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195)

91화

그날 밤.

나는 왕성을 누비고 있었다.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린 것은 아니고, 내일 있을 입교 심사를 대비해 몸을 푸는 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후원도 넓은 김에 검을 휘두르고 싶지만.’

왕성에서는 국왕과 그 친위대를 제외하고선 무기를 들 수 없다고 하니, 기껏해야 달리기나 스트레칭 정도가 내가 신경 쓸 수 있는 전부였다.

“거기! 장미 덩굴 앞에서 넋을 뺀 여자. 누구냐.”

“그만둬, 형씨. 국왕 폐하의 손님이시니까. 3시간 전부터 후원에서 산책하는 걸 봤으니 조용히 지나치자고.”

“3시간? 같은 인물 맞는 거지?”

“흠.”

같은 인물 맞다, 이 녀석들아.

‘너무 오래 걷기는 했지.’

늦은 밤, 갈색 머리의 여자가 3시간 동안 돌아다니고 있으니 미심쩍을 만했다.

코를 찌르는 장미 향을 쓸데없이 오랫동안 맡아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후각도 마비된 것 같다.

멍하니 걷기만 하니 오늘 하루 겪었던 일들에 대한 잡념도 저 멀리 날아가 버리는 듯했다.

이제 슬슬 돌아갈까 싶어 걸음을 돌린 순간이었다. 장미 덩굴 앞에 선 한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저 눈에 띄게 바른 자세는…….

“드셰로?”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우두커니 선 남성이 나를 돌아봤다.

기실 나는 드셰로가 조금 껄끄러운 상태였다.

귀족회에서 재회한 직후에도 껄끄러웠지만, 오늘 함께 세레니예 백작의 갤러리를 둘러본 후에는 두 배로 껄끄러워졌다.

양심을 쿡쿡 찌르는 죄책감의 창날이 더욱 날카로워진 까닭이다.

‘게다가 내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도 봤고.’

메데이스 후작의 머리를 태울 때, 드셰로를 의식해서 오른손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불편한 건 여전했다.

‘하녀가 어째서 검을 휘두르느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지?’

웨더우즈 가문의 숨겨진 병기라고 말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체력 단련용 취미라고?

나는 차마 가까이 다가갈 용기는 없어, 멀찍이 멈춘 채 물었다.

“왜 거기 멍하니 서 있어요?”

“별일 아닙니다.”

그렇다니 무시하고 갈 길을 가려고 했다.

정 없이 지나치기 뭐해 힐긋 그를 살피니, 검지 끝에 맺힌 붉은 핏방울이 보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상처를 무시하고 가 버릴 정도의 무정함까지는 좀.

“가시에 찔렸어요?”

“예. 어두워서…….”

웬일로 변명이래.

‘뭐 정말 별일 아니긴 한데.’

재수가 없으면 작은 불씨도 큰 불길로 번지는 법.

후, 어쩔 수 없군. <열일하는 하녀를 위한 휴대용 응급 처방 세트>를 사용할 때인가.

원래 여행에 응급 처방 세트는 필수다.

이날을 위해 잡화점 세일 기간에 미리 구입해 둔 게 다행이었다. (출국 이틀 전에 사 놨다.)

문제는 방에 있다는 건데.

“따라 오세요.”

“예?”

“날 따라 오라고요.”

드셰로는 어리둥절한 낯을 하면서도 착실히 내 뒤를 따랐다. 본성으로 들어가 2층 계단을 오르고 침실의 문을 열 때까지는.

활짝 열린 문 앞에 우뚝 선 드셰로가 조금 복잡해진 눈으로 물었다.

“데이지 양, 무슨 의도로 나를 방에 들이려는 겁니까?”

“대단한 의도가 있죠. 당신의 손가락을 치료하려고요.”

“치료할 정도의 상처는 아닙니다.”

“그래도 들어오세요. 약 바르고 바로 내보내 줄게요. 흑심 같은 거 없어요.”

곱게 들어와라.

지금 아니면 <열일하는 하녀를 위한 휴대용 응급 처방 세트>를 평생 못 쓸 것 같으니까.

눈빛으로 보낸 경고가 통했는지 드셰로가 슬쩍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신이 난 기분으로 양철 상자를 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새 타박상용 연고와 새 일회용 접착 밴드가 보인다.

“손 주세요.”

크고 울퉁불퉁한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손톱 밑에 크게 뜯긴 살점, 아직 안 나았구나.

그의 손목을 잡고 손가락 소독을 위해 고정하려던 때였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뻗은 손이 그대로 잡혀 버렸다.

“당신은 진짜 데이지 파거입니까?”

심지어 아주 강하게.

그 순간 나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드셰로의 거친 손바닥만 멍하니 내려다봐야 했다.

그와 눈을 마주치기 두려워서.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이토록 두서없이 그런 걸 묻는다고?

빨라지는 심장 박동에 숨이 거칠어지기 직전. 재빨리 정신 차린 후 고개를 들었다.

이런 데서 당황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나는 하녀입니다.”

