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쿠웅.
육중한 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렸다.
내리쬐는 석양빛과 함께 드러난 백색의 도시는, 이제껏 느껴 본 적 없는 신선한 위압감을 풍겼다.
칼레파, 정확히는 칼레파 외곽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지극히 이국적이라는 것이었다.
아스트로사 왕국의 풍경도 이질적이긴 했지만 대체로 현대 및 근대 북대륙 건축 양식이 적절히 어우러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달랐다.
‘적어도 150년은 더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야.’
그래서 더 유물처럼 느껴지는 걸까.
하지만 감상은 그것으로 끝이다. 어차피 오늘 내로 벗어날 장소였으니까.
“데이지 파거 씨 그리고 가로쉬 버클리그레이튼 씨.”
인솔을 맡은 신도가 우리를 성문 근처의 작은 건물로 안내했다.
“이곳은 기숙사입니다. 저녁 식사는 오후 5시에 제공됩니다. 내일 아침 5시까지 외출이 금지되니 유념해 주십시오.”
우리는 말없이 그의 말에 경청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심사 후보자는 개인 활동이 전면 금지됩니다. 일주일 동안 이 건물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짧은 교육 후 2차 시험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두 분 다 아시겠지만, 입교 심사는 총 3차로 이루어져 있으며…….”
신도의 설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도시의 내부를 샅샅이 훑었다.
말리콥스가 내게 조언하기를.
“……칼레파 외곽에 도착했다고 해서 끝이 아닐세. 진짜 시작은 거기서부터지. 외곽은 신도들의 거주지이고, 칼레파가 지내는 성역 칼레파는 그 너머에 있어. 하지만 정확히 어느 쪽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네. 강력한 마법으로 보호되어 있거든.”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저 막막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칼레파 외곽은 조금 달랐다.
‘……생각보다 더 쉽게 성역으로 진입할 수 있겠는걸.’
내 가정이 틀리지 않는다면, 당장 오늘 밤에 움직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질문 있으신 분 계십니까?”
없는데.
나와 안데르트는 멀뚱멀뚱 신도만 쳐다봤다.
“아무도 없으시군요.”
아무도 입술을 떼지 않자, 신도는 다소 실망한 기색으로 기숙사를 나갔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인사말도 남기지 않고 각자에게 주어진 방으로 들어갔다.
안데르트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내게는 루를 만나기 위해 성역으로 진입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가정’을 토대로, 오늘 밤의 계획을 세워 나가기 시작했다.
그날, 자정이 넘는 시각.
나는 기척을 죽인 채 창문 밖을 나가 지붕으로 기어 올라갔다. 산속이어서 그런지 새벽바람이 유독 차게 느껴졌다.
휘영청 뜬 보름달이 칼레파 외곽을 밝히니, 루의 침실에 침입하기 적격인 날인데 왜 여기에 안데르트가 있냐?
“……뭐야.”
시꺼먼 남정네가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우리 사이에 잠깐 정적이 돌았다. 누군가 먼저 입을 열지 않는다면 해가 뜰 때까지 이어질 긴 정적이었다.
결국 내가 먼저 그에게 물었다.
“왜 여기 있어?”
“너는?”
“내가 먼저 물었어.”
“내 질문에 대답하면 답해 주지.”
“내 질문에 대답하면 대답해 줄게.”
징하다는 눈으로 나를 노려본 안데르트가 외곽 너머로 턱짓하며 말했다.
“너도 갈 거냐?”
그 덕에 나도 곧장 알아차렸다.
‘이 자식. 역시 루에게 볼일이 있는 게 맞아.’
루의 정체를 어떻게 아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입교 1차 심사 위원으로 루를 지목했던 일도 그렇고,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접점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괜히 언짢아진 기분으로 안데르트가 가리켰던 공간을 턱짓했다.
“네가 저기를 왜 가는데?”
“너는 저기로 왜 가냐?”
“너는 알 것 없는 용건이야.”
“내 용건도 네가 알 바 아니다.”
진정. 진정하자.
마음의 평화. 하녀장과 드셰로의 잔소리를 떠올려라, 데이지.
‘굳이 의도를 캐물어서 뭐 하나 싶기도 하고. 목적지가 같다면 오히려 도움이 될지도 몰라.’
그래,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안데르트의 실력은 이미 검성이 보증했으니까. 어차피 여기서 실랑이 벌여 봤자 시간만 낭비였다.
“얌전히 따라와. 들키면 너만 버리고 갈 거니까.”
조언과 함께 건너 지붕으로 넘어가 벽 위로 크게 발돋움했다.
이 정도로 높게 뛰어오른 적은 처음이라 발목이 시렸지만 어쩔 수 없다. 원래 기척을 숨기는 일은 기척을 내는 일보다 열 배는 더 큰 에너지가 소모되니까.
우선 벽 위에서 칼레파 외곽을 크게 둘러봤다.
‘내 예상이 맞았어.’
이 거대한 벽 내부의 구조는 내게는 낯설지 않았다. 그 이유를 깨닫자 작게 실소가 나왔다.
