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195)

96화

“백작은 왜 웃나?”

“귀여워서요.”

세레니예 백작은 아스트로사 국왕의 핀잔에도 유연히 맞받아쳤다.

그런 그를 혼란스러운 눈으로 탐색한 왕이 헛기침과 함께 나를 훔쳐봤다.

“흠흠. 그럼…… 시간이 남은 듯하니, 나도 그대 연인에게 한 수 배울 수…….”

“안 됩니다.”

“어째서?”

“제 아내는 연약합니다. 괴롭히지 마십시오.”

“뭐라? 연약해? 누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문에 세레니예 백작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내 아내가.”

“그럼 저는요?”

“꼭 말해야 아나?”

방금 잠깐 위아래 관계가 역전된 것 같은데.

한 차례 고개를 내저은 아스트로사 국왕이 한쪽 손을 들어 심사 종료를 선언하려던 때였다.

“이거 서러워서, 원. 하아. 그럼 입교 심사는 이것으로 마무리…….”

“국왕 폐하.”

누군가 왕의 선언을 방해하며 당당하게 등장했으니.

“……가로쉬 버클리그레이튼? 할 말 있나?”

“늦었지만 입교 심사를 요청합니다.”

미쳤냐?

‘아니, 그 전에 어떻게?’

아스트로사 국왕 역시 나 못지않게 당황한 눈치였지만, 이내 곧 왕의 위엄을 되찾으며 차분히 입술을 뗐다.

“심사는 아무나 치를 수 없어. 로궤 신도의 추천서가 필요하다네, 가로쉬 버클리그레이튼 군.”

“가져왔습니다.”

안데르트의 당당함에는 그만한 연유가 있었다. 왕에게 내민 입교 추천서가 바로 그것이었다.

‘……설마, 처음부터 저걸 노리고 날 따라온 건가?’

안데르트를 로궤에 잠입시키려는 검성의 노림수였던 거야?

하지만 그런 내 의심은 쓸데없는 망상이었던 것 같다.

“어제 받은 추천서인가?”

“그렇습니다.”

“흐음.”

추천서의 출처가 어딜지 대충 각이 나왔다.

‘어제 내가 황금 열쇠로 왕성에 넘어가 있는 동안, 귀족 중 한 놈을 협박했군.’

쯧쯧. 한심한 어린 양들이 깡패에게 털렸구나.

아스트로사 국왕은 이제 딴지 놓을 마음도 사라진, 어느 정도 해탈한 표정이 되었다.

“좋네. 자네 역시 특별한 손님이고 하니, 빠르게 진행하도록 하지. 심사는 이쪽이…….”

“아니요, 제가 실례하고 싶은 심사 위원은 이쪽입니다.”

안데르트의 시선은 정확히 한 곳을 향해 있었다.

스쿨드도, 심사 위원도, 하물며 왕도 아닌 세레니예 백작에게로.

“세레니예 백작께 심사받고 싶은데. 물론 두려우시다면 거절해도 되고.”

심사 위원 중 한 명이 당황한 눈으로 나섰다.

“세레니예 백작님은 입교 심사 위원이 아닙니…….”

“저는 비공개로 심사를 진행해도 상관없습니다만, 백작님.”

노골적인 어필에 모두의 시선이 세레니예 백작에게로 향했다.

왕이나 스쿨드가 만류할 거라 여겼는데, 그들은 예상외로 세레니예 백작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루를 지목한다고? 내가 모르는 뭔가가 둘 사이에 있는 건가?’

이거 좀 의심스러운데. 설마 안데르트가 세레니예 백작의 정체를 눈치챈 걸까?

루와는 고작 한 번 만난 사이일 텐데.

세레니예 백작은 미간을 찡그리며 안데르트를 질책했다.

“아이처럼 구는군, 가로쉬 군. 이곳은 제국이 아니라네. 자네가 멋대로 설칠 수 있는 땅이 아니야.”

그답지 않게 전형적인 경고라 생각했지만.

곧이어, 서늘하게 얼어붙은 눈매 아래로 짧은 조소가 걸렸다.

“……라고 경고해 줘야겠지만. 젊은 남자의 구애는 오랜만이라 조금 호기심이 드는걸.”

세레니예 백작이 스쿨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런 그의 눈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스쿨드가 몸에 지니고 있던 검을 건넸다.

안데르트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였다.

“세레니예 백작.”

아스트로사 국왕이 그런 그를 만류하려 했으나, 반응은 차가웠다.

“가로쉬 버클리그레이튼의 요청대로 비공개 심사를 진행하겠습니다, 국왕 폐하.”

이의는 받지 않겠다는 양 단호한 태도였다.

왕 앞에서 보이기에는 분명 주제 넘는 행동이다.

그러나 스쿨드를 포함한 누구도 세레니예 백작의 통보를 저지하지 못했다.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세레니예 백작은 그러한 분위기가 당연하다는 듯, 안데르트를 제외한 모두를 후원에서 내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안데르트는 1차 입교 시험 합격자로서 당당하게 나타났다.

* * *

로궤행 당일.

나는 진에게 몇 가지 사안을 당부한 후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세레니예 백작에게 어떻게든 달라붙어. 칼레파에게 한 수 배우고 싶으니 자리를 만들어 달라 하면 도와줄 거야.”

“……제가 감히 그래도 되겠습니까?”

“실행하는 건 네 자유야.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니 신중하게 생각해. 예거시에게는 오늘 일을 대충 알려줘. 때가 되면 미드윈트리로 곧장 떠나도록 해.”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 안데르트, 드셰로는 알현실에서 아스트로사 국왕을 알현한 후 왕성 내 운하 쪽으로 이동했다.

