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95)

94화

입교 심사의 날이 밝았다.

마음 수양? 준비 운동? 그딴 거 필요 없다.

나는 웨더우즈의 하녀이자 각성한 검귀이며 블라디어쩌고 백작인 데이지 파거. 메피스토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 영웅이자 마귀다리미법의 창시자.

입교 심사 따위 두렵지 않았다.

심사가 이뤄지는 장소는 왕성 근방이었다.

메피스토의 신전이 연상되는 백색의 건물 안에 경마장 못지않게 너른 공터가 자리해 있었다.

촘촘한 계단 의석이 원형 경기장을 둘러싼 모습은 블랙라갈호를 연상케 했다.

“오셨습니까, 선배님?”

“음.”

앞서 도착해 있던 진이 의자에 걸터앉아 있던 안데르트의 뒷목을 잡고 일으키려 했다.

나는 꼼짝도 않는 안데르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진, 세레니예 백작은?”

“심사 위원으로 보이는 자들과 함께 계십니다.”

시각에 정신을 집중하고 경기장 건너편에 모인 이들을 확인했다.

로궤 신도복을 걸친 심사 위원이 셋.

어쩐지 그들의 안색이 좋지 못하다 싶었더니, 옆 그늘에 산책 나온 듯한 복장의 아스트로사 국왕과 세레니예 백작 그리고 백발의 칼레파, 스쿨드가 편히 쉬고 있었다. 불편할 만하겠네.

‘드셰로도 저쪽인가? 지위가 지위인 만큼 초청받은 느낌인데.’

아주 먼 거리임에도 세레니예 백작이 나를 쳐다보고 웃는 게 느껴진다.

콧등을 찡긋거린 그가 고개를 돌렸다.

“생각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심사를 보네요. 가볍게 훑어만 봐도 쟁쟁한 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다소 흥분한 기색의 진을 보자, 문득 궁금해진 점이 있었다.

“검성에게는 어떻게 배웠어?”

“……검, 말씀하시는 겁니까?”

진이 차근히 머릿속을 정리할 때였다.

“어떻게 하기는. 개새끼처럼 구르지.”

시큰둥하게 툭 던져진 목소리가 있었으니. 안데르트였다.

“미친개.”

심히 언짢은 낯으로 세 음절을 읊조린 그가 날 올려다봤다.

“그놈의 빌어처먹을 별칭으로 왜 불렸겠어? 검성이 제자로 받아들인 이들에게 인정사정없이 굴거든. 별 같잖은 수련으로 개처럼 굴리고, 극한까지 굴리고, 죽기 직전까지 굴리다가 마지막에 남은 극소수에게만 검술이라는 걸 가르치지.”

불편한 표정을 지은 진이 곧장 반박했다.

“그 수련은 같잖은 수련이 아닙니다. 체력과 근력, 정신력을 길러 주는 기본 수련입니다.”

“웃기는 소리 하는군. 애당초 기본조차 안 된 놈들은 검성이 받아 주지도 않는다.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어디서 굴러먹다 들어온 떠돌이 용병이기는 해도 실력은 웬만한 기사들에 견줄 만큼 쓸 만했지. 본인도 그리 여겼을 텐데?”

“…….”

“검성의 가장 엿 같은 점은 사람의 트라우마를 아무렇지 않게 건드린다는 거야. 건드리는 것으로 모자라 끝없이 자극해서 돌아 버리게 만들지. 극복하지 못한 놈들에겐 검술을 가르치지도 않아. 한데 그렇게 구더기를 굴러도 두 번째 벽 이상은 도저히 넘지 못하겠더군.”

트라우마라.

안데르트의 증언에 의하면, 검성의 수련 방식과 로궤의 수련 방식은 닮은 점이 많아 보였다.

“이 벽을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넘을 수 있을까? 그런 의문에 젖을 즈음부터는 검성이란 존재가 까마득하게 느껴지게 돼. 이 남자는 어떻게 세 번째 벽을 넘은 걸까? 도대체 어떠한 삶을 살아온 걸까?”

“…….”

“진짜 배움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검성은 우리를 그렇게 가르쳤어. 뭐, 쓸 만한 녀석들에게는 나중에 사람도 죽이게 하고, 여러모로 인간적인 스승이라 할 수는 없지만. 강함을 쫓는 자가 선택하기에는 그보다 나은 스승이 없지.”

어울리지 않게 줄줄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묻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의문이 들었다.

“너는 왜 강해지고 싶은데?”

안데르트와 진은 어떤 계기로 힘을 추구하게 됐을까?

‘이 정도로 이를 가는 걸 보면 보통 굴리는 게 아닐 것 같은데.’

안데르트는 내 질문에 답하기는커녕 눈 하나 깜짝 않고 반문했다.

“나야말로 묻고 싶군. 너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살았기에 그 나이에 그 경지를 오른 거냐?”

네 원수를 갚다 보니 어찌저찌…….

“스승님이라고 불러 봐. 그럼 말해 줄게.”

“지랄.”