메피스토. 너 이곳을 꽤 사랑했구나.
아마 성역 칼레파는 이 외곽 북쪽으로 적잖이 이동해야 나올 것이다.
벽을 타고 내려간 후 예상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이윽고 근방에 도착해 주위를 살필 즈음.
“어이.”
시건방진 동생 놈이 시건방지게 나를 불러 세웠다.
“누나라고 부르랬지.”
“길을 꽤 잘 아는 거 같은데. 이전에 와 본 건가?”
대답하기 애매모호한 질문이라 답을 미루자, 안데르트가 재차 물어 왔다.
“너 사실은 로궤 사람이었던 거냐?”
하아. 귀찮은 녀석.
“안데르트. 메피스토의 군대에 대해 들어 봤어?”
“그놈의 안데르트 소리는 좀.”
싫은 소리를 하면서도 복면 안에 숨겨진 연초록색 눈동자는 작게 깜빡였다. 긍정의 표시였다.
“녀석들은 마도 전쟁 때 제국 곳곳에 거점을 두고 있었어. 우린 그 거점을 메피스토의 신전이라 불렀는데, 전체적인 외관이 이곳의 건축 양식과 정확하게 일치해. 뭐, 메피스토의 군대가 로궤의 변절자들이라고 했으니 이상할 건 없지만.”
잠시 말이 없던 안데르트는 낮게 내려앉은 나뭇가지를 피하며 내게 물었다.
“메피스토에 의해 내가 한 번 죽었다고 했었지.”
이제껏 나누던 대화와 조금 다른 주제였다.
“그래.”
“죽었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살아 있는 거냐.”
사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넌 어떻게 살아 있는 거냐, 안데르트? 어쩌다가 검성의 손으로까지 흘러가게 된 거야?
“그건 그냥…… 내 입장에서 표현한 말이야.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지만, 실제 너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던 거지. 아마 중간에 구조를 받거나, 다른 섬까지 우연히 흘러 들어간 모양이야.”
“나는 퀸 섬 출신이었던 건가?”
훌륭한 추측이다.
섬끼리의 거리가 가까운 군도에서, 메피스토에게 죽을 뻔한 경험을 한 장소는 퀸 섬밖에 없었으니까.
답하지 않자 그가 짧게 턱짓했다.
“너도?”
“궁금해?”
“…….”
“궁금하면 60초 후에 공개.”
안데르트는 웃음기 하나 없는 싸늘한 눈초리로 나를 흘겨봤다.
암살자의 유머가 안 통하는군. 건조한 녀석.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처음 하려던 이야기의 뒷말을 덧붙였다.
“메피스토의 신전은 총 12곳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동일한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었어. 꽤 체계적인 구조라, 전문적인 고고학자들로 탐색대가 꾸려질 정도였지. 제국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은 아니었거든.”
“…….”
“그리고 방금 전, 외곽을 전부 둘러본 후에야 확신했어. 메피스토 신전의 구조와 칼레파 외곽의 구조가 똑같다는 사실을 말이야.”
내가 이 근방을 퍽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곳의 구조는 내게 너무나 익숙하다.
물론, 메피스토의 신전은 규모를 포함한 모든 면에서 칼레파 외곽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하지만 외곽 중앙에 광장처럼 큰 공터가 자리한다는 점. 커다란 우물이 서쪽 끝과 동쪽 끝에 자리한다는 점.
그 외 중요 구조물로 보이는 건물들의 배치가 육각형을 그린다는 점 등, 메피스토의 신전은 이 칼레파 외곽을 작게 축소해 지하로 옮겨 놓은 듯했다.
메피스토가 자의로 로궤를 벗어났든, 타의로 로궤에서 쫓겨났든. 적어도 이곳에 대한 미련은 못 버렸던 게 확실했다.
그렇게 10분 정도 걸음을 더 옮겼을 때.
새까만 시야 너머로, 언덕 형상의 작은 절벽이 나타났다.
나는 축축한 절벽과, 절벽을 둘러싼 넝쿨을 더듬거리며 얌전히 뒤따르고 있는 안데르트에게 말했다.
“내 추측이 맞는다면 아마 이 넝쿨 너머에 탑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있을 거야.”
섬찟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넝쿨 아래를 받치고 있던 벽이 끝난 것도 그 시점이었다. 넝쿨을 거두고 텅 빈 공간으로 들어가자…….
“맞았네? 누나 똑똑하지?”
끝도 없이 어두운 동굴 입구가 우리를 맞이했다.
내 말을 보란 듯이 무시한 안데르트가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싸가지 없는 놈.
길은 심해보다 어두웠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나와 안데르트의 호흡 그리고 걸음 소리가 전부였다.
하지만 버드나무 숲 보고를 한 번 턴 후여서 그런지, 두렵기는커녕 여유롭게 걸음을 이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달빛이 쏟아졌다.
우리는 하늘로 길게 이어진 계단을 따라 쉬지 않고 걸음을 이었다. 나무 기둥을 타고 가지 위로 달려가는 느낌이었다.
그 계단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보름달 아래, 검은 불길에 휘감긴 정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