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195)

92화

드셰로가 꽉 쥐고 있던 내 손을 펼쳤다.

“당신의 손은 부드럽군요, 데이지 양.”

“…….”

“굳은살이 살짝 박여 있기는 하지만 검사의 굳은살은 아닙니다. 집안일로 생긴 흔적 정도라 볼 수 있겠네요. 그럼에도 당신은 검기를 사용했죠. 심지어 능숙하게 변형된 검기로 메데이스 후작의 머리를 전부 태워 버렸어요. 설마 내가 그 정도도 못 알아차릴 거라 생각했습니까?”

“…….”

“검에 미숙한 육체를 지닌 자가 어떻게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가? 답은 하나입니다. 영혼의 격이 높기 때문이지요. 당신의 영혼은 뛰어난 검사의 영혼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안데르트 파거와 동일한 위치에 동일한 맹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겠지요.”

나는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포기한 것만이 아니다. 드셰로가 내뱉는 말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있었다.

반박할 근거를 찾기 위해서? 글쎄.

그저 궁금해졌을 뿐이다.

드셰로가 어떤 부분에서 나를 연상했는지. 어째서 나라고 확신하는지.

“한 번 더 묻겠습니다. 당신은 안데르트 파거가 맞습니까?”

꼭 그렇게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봐야만 하는지.

참고 있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길은 두 개였다.

순순히 내 정체를 인정해야 하는가? 아니면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려서라도 헛소리 말라며 화내야 하는가.

며칠 전의 나라면 고민 없이 후자를 골랐을 것이다. 애초 그리 마음먹고 퀸 섬을 나왔으니까. 절대 이들과 다시 엮이지 않겠다고.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매정한 안데르트. 이 매정한 놈. 우리 전쟁이 끝나면 이곳에 다시 돌아오자. 함께 꼭. 그럴 수 있지? 그치…….”

나타샤의 표정이.

“가만 보면 너는 전쟁터에서 죽고 싶어 안달 난 녀석 같다.”

라파엘로의 목소리가.

“그에게는 평화를 누릴 권한이 있었습니다. 전운이 물러난 하늘을 올려다볼 권리가 있었어요. 남은 일평생을 영웅으로 대우받고, 찬양받으며 살아갈 의무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드셰로, 너의 격양이.

‘자꾸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그래,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지금의 나로서는 이 혼란에 답을 내릴 수 없다는 것.

“……아쉽네, 드셰로 경. 여전히 그렇게 똑똑하다니.”

그러니까, 더는 고민할 필요 없다.

파지지직.

진주 검을 뽑았다.

옅은 소용돌이가 치면서 새하얀 캐노피와 커튼이 요동쳤다. 나는 부릅뜬 검은 눈동자를 응시한 채 사납게 경고했다.

“계속 모르는 척했다면 좋았을 텐데. 기어코 내 답을 듣겠다면 어쩔 수 없지. 경의 눈썰미를 원망해라.”

유언은 필요 없었다. 나는 그대로 검을 내리그었다.

“……는 농담이고.”

하아.

‘어쩌다 이렇게 됐지?’

나는 검사 주제에 반쯤 넋이 나간 드셰로를 노려보다가, 진주 검을 다시 귀걸이 안에 쑤셔 넣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털자, 머리핀 사이로 볼품없이 튀어나온 머리칼이 내 손가락을 휘감았다.

어색했지만 당연한 일이다.

지금의 나는 안데르트 시절의 짧은 머리가 아니라 단정하게 묶인 하녀의 머리였으니까.

“이…….”

이, 도움이라고는 쥐뿔도 안 되는 간자 드셰로 같으니라고.

나는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로 드셰로를 질타했다.

“변태야? 뭘 그렇게 열심히 탐색한 건데? 무슨 생각으로 북대륙까지 뒤쫓아 왔나 싶었더…….”

순간 따뜻한 온기가 훅, 끼쳤다.

“살아 있었군요.”

온기의 주인은 드셰로였다.

내 어깨를 와락 껴안은 채 그의 체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감는다.

발버둥 치지 못할 힘이 아니었음에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정말 살아 있었어. 혹시나 싶었는데, 내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는데 정말…….”

울컥하며 흐릿해지는 끝말.

‘이러면 더는 화낼 수도 없는데.’

나는 힘 빠진 그의 등을 어색하게 두드렸다.

집 나간 자식을 되찾은 부모처럼 날 꽈악 껴안고 있던 드셰로는 한참 만에 포옹을 풀었다.

“안데르트.”

그러고는 흥분과 기쁨, 의문, 안도의 감정이 뒤섞인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날 흔들었다.

“말 좀 해 봐요. 어떻게 살아 있는 겁니까? 그간 어디 있던 거고요? 이 꼴은 또 뭐예요. 이런 모습이니까 라파엘로도 못 알아본 거 아닙니까? 왜 여자가 되어 있는 겁니까?”

뭐, 정체가 들킨 만큼 더는 숨길 필요 없겠지.

“여자가 된 게 아니야.”

