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그럴 거면 내게는 왜 진실을 밝힌 겁니까?”
“모르겠으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
나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람 일이라는 게 다 그랬다.
이게 맞는 것 같고, 필시 그래도 괜찮은 것 같은데 막상 행동으로 옮길 마음은 들지 않는다.
드셰로 앞에서 내가 안데르트임을 인정한 것도 어느 정도는 충동적인 판단에서였다.
어쩌면 감정적인 판단이란 말이 더 옳을 수도 있겠다.
세레니예 백작의 갤러리를 방문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든 드셰로의 추리를 망가뜨리고 묵살시키려 했을 테니까.
이래서 앞날은 어찌 될지 모른다고 하나 보다.
“예나 지금이나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살면서 이토록 오리무중인 사람은 그쪽밖에 못 봤어요.”
“그래? 루는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온 것처럼 아주 훤히 꿰뚫던데.”
“루?”
흠흠.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이…….
“하여간. 약속 지켜 줄 수 있지? 이제 나는 가진 거라곤 옷 한 벌이 전부인 불쌍한 하녀라고. 좀 봐줘.”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푸욱, 내쉰 드셰로가 조금 껄끄러운 투로 반문했다.
“……그런데 정말 안데르트 누이로 소개해도 되는 겁니까?”
“안데르트의 엄마는 조금 그렇잖아. 애초 우리는 어릴 때 부모님을 잃었다고.”
“그게 아니라. 솔직히 라파엘로가 누이라는 변명 따위에 속아 넘어갈지 의문이긴 합니다만. 속는다 치더라도 당신 입장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문제? 잘 속아 넘어가면 문제될 게 있나?
“연좌제?”
잠깐. 나 죽는 거야?
다행히 드셰로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아닌가 봐. 들은 척도 안 하며 망설이던 그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혹시 결혼을 염두에 두고 만나고 있는 상대가 있습니까?”
엉뚱한 질문이다 싶었지만 대답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없는데.”
“연인은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루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머리를 휘저어 재빨리 지워 냈다.
“없어.”
“마음에 둔 사람은요?”
이유는 정말정말 하나도 모르겠지만 루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사실은 어느 정도 알 것 같기…… 젠장.
뭔가 열받는 기분이라 이를 갈며 부정했다.
“절대. 없어.”
그런데 돌이켜보니 화제가 다소 익숙한 느낌이다.
결혼. 결혼이라……. 어디서 들었더라…….
“누이가 있다고 했나? 안타깝게 됐군. 살아 있었다면 전쟁 영웅을 남편으로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날 말하는 거다.”
아.
설마.
불안의 끄트머리에서 드셰로가 쐐기를 박았다.
“공작 각하께서 결혼을 미루시는 이유는 순전히 신뢰할 상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죽음에는 크나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지요. 만약 안데르트의 누이로 알려진다면 청혼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철심으로 만든 그 쐐기는 내가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그놈이라면 정말 그럴지도 몰라.’
라파엘로는 실없는 소릴 하는 성격이 아니다. 가볍게 던진 몇 마디에도 항상 진심을 담는 이였으니까.
“나는…… 평민이야.”
“그리고 안데르트 파거 경은 황제 폐하께 작위를 수여받았죠. 그는 이제 파거 경이 아닌 블라디에프 백작입니다.”
“블라디, 뭐라고?”
“블라디에프 백작이요. 공작 각하라면 당신을 죽은 영웅의 친족으로 인정받게 할 수 있고, 그날부로 데이지 파거는 작위를 물려받아 데이지 블라디에프 백작이 될 겁니다. 귀족이 되는 거지요.”
“그래, 떠올랐어. 내가 죽고 작위를 수여받았다고 했지.”
드셰로는 이미 확신하는 투였다.
하지만 나는 그의 주장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라파엘로의 진의를 의심하는 건 단연코 아니었다. 단지.
“결혼만이 책임의 전부는 아니잖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까지 한다는 거야?”
“당신은 안데르트의 흔적이니까요.”
“흔적인 게 뭐 어째서?”
“그와 형제이며 그와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안데르트, 당신이 그렇게 떠난 후 공작 각하는 지독한 수면 장애에 시달렸습니다. 지난 3년간은 미친 듯이 당신의 흔적만 찾아 헤맸어요. 하지만 끝끝내 실패했고, 이제야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는데…….”
내가 돌아왔구나.
드셰로는 오천 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합니다. 당신을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죽음으로 그분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는 건 과장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정체를 계속 숨길 생각이라면, 부디 재고해 달라고 요청드리고 싶군요.”
재고해 달라고?
나름 정중한 부탁이었는데도 어째서 욱하는지 모르겠다.
“드셰로.”
“말씀하세요.”
“나는 앞으로 10년밖에 살지 못해.”