코웃음 친 안데르트가 긴 다리를 휘적거리며 높은 층의 좌석으로 멀어졌다.

‘이상하게 요즘 좀 조용하단 말이지.’

미드윈트리에서는 괴상한 퀴즈를 내기 바빴는데, 과거 기억을 빌미로 아스트로사에 끌고 온 후에는 이상하리만치 얌전하다.

‘외국이라서 소심해진 건가?’

그럴 자식이 아닌데.

가장 폭탄 같은 녀석이 조용히 구는 건 환영할 일인 만큼 일단 관심 없는 척했다.

안데르트가 자리를 뜬 후 나는 잠시 머리를 정리했다.

명색이 가르침을 주기로 한 입장에서, 진을 너무 혼자 두고 있었단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다고 그간 아무 생각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너에게 검술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아.”

진이 조금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정확히는 못 가르쳐 주는 거지. 난 검술 같은 고급 기술을 배운 적 없거든. 그리고 네게 필요한 건 단순히 무력의 경지가 오르는 게 아니라고 판단을 내렸어.”

진은 이미 숙련된 검사다.

나처럼 전쟁터를 누비다 어중이떠중이로 검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고, 무려 검성이라는 희대의 천재 아래에서 배운 인재였다.

따라서 베기나 찌르기 따위가 부족한 상황은 아닐 테다.

“어째서입니까?”

“너는 검귀니까.”

“……그 말은, 제가 완전 동화될 수 있기 때문에 더 강해지면 안 된다는 뜻입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네가 완전 동화해 봤자 나 혼자 저지할 수 있는데.”

“아, 그렇죠.”

조금 머쓱하게 웃은 진의 얼굴에 미약한 안정감이 들었다.

나는 진이 검귀라는 벽을 뛰어넘게 도우려는 마음이 가장 크다.

어찌 되었든 내게는 비슷한 경험이 존재했으니, 비슷한 방식으로 가르칠 수 있지 않을까.

“소중한 사람 하면 떠오르는 얼굴 있어?”

진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동생이 떠오릅니다.”

“저번에는 가족이 없다며?”

“네. 제 가족은 동생뿐이었는데, 오래전에 죽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 떠오르는 얼굴은 없어?”

“없습니다.”

“오랜 친구는?”

“없습니다.”

“연인은?”

“없습니다.”

난관일세.

검귀란 검에게 휘둘리는 존재.

때문에 검에 대한 통제도 쉽게 잃기 마련다. 이 통제를 완전히 잃었을 때 겪는 현상이 완전 동화였다.

하지만 나는 두 번째 벽을 넘으면서, 육체의 진화는 얻지 못할지언정 완전 동화를 저지할 통제력은 얻었다.

그렇다면 이 통제력은 어떻게 얻었는가?

검귀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검귀인 ‘나’를 완전히 받아들임으로써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두려움은 어찌 극복할 수 있었는가?

“이 상흔은 내 자랑이야. 후후. 펜 로타의 역대 황녀들 중 이런 영광스러운 상흔을 지닌 자는 나밖에 없을 거다. 영웅이 남긴 상흔이라니!”

검귀인 나도 자랑스럽다고 다독여 주는 존재.

“제가 신뢰하는 이들에게 상처 주지 않도록. 끝끝내는 선배님처럼 이겨 낼 수 있도록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검귀이기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한 존재.

“내가 살아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검 같은 건 버리라고. 검을 휘둘렀던 시간 따위 없던 일로 해. 너 좋다는 하녀로 그냥 살아.”

검귀란 내 일부에 불과함을 알려 준 존재.

이들 덕분에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필요로 하는 주변인들이 없었다면 평생 불가능했을 깨달음이다.

한데 친구도 가족도, 하물며 연인도 없는 검귀라.

“아무것도 없다면 벽을 넘는 건 포기해.”

“…….”

“포기하기 싫으면 일단 친구부터 만들고.”

“……꼭 그래야 합니까?”

“응.”

“이유를 알려 주십시오.”

입술을 달싹이려다 말았다.

내가 깨달은 바를 언어로 전달해 봤자 큰 의미 없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나는 진에 대해 아는 게 없어.’

심지어 ‘검사 진’이라는 존재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조차 던진 적 없다.

“너는 왜 강해지고 싶어?”

살짝 주저하던 진은 준비된 자세로 답을 내놓았다.

“대마법사 메피스토가 살아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아, 이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 등장할 줄은.

“그는 죽었어, 진. 안데르트 파거와 함께 공멸했지. 벌써 4년이 흐른 일이야.”

“하지만 누구도 그들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잖습니까?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때를 기다리며 힘을 기르는 중일 수도 있겠죠.”

어, 그거 생각 외로 아주 건실한 이유인걸. 세상을 지키고 싶다는 거잖아? 영웅의 재목이네.

“메피스토의 부활이 걱정돼서. 강해지려는 이유는 그것으로 끝이야?”

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번 질문에 대한 답은 준비해 두지 않은 모양이다.

그 말은, 이쪽의 이야기가 더 솔직할 확률이 높다는 뜻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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