안데르트에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물어 봤자 답하지 않을 성격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나중에 루에게 물어보는 편이 빠르지.’

운하에는 왕실 체면에 어울리지 않는 낡은 나룻배가 둥둥 떠 있었다.

설마 저걸 타고 로궤로 가는 건 아니겠지…….

“세레니예 백작님은 어디 계십니까?”

“아, 그는 자네들을 내게 맡긴 채 바쁜 일이 있다며 떠났네. 음. 세레니예 백작은 항상 바쁘지. 바쁘고말고…….”

드셰로의 질문에 침울한 표정으로 답한 왕이 운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운하는 왕성 내 별채 중 한 곳과 이어져 있었다. 별채 안쪽으로 이어지는 물길은 어둠에 휩싸여 안쪽이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

드셰로는 그 어둠 속을 세세히 살폈다.

“어쩐지 긴장한 눈빛이로군, 드셰로 자작. 어차피 자네는 저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할 텐데 말이지. 궁금한 게 많은 것 같은데 괜찮으니 말해 보게.”

왕의 배려에 드셰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물었다.

“로궤의 본교는 이곳에서 많이 먼지 궁금합니다, 국왕 폐하.”

“로궤에 흥미가 있나?”

“저는 마도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제 상관은 전쟁의 영웅인 라파엘로 제나일 공작님이시죠. 전쟁 중 로궤의 크고 작은 지원을 여럿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의 힘들었던 상황을 떠올리면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충분히 이해하네.”

“지난 4년간 제국 황실 측에서 무수한 회담 요청을 보냈으나, 로궤 측에서는 일절 거부해 왔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많이 아쉬워하셨지요. 마도 연합 못지않게 로궤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극구 거절하는 이유를 굉장히 궁금해하시더군요.”

아스트로사 국왕은 속을 가늠할 수 없는 은근한 시선으로 드셰로에게 되물었다.

“자작은 사절단으로 아스트로사에 왔나?”

“아니요. 황제 폐하를 입에 담기는 했으나, 순수하게 저 개인의 궁금증이기도 합니다.”

“지식욕이 큰 친구로군. 그리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야. 로궤의 발원은 동대륙일세. 그냥 동대륙도 아니고 극동대륙이지. 처음 로궤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 그 자체의 색채가 훨씬 강했어.”

왕의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짧게 요약해서.

북대륙이 외교에 폐쇄적인 이유는 북데우스산맥에 매장된 대량의 정제석 때문이었다.

이 정제석을 노린 국가와 조직이 긴 시간 동안 끊임없이 북대륙을 침략했고, 그들 중에는 초기 로궤교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대에 로궤의 종교색이 옅어진 이유도 정제석으로 인한 내분을 크게 겪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성회교 마약 밀반입 사건까지 겪은 북대륙연합교국은 외교 창구를 완전히 잠가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근래에는 우리도 소통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네. 마도 전쟁의 영향이 컸지. 음. 더 자세한 대화는 저들을 보낸 후 나누도록 할까?”

드셰로의 어깨를 두드린 아스트로사 국왕이 나와 안데르트 앞에 섰다.

“앞서 두 눈으로 확인했겠지만, 올해 1차 입교 심사 통과자는 자네들뿐이네.”

“…….”

“로궤 내규에 따르면 심사 통과자 전원은 2차 심사를 치르기 위해 심사 위원과 함께 칼레파 외곽으로 이동하게 돼. 여기서 말하는 칼레파는 성역 칼레파고, 도착까지는 두 달 정도 소요되지.”

“두 달?”

농담이지?

“하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왕성 비밀 통로를 개방해 줄 예정이야. 그 길을 통하면 칼레파 외곽까지는 반나절 내로 도착할 수 있지.”

아, 다행이네.

“참고로 방금 정보는 국가 기밀이니 만약을 대비해 기밀 발설 금기를 맹세해 주게나. 자네들 모두.”

얼떨결에 기밀 유지를 위한 맹세를 나누었다.

덕분에 내 팔에는 네 번째 맹세의 흔적이 추가되었다.

차례로 칼레파, 검성, 웨더우즈, 아스트로사 국왕인 건가. 꽤 호화로운 리스트인걸.

“이 앞으로는 시야가 차단될 걸세. 무운을 빌지.”

아스트로사 국왕이 먼저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와 마지막 악수를 나누었다.

이후 나와 안데르트의 눈에 검은 안대가 둘러졌다. 이후 이동을 위해 나룻배에 오른 것이 시작이었다.

우리는 쉬지 않고 이동했다.

처음에는 나룻배, 그다음에는 마차, 그다음에는 차, 그다음에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타고서.

어느 순간부터는 지상의 상쾌한 공기가 완전히 차단되고 지하 특유의 습한 흙냄새가 풍겼다.

광산 수레 못지않게 심히 덜컹거리는, 차마 마차라 칭할 수 없는 바구니 따위를 탄 후에는 기나긴 내리막길로도 떨어졌다.

종종 그런 의문을 느꼈다.

‘우리는 사실 팔려 가는 게 아닐까?’

몇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어렴풋이 반나절쯤 흘렀으리라 추측할 뿐, 어떠한 부분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 돌연 안대가 거두어졌다.

붉은 해가 산등성 뒤로 넘어가는 어스름의 시간.

우리는 로궤의 성역, 칼레파 외곽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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