그의 눈이 커졌다.
어느 방면으로는 내가 휘두른 검에 목이 잘릴 위협에 처한 순간보다도 더 커진 것 같았다.
그만큼 놀랐다는 뜻이겠고, 그만큼…….
“어째서, 고작 10년밖에…….”
“방금 무슨 생각했어? 불쌍하다는 생각? 아니면 미안하다는 생각?”
“…….”
“나는 너희에게 그런 죄책감이나, 빚 같은 감정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 애당초 독단으로 자원해서 메피스토 성에 잠입한 거고…….”
“그럼 당신은 괜찮습니까?”
드셰로가 나 못지않게 살짝, 아니, 대놓고 욱한 얼굴로 대거리했다.
“안데르트, 당신은 영웅이에요. 일생을 대접받아 마땅합니다. 평생을 추앙받아 마땅해요. 하녀로 살며 빌어먹을 귀족 나부랭이들에게 무시받을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갤러리에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다.
내가 메피스토와 공멸한 이후에도 항상 저런 생각을 품고 다녔던 것일까?
“우리가 당신에게 미안해하면 왜 안 되는 겁니까? 왜 당신을 안쓰러워하지 않으면 안 돼요? 자연스러운 감정이잖아. 그냥 둬요. 흘러가게 내버려 두고, 그냥 우리를…….”
이렇게 화가 난 모습의 드셰로는 오랜만이었다.
……화났다고 설마 주먹으로 날 치지는 않겠지? 그래도 나 하녀인데?
“우리를, 우리와, 아니, 우리에게…… 돌아오면 되잖습니까.”
우울한 침묵이 찾아왔다.
두 사람분의 호흡만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문득 전쟁터에서 그와 구르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참 많이 다퉜다.
감정의 격분을 못 참아서 어린애처럼 주먹을 휘두르다 바닥을 구르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의견이 절충되지 않으면 몇 날 며칠을 서로 무시하기도 했고, 어린아이처럼 하찮은 일을 걸고넘어지고는 했다.
그 시절에 비하면 너무나도 평화로운 나날들인데.
구태여 싸울 필요가 있을까.
“미안.”
그래서 먼저 사과했다.
‘말하고 보니 내가 너무 매정했던 것 같기도 하고.’
만년 2등에게 1등 자리를 빼앗기기라도 한 것처럼, 다소 거칠게 가슴을 들썩이던 드셰로는 천천히 자신의 감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아주 피곤한 얼굴로 마른세수했다.
“나야말로 미안합니다. 당신도 그런 비밀을 밝히기 쉽지 않았으리라는 건 알아요. ……건강은 괜찮은 겁니까?”
“튼튼해. 말똥 후작쯤은 한 손에 제압할 수 있어.”
“그렇다면 당신이 시한부인 이유는 다른 쪽에 문제가 있는 거겠군요.”
“그만 탐색해라. 어?”
“죄송합니다, 습관이라서. ……일단은 당신의 부탁대로 움직이겠습니다. 주제넘게 나서는 것도 좋은 그림은 아닐 것 같군요. 아! 혹시 웨더우즈 자작도 당신의 정체를 압니까?”
알지. 웨더우즈 자작도 나인데.
하지만 같은 저택에서 일하는 진이라면 모를까, 라파엘로의 최측근인 드셰로에게 쉽사리 밝히기 힘든 정보다.
어떻게든 대충 둘러대야 한다.
“대강은…… 알고 있고, 나를 먹이고 재워 주는 대가로…… 자작이 바쁠 때마다 그를 대신해서 모습을 변신해…….”
“변명할 필요 없습니다. 버클리그레이튼 공작님으로부터 웨더우즈 자작이 검도 뽑지 않은 채 진 양을 찍어 누른 것 같다고 전달받았으니까요. 당신이 아니면 누가 그러겠습니까?”
“웨더우즈 자작도 나 못지않게 뛰어난 검사라…….”
“그렇담 제나일 공작가에서 제가 직접 웨더우즈 자작을 만나고 그와 대화해 봐도 괜찮겠습니까?”
“…….”
“…….”
“…….”
“인정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매정한 자식.
“말하면서 깨달았는데…… 곧 제나일 공작가에서 만나겠군요. 이거 참.”
하아아아. 드셰로의 오억 번째 한숨이 터졌다.
“생각할 게 많아지는 밤입니다…….”
이런 나라서 다시 미안.
드셰로는 수심에 잠긴 낯으로 등을 돌렸다.
“밤이 늦었으니 우선은 돌아가야겠습니다. 언젠가 더 자세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오겠죠. ……아, 이 말을 깜빡했네요.”
문 앞에 서서 슬쩍 고개만 돌린 드셰로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백작위에 오른 것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