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95)

95화

“……마도 전쟁 때 말입니다. 선배님이 살던 마을에도 자경단이 있었나요?”

“응.”

“그들은 마을을 지켰습니까?”

“응. 마을을 지키는 게 자경단이 할 일이니까.”

“제 고향은 아니었습니다.”

그건 아주 단호하다 못해 원한까지 깃든 부정이었다.

“마도 전쟁 6년이었던가요. 마귀들이 제가 살던 마을로 북상하고 있단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다행히 한차례 토벌당한 후라 기세가 많이 약해졌다기에, 자경단을 중심으로 방어진을 꾸리기로 했습니다. 외부인 용병까지 끌어모아 꽤 단단하게 대비해 두었죠.”

마도 전쟁 시기에는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마귀가 북상한 당일 새벽이 되었을 때, 마을을 지키는 자경단은 없었습니다. 모두 도망쳐 버린 거예요. 유일한 저항 수단인 무기까지 챙기고서요.”

“…….”

“마을은 당연히 불바다가 되었어요. 정신없이 도망치던 와중에 동생의 손을 놓쳤는데……. 다시 찾아냈을 땐 무너진 지붕에 묻힌 뒤였지요.”

머릿속으로 검게 타 처참하게 무너진 지붕과, 검은 연기와 함께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 함선의 모습이 동시에 그려졌다.

“처음에는 마을을 배신한 자경단이 원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 원망이 정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되더군요. 결국 모든 사달의 원인은 자경단을 믿은 마을 사람들도, 그런 마을 사람들을 배신한 자경단도 아닌 메피스토였으니까요.”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건 복수겠구나.”

“예. 저는 메피스토를 죽이고, 죽은 동생과 불타 버린 마을의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비록 메피스토를 죽인 이는 안데르트 파거이지만. 만약 그다음이 있다면…….”

제가 죽일 겁니다.

목구멍 아래로 삼켜진 어미에 나는 한숨을 삼켰다.

‘소름 끼칠 정도로 나와 똑같다니까.’

설마 죽었다는 동생이 남동생은 아니겠지.

진에게는 사연이 있다.

그리고 사연은 검사를 강해지게 하고 벽을 넘는 디딤돌이 되어 준다.

‘하지만 통제력을 잃기에는 더 쉬워.’

역시 진에게는 지킬 존재가 필요하다.

“선배님. 심사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일단 잡생각을 떨치기로 했다. 고민할 시간은 앞으로 충분할 테니까.

예상한 바에 맞게, 로궤 입교 1차 심사는 대련이었다.

규칙에 의해, 심사 후보는 로궤에서 제공하는 깡통 무기(몹시 구려 보여서 깡통이란 표현이 제격이었다)를 들고 심사 위원을 상대해야 했다.

심사 위원은 강했다.

세 명의 신자가 번갈아 후보를 상대했는데, 그중 한 명은 두 번째 벽을 넘은 검사인 듯했다.

‘예테, 인 건가. 그럼 내 상대는 저 남자겠네.’

후보 수가 적잖은 덕에 심사 위원을 탐색할 시간이 넉넉했다.

첫 번째 특징, 오른손 위주의 양손잡이다.

두 번째 특징, 힘으로 밀어붙이기를 선호한다.

세 번째 특징, 원형 탈모기가 있다.

그리고 네 번째 특징을 골라내기 직전.

입교 심사가 끝났다.

‘뭐? 장난해? 나 아직 안 했는데?’

이의 제기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던 때였다.

마무리 정리를 지시하던 심사 위원이 빈 공터를 가로질러 내게 다가왔다.

“데이지 파거 양. 지금부터 당신의 심사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여기가 아니라?”

“왕성에서 진행됩니다. 따라와 주십시오.”

그럼 굳이 왜 심사장까지 데리고 나온 건데?

우리는 심사 위원의 뒤를 따라 다시 왕성으로 복귀했다.

후원에 도착했을 때는 세레니예 백작과 아스트로사 국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드셰로 자작은…….

“살살 하세요.”

흥미가 완연한 표정으로 내게 와서는, 대뜸 그런 조언을 남겼다.

어이가 없네.

“뭐라는 거야. 나는 심사를 하는 게 아니라 받는 위치라고.”

“걱정돼서 하는 말입니다. 당신은 그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꼭 심술을 부리곤 하거든요.”

“내 표정이 어때서?”

“떫어요.”

……흠.

나는 표정 관리하며 심사 위원 앞에 섰다. 살살 목을 돌리다가 심사 위원에게 물었다.

“질문. 나는 왜 따로 진행?”

“내부 사정입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말씀드릴 수 없기는. 루의 수작일 게 분명한데.

뭐, 비공개 심사로 진행돼서 나쁠 건 없지.

“지금부터 데이지 파거 양의 예테 자격 심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널브러진 무기 중 깡통 검을 집었다.

쓸데없이 무겁고, 쓸데없이 무른 검이다.

손에 익히기 위해서 가볍게 몇 번 휘두를 동안 심사 위원이 말했다.

“시험장에서 내가 어떤 식으로 검을 휘두르는지 확인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당신에게 그 정도의 안목이 있을지 의문이지만.”

그는 검을 늘어뜨린 채 거만하게 턱을 까딱였다.

“선공하십시오. 세 번까지 수를 물러 드리죠.”

선공. 거기에 세 번의 수.

이전 심사 후보들은 제공받지 못한 호의이지 않은가?