“그건 보면 압니다. 내 말은……. 베르티 루샨이 진짜 이름인지, 데이지 파거가 진짜 이름인지 묻고 있는 겁니다.”

……베르티 루샨? 이 자식 어떻게 남의 친구 이름을 알고 있지?

…….

아.

“제나일 공작 각하께서는 지난 4년간 제국 남부 군도의 보안 책임을 맡아 오셨습니다. 종전 후 드물게 군도에서 생존자가 나타나고 있고, 이 생존자를 보호 겸 감시하는 일 역시 공작 각하의 의무이지요.”

그래, 그래서 들킨 거구나.

‘동네 사람들 중 일부는 베르티의 사망 소식을 아니까. 거기서 뒷조사를 한 건가.’

나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정체가 들킨 게 아니었어.

이러나저러나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긴 힘들 것 같았다. 일단 질문의 의도를 알아내야 한다.

“어째서 그런 걸 묻는 건지 모르겠네요. 베르티 루샨이 진짜 이름이면, 없던 문제라도 생겨요?”

“생기겠지요. 이미 죽은 인물이니 말입니다.”

“시체를 봤대요?”

대답과 동시에 흙 속에 묻혀 있던 베르티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어서 그다음은 안데르트가 떠올랐다. 뺨에서 턱 아래까지 가로지르던 긴 상흔이.

그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선명한 상처가.

어쩐지 욱하는 기분이 들었으나 능숙하게 참아 내고 뒷말을 이었다.

“베르티 루샨의 시체를 봤대요? 안 죽었으면요. 죽은 줄 알았지만 멀쩡히 살아남아 잘 살고 있다면요?”

“죽은 줄 알았지만 멀쩡히 살아 있다. 당신은 그럴 수 있다고 여기나 보군요.”

또렷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던 드셰로가 양쪽 눈꺼풀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무엇을 망설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짧고 무거운 침묵 끝에 그의 망설임은 종점을 맞이했고.

“그건 당신의 이야기입니까? 안데르트.”

내 심장은 땅으로 떨어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되묻기 무섭게 그가 내 손을 뒤집었다.

손이 뒤집히자 팔도 같이 뒤집혔고, 드셰로는 망설임 없이 내 소매를 잡아 올렸다.

그리고 드러났다.

나란히 각인된 맹세의 흔적이.

“제가 오늘 세레니예 백작에게서 한 장의 사진을 양도받은 걸 기억하십니까? 그 사진 속에는 세 명의 남자가 서 있었죠. 저와, 라파엘로 제나일 공작 각하 마지막으로 안데르트 파거.”

나는 상의를 탈의하고 있던 세 인물을 떠올렸다.

“사진 속 안데르트의 팔뚝에도 이런 맹세가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당신의 맹세와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각도, 똑같은 크기로 말이죠.”

……이런.

‘X 됐다.’

아니, 아니야. 아직은 X 되지 않았다.

‘이건 억지야. 4년 전의 내 팔에는 맹세의 흔적이 둘뿐이었어. 셋으로 늘어난 지금과 똑같을 수가 없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흔적의 개수를 지적할 수는 없었다.

드셰로의 거짓말일 수도 있으니까.

실제 사진에는 맹세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럼 개수가 다른 걸 지적해도 문제가 된다.

드셰로는 4년 전에도 이미 내 몸에 두 개의 흔적이 각인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사진을 언급하는 건 미끼일 확률이 높았다.

“우연이겠죠. 증거로 삼기에는 너무 빈약하네요.”

가장 무난한 대처였다고 생각했다.

일자로 닫혀 있던 드셰로의 입이 기다렸다는 열리기 전까지는.

“데이지 양, 저는 대륙의 내로라하는 검사들과 10년 가까이 함께했습니다. 검에 대한 재능은 그들에 비할 바 아니지만, 제 목숨 하나 정도는 보전할 실력도 가지고 있지요. 당신은 나를 속이기 위해 오른손으로 검을 잡더군요.”

“근거는?”

“간단합니다. 당신이 오른손잡이였다면, 마의 검이 깃든 귀걸이 역시 오른쪽 귀에 착용되어 있었을 겁니다. 반대편 귀를 사용하는 건 효율적이지 않으니까요. 또 당신은 평소 생활에 왼손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차를 마실 때도, 방향을 지시할 때도, 물건을 집을 때도 전부. 짝다리를 짚을 때조차 왼쪽 다리로 짚었으니 말 다 했군요.”

그는 꽉 붙잡고 있는 내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뒷말을 이었다.

“하지만 악수할 때만은 오른손을 사용했지요. 나와 비행장에서 만났을 때처럼요. 오른손잡이가 대개인 사회에서, 배려가 몸에 밴 왼손잡이들이 주로 보이는 습관입니다.”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쉬지 않고 혀를 놀리는 드셰로의 모습이 너무나, 너무나 변태 같았기 때문이다.

‘그걸 대체 언제 다 탐색한 거지.’

예리한 남자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심하잖아?

“……그래서. 맹세의 흔적 위치가 같은 데다, 왼손잡이 검사라는 것. 이 둘만으로 지금 내 신분이 의심된다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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