 데이지 양과의 약속을 지키고 계신 것에 불과하네.]

“……무슨 약속?”

[응? 무슨 약속이냐고? 그야, 데이지 양을 동생의 무덤 옆에 묻어 주겠다는 약속 말하는 거지. 무려 영혼의 맹세로 각인해 둔 그 약속 말일세.]

‘……약속.’

아, 이런. 실수했다.

‘정신 마법 트랩에서 환상에게 말을 걸다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트랩 깊숙한 곳까지 발을 들였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이성이 더 흐릿해졌다. 몹시 좋지 못한 상황이다.

칼레파를 지키는 트랩인 만큼, 자의로 깨뜨리기 어려울 텐데…….

[게다가 자네는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고, 영혼이 깨진 특수한 경우이기도 하지. 아마 칼레파께서도 흥미로우셨을 거야. 마법사 입장에서는 연구 가치가 무궁무진하니 말일세.]

“…….”

[그러니 착각은 거기서 그만두게.]

“…….”

[데이지 양. 이건 자네를 위한 조언이야. 그분은 자네를 조금도…….]

콰앙!

소름 끼치는 굉음이 터지면서, 일순 정신이 번뜩 들었다.

뇌를 가리고 있던 희뿌연 연기들이 순식간에 거두어졌다.

“허억!”

나는 허리를 굽힌 채, 틀어막혀 있던 숨을 토해 냈다. 이성이 제대로 돌아오기 무섭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안데르트는?’

폭발까지 몇 초 남은 거지?

귓속이 멍해서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루를 찾는 건 그 자리에서 바로 포기했다.

‘안데르트, 안데르트를 찾아야 해.’

그러나 정작 굽혔던 허리를 폈을 때, 나는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사위가 더는 어둡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밝은 밤하늘 위로 비가, 아니, 빛나는 눈이, 아니…….

‘유성우.’

별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장관에 나는 순간 할 말도, 잡념도 잊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별똥별 한번 보지 못한 나다.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이 그러지 않을까.

하필이면 이런 날, 이런 타이밍에 유성우가 떨어지다니 마치 신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경보는 실수야. 사실 진짜 침입자는 이 유성들이거든.”

아주 자연스러운 인사였다.

꿈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시선을 돌리자, 창틀에 기대어 서서 먼 하늘을 올려다보는 옆모습이 나타났다.

“아름답지?”

거짓말처럼 선명한 청발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별빛보다 더 화사한 남자는 어둡게 그을린 우울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문득 세레니예 백작의 존재감은 이자와 비교해서 별것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섬세하고 첨예하면서 흉포한 금안을 마주하고 있자니, 세레니예 백작에게서 이 남자를 떠올린 과거가 우매하게 느껴졌다.

절대 비할 바가 못 되는데.

“100년 전 아스트로사 천공에 떨어진 유성우들이야. 올려다볼 때는 꽤 장관이었는데, 덕분에 산불이 꽤 번졌었지. 지금처럼.”

처음에는 내 귀가 잘못되었나 싶었다.

“100년 전?”

북대륙의 찬 바람이 내 머리칼을 흔들며 불어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내려앉은 천장과 벽도, 화마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다. 그들은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크게 번진 불씨는 점차 작게 줄어들었고 무너진 벽은 아주 느리게 재생되며 본래의 모습을 찾아갔다.

그리고 이내 곧 차마 올려다보기도 힘든 찬란한 별이 되어 하늘로 돌아갔다.

마치 시간이 되돌아가는 것처럼.

‘……아. 경보가 울린 건.’

나와 안데르트 때문이 아니라, 성역에 떨어진 유성 때문이었던 거야.

“이건 109년 전의 월식.”

제자리로 돌아온 유리창 너머, 떠오르고 지기를 반복하던 흰 달이 붉은빛으로 물들어 간다.

“그리고 이건 아마, 120년 전의 보름달이었던 것 같군. 내가 본 보름달 중 가장 컸지.”

끊임없이 회전하는 별과 달.

어느새 제 모습을 갖춘 칼레파.

달빛을 받아 하얗게 요동치는 에델바이스 정원.

나는 루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시간을 돌리고 있는 거야?”

그는 단지 미소 짓기만 했다.

‘말도 안 돼.’

그런 건 있을 수 없다.

시간을 제어하는 건 절대 존재할 수 없는 마법이다.

인간이 시간 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법칙은, 맹세의 각인이 영혼에 새겨진다는 법칙만큼 당연한 진리이지 않은가?

‘……정말 진리가 맞을까?’

나는 루의 눈을 들여다봤다.

이곳 북대륙에서, 나는 그와 같은 두 명의 칼레파를 만났다.

아스트로사에서 만난 스쿨드는 검성에 비견되는 기운을 지닌 자였고 이곳 칼레파에서 만난 칼레파는 스쿨드에 비해 다소 아쉬운 기운을 지닌 자였다.

하지만 루는 다르다.

나는 루의 힘을 들여다볼 수 없다.

두 개의 벽을 넘고, 더는 검에 휘둘리지 않을 통제력을 얻었음에도. 나는 여전히 루의 존재를 가늠할 수 없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야?”

“나?”

환영처럼 그려진 미소 뒤편으로 커다란 태양이 떠오른다.

더 이상 밤은 없다. 그는 내 앞에 이른 여명을 끌어왔다.

가을의 태양일까? 아니면 여름의 태양일까. 강렬한 푸른빛 광채에 눈이 절로 좁혀졌다.

“신.”

조용히 기울인 고개가 여명을 가린다.

떠오르는 햇무리가 루의 그림자 뒤로 그림처럼 퍼져 갔다.

“내가 바로 북대륙의 신, 로드 칼레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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