“…….”

“나는 원래 여자였어.”

세상이 멈춰 버린 듯한 무거운 정적이 찾아왔다.

그렇게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던 드셰로가 아주 천천히, 천천히 몸을 뗐다.

이어서 한참 걱정스러운 낯으로 “그사이 미쳐 버린 건가.” 하며 중얼거리다가, 몇 초 더 내 눈을 들여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정말로, 어떻게 된 일입니까?”

솔직히 말해서, 드셰로의 침착한 물음에 나는 깊이 안도했다.

그렇다. 나는 안심했다.

‘원망하지 않는 건가.’

원망은 하더라도 최소한 내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있는 걸까.

나는 너희를 속였는데. 사정 정도는 말해도 된다는 걸까.

진지하기만 한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조금 들뜨려고 한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안데르트는 내 동생의 이름이야. 군에 복무하다가 메피스토의 공습을 받고 전사했지. 나는 그 애의 원수를 갚기 위해 마법으로 안데르트의 얼굴을 빌리고, 안데르트 그 자신이 되어서 전쟁에 참전했어……. 흔한 사정이지.”

“흔하다고요? 아니요! 절대 흔한 사정이 아닙니다. 그럼 안데르트 경이 말한 누이가……?”

“나였어.”

드셰로가 바보 같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저런 표정의 드셰로는 드물지.

실컷 봐 둬야겠다 생각할 즈음, 어깨를 부여잡고 있던 손이 신속하게 거두어졌다.

“미안합니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당신의 소매를 멋대로…….”

드셰로는 다소 횡설수설하며 자신의 태도를 사과했다.

“미안하기는. 다른 쪽도 깔까?”

“아니요! 안 됩니다, 절대 그러지 마십시오. 그런 식으로 장난스럽게 행동해서는 안 돼요. 저 같은 남자 앞에서는 특히나요.”

단호하게 주의하는 낯짝을 보고 있으려니 속이…… 속이…….

“내 아빠처럼 굴지 마, 소름 돋아.”

“뭐라고요?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지긋지긋한 얼굴로 미간을 매만진 그가 내게 물었다.

“그렇다면 안데르트, 아니, 데이지 양. 아니지, 당신의 이름은?”

“나는 그냥 데이지야. 앞으로도 데이지일 거고. 그러니까 데이지라고 불러.”

한참 이마를 두드리던 드셰로는 오묘하게 굳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뭐가? 데이지 파거로 사는 게?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괜찮아. 오히려 좋은 부분도 있고.”

“……그렇군요.”

자연스럽게 내 팔뚝으로 뻗어 나오던 손이 허공에서 멈춘다.

그는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손을 내렸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드셰로가 내 몸에 최대한 손을 대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는 걸.

습관처럼 어깨를 두드리거나 가볍게 건드리려는 행동을 의식적으로 자제하는 게 내 눈에 보였다.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걸 알았으니 배려하려는 거겠지.’

조금, 씁쓸했다.

“당신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만…… 그래도 가장 하고 싶은 말은 하나입니다.”

“욕설만 하지 마.”

“살아 있어서 다행입니다.”

장난스럽게 건넨 경계가 무색하게,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자신의 말을 되씹듯 입술을 달싹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그래, 다행이지. 요절하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운 인재였잖아?”

내 농에 긴장이 풀린 걸까?

픽 웃은 드셰로가 한층 가벼워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은데…… 그간 숨어 있었습니까? 퀸 섬에서 나타났다고 들었는데. 설마 그 황량한 땅에서 버티고 있던 거예요?”

아니. 죽어 있었는데.

“말하자면 복잡해. 나도 완벽하게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이 없거든.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 헤매는 중이지.”

살짝 멈칫한 후 그에게 당부했다.

“라파엘로에게는 말하지 말아 줘.”

상대의 입이 다물렸다.

복잡한 심경이 엿보이는 검은색 눈동자가 내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열고 닫히기를 여러 번 반복하던 드셰로의 입술이 수 초 후에야 열렸다.

“당신이 여자이기 때문입니까?”

정곡을 잘 맞췄네.

“그것 때문도 있고. 괜히 4년 만에 나타나서 들쑤시고 싶지 않아.”

“하지만 라파엘로, 아니, 공작 각하께서는 고작 그런 연유로…….”

“알아.”

설득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는 나도 안다.

라파엘로는 고작 성별 따위로 실망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웨스트윈트리의 버드나무 숲에서 본 과거가 내게 그 확신을 심어 주었다.

이 녀석들은 중대한 비밀을 숨겼다는 이유로 날 질타할 이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살아 돌아온 나를 환영할 테지. 눈앞의 드셰로처럼.

“아는데……. 아예 모르는 척하라는 뜻은 아니야. 너와 라파엘로의 관계를 아는데 내가 어떻게 그러겠어?”

“그럼요?”

“라파엘로가 나에 대해 묻는다면 그냥, 안데르트 본인은 아니고 누이인 것 같다고만 흘려줘.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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