싸가지 없는 말투를 봐선 강제받은 것 같기도 했다. 루가 나를 로궤로 보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게 느껴졌다.

‘뭐, 개무시당할 만큼 내 기가 완벽하게 갈무리됐다는 뜻이기도 하지.’

음, 좋아.

세 수 안에 죽이자.

나는 오른손으로 검을 든 채 심사 위원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냐’는 표정의 원형 탈모와 마주 보고 서서 검을 들었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그리 빠르지 않은 검격이었기에, 심사 위원은 오른쪽으로 한 발 이동하는 것만으로 검을 피해 냈다. 가소롭다는 시선이 내게 닿은 순간.

양쪽 날에서 뻗어 나온 검기가 수류탄처럼 터졌다.

콰아앙!

방심한 상대만큼 손쉬운 적이 없는 법.

옆으로 반쯤 기운 원형 탈모가 공중제비를 돌며 뒤로 멀찍이 물러섰다.

“큭.”

후드득. 뒷걸음질 친 자리에 붉은 피가 긴 호선을 그리며 바닥에 흩뿌려졌다.

왼쪽 귀에서 떨어지는 피였다.

“검 들지 마. 두 수 남았어.”

반사적으로 검 손잡이를 더듬던 손이 멈칫 굳었다.

검성 이후 내게 세 수나 물러 주는 검사는 네가 처음이야, 원형 탈모.

쉽게 얻을 수 없는 호의인 만큼 성의 있게 상대할게.

나는 다시 심사 위원 앞으로 걸어갔다.

붉어진 낯에는 아까와 달리 거만한 표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번에는 조금 평범하게 찌르기를 시도했다. 또 검기가 터질 거라 생각했는지, 심사 위원은 단번에 옆쪽으로 발돋움했다.

신형이 멀어지려던 찰나. 오른쪽 발에 모인 무게 중심을 이용해 왼쪽 다리를 휘둘렀다.

“컥!”

무릎에서 느껴지는 복부의 강직도가 대단했다. 그러나 내 알 바 아니라서 주춤한 상대의 턱에 왼쪽 주먹을 날렸다.

바닥에 쓰러진 원형 탈모가 머리를 흔들며 이를 악물었다.

“누가…… 대련에 주먹을……!”

“미안. 나 원래 근본 없어.”

깡통 검을 왼손으로 다시 잡았다.

“그리고 사실 왼손잡이야.”

원형 탈모의 눈에 옅은 공포가 깃든 것을 확인한 후.

“마지막 한 수까지 잘 부탁할게.”

나는 내가 보일 수 있는 최고의 빠르기로 검을 찔렀다. 검 끝은 정확히 남자의 머리를 향한 채였다.

경지가 높은 검사일수록 스스로의 한계를 명확히 판단할 줄 안다.

원형 탈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하기에 늦었다고 생각했는지, 내게 반격을 가하기보다는 상체를 최대한 뒤로 숙여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다.

그렇게 정면으로 나아간 검이 남자의 동공을 파고들려던 찰나의 순간.

“그만!”

아스트로사 국왕의 명령과 함께, 시험이 끝났다.

나는 깡통 검 끝에 닿은 속눈썹을 바라봤다. 북대륙인 특유의 촘촘한 속눈썹이 공포감에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정말 식겁했군! 데이지 파거 양, 설마 심사 위원을 죽일 생각이었던 건가?”

거친 호흡을 내뱉은 원형 탈모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마른세수했다.

나는 검을 거두며 답했다.

“민간인 살생은 범죄입니다.”

“군인 같은 소리 말고. 하마터면 심사 위원이 죽을 뻔했네!”

“겁을 준 것에 불과합니다.”

“강자가 약자를 겁박한다니. 그것이 제국의 대련 방식인가?”

“수를 물러 준 건 심사 위원입니다. 오히려 약자는 저였죠. 약자로서 최선을 다한 게 문제라는 뜻인가요?”

하아. 긴 한숨을 내쉰 아스트로사 국왕이 세레니예 백작을 한 번, 칼레파를 한 번 쳐다봤다.

“무슨 생각으로 어려 뵈는 여인을 예테 심사에 치르게 하나 싶었더니. ……괴물이었군, 괴물이었어.”

“그래서 통과인가요?”

다른 심사 위원들이 원형 탈모를 부축하는 데 열을 쏟는 통에, 내 질문은 허공에 흩어졌다.

나는 깡통 검을 어깨 위로 들어 올리며 재차 물었다.

“통과냐고.”

흠칫 어깨를 굳힌 심사 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과……입니다.”

야호!

깡통 검을 내던지며 기뻐하기 무섭게 드셰로가 내게 다가왔다.

“잘했습니다. 마지막에 잘 참았어요. 물론 당신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의도적으로 상대를 조롱했을 확률이 높지만요. 하지만 이곳은 제국이 아닌 아스트로사 왕국입니다. 이목을 끄는 행동을 할 필요가…….”

잔소리하는 주제에 내 실력이 녹슬지 않아 아주 마음에 든다는 눈을 하고 있구나, 드셰로.

“발과 주먹을 활용하는 야비한 수가 일품이었습니다, 선배님. 덕분에 승리를 위해서는 손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

드셰로 다음으로는 어쩌고저쩌고 떠드는 진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렸다.

좋아, 드디어 로궤에 입성한다!

뿌듯한 기분으로 세레니예 백작을 쳐다보자 그 역시 어여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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