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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90/195)

90화

놀라서 입이 벌어졌다.

이 아연함은 불쾌함이 아니다. 수치심이나 치욕을 느낀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4년 전의 나를 사진으로 마주한 기쁨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아, 여기 있네. 이쪽에 드셰로 자작이 보여.”

흠칫 어깨를 떨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저만치 앞으로 걸음을 옮긴 세레니예 백작이, 벽에 걸린 액자 중 하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보니 자네도 참 어린 나이였군. 몇 세였지? 열아홉? 스물?”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드셰로는 어떤 면으로는 나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낯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말문이 막힌 표정은, 마치 예기치 못한 거대한 비밀을 마주한 듯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느리게. 그리고 나중에는 눈에 띄게 빠른 발길로 세레니예 백작 앞에 도착한 그가 물었다.

“세레니예 백작님. 죄송하지만 이 사진들을 어디서 구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응? 그야 연합군에게서 구했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는 이 사진들의 주인공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함께했습니다. 사진기를 들고 다니는 부대원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타당한 의문이었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를 전쟁 통에, 어떤 미친 군인이 사진기를 품고 다닌단 말인가?

물론 가끔 소중한 물품이라며 사진기를 들고 다니는 이들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필름 자체가 소모품이었고 전쟁을 거치다 보니 나중에는 결국 제 구실을 못 하는 고장 난 사진기만 남을 뿐이었다.

‘이런 역동적인 구도와 사실적인 풍경은 절대 담아 낼 수 없지.’

그러니까 드셰로의 입장에서, 이 갤러리 안에 전시된 사진들은 여러모로 께름칙할 수밖에 없었다.

마도 전쟁은 몹시 길고 또 잔혹했던 전쟁이다.

그 와중에 전선의 핵심이나 다름없던 우리의 모습이 이토록 가깝고 또 생생하게 찍혔다.

그 말은 수뇌부가 모르는 새, 연합군의 주요 작전과 각종 기밀들이 새어 나갔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세레니예 백작의 의미심장한 미소가 그런 의심을 한층 가중시켰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드셰로 자작? 이런 멋진 작품을 남길 수 있는 군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겠나?”

“예. 단언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 말을 듣고는 조금 놀라겠군. 나도 마도 전쟁에 참전했었다네. 자네와 함께 말이지.”

깜짝 놀란 나는 다급히 그들 쪽으로 걸음을 틀었다.

‘루가 전쟁에 참전했다고?’

마법으로 외형을 바꾸고 참전한 건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부정하기가 힘들었다.

그 사실을 모를 드셰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눈으로 반문했다.

“진심……이십니까?”

“자작을 상대로 내가 뭣 하러 농을 하겠나. 별로 즐겁지도 않은 것을.”

“어느 부대에 계셨습니까? 어째서 정체를 숨기고…….”

“그 전쟁에 진정 연합군만 참전했다 여기는 건 아니겠지? 로궤 소속 마법사들 중 일부도 펜 로타 황제의 허가를 받고 신분을 숨긴 채 연합군에 합류했다. 이 사실은 군 수뇌부 관계자인 자네도 이미 아는 사실일 거야.”

선뜩한 빛의 금안이 드셰로를 응시하다가 건조하게 되물었다.

“그것보다는, 드셰로 자작. 자네는 이 예술 작품이 어떤 특정 인물을 위해 존재하는지 아는 것 같은데 말이지. 누구라 생각하나?”

드셰로의 답은 거침없었다.

“안데르트 파거.”

그리고 내 입 안의 침은 사막 한복판처럼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백작님은…… 안데르트, 그 남자를 아십니까?”

“아무렴. 세상에 안데르트 파거를 모르는 이가 과연 존재할까. 그는 영웅이지 않나?”

조금은 수줍고 또 그리운 목소리가 너른 천장을 울렸다.

“꽤 절절한 팬이야. 본인은 모르겠지만.”

정확히 나를 바라보면서.

갤러리 내로 들어선 이후. 내내 드셰로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처음으로 나를 돌아봤을 때.

희미한 기억 너머로, 물거품처럼 피어오르는 간지러운 음성이 내 가슴을 찔렀다.

“그만 능구렁이처럼 굴고 대답해. 당신 누구야? 여기에는 왜 왔어?”

“네 팬이라서.”

그 순간 더는 물거품이 없었다.

대신 활짝 열린 목 안으로 모래가 쏟아지는 듯했다.

몸 안으로 굴러떨어진 모래는 심장 안에 차곡차곡 쌓여 이내 넘칠 기세로 채워져 갔다.

“이건 무엇입니까?”

“아, 그건 안데르트 파거의 관이라네.”

“관? 설마 이 안에……!”

“응? 설마 영웅의 시체가 있느냐고 묻고 싶은 건가? 그야 텅 비었지. 비석조차 세우지 못했어.”

커다란 손이 갤러리 안쪽 정중앙에 놓인 검은 관을 쓸었다.

관 위에는 그 흔한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 외려 바로 어제 옮겨지기라도 한 듯 하얗게 윤이 났다.

“뒤늦게 깨달았거든. 그의 진짜 이름을 모른다는 걸.”

이제 나는 확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세레니예 백작은, 루는. 그간 나를 지켜보고 있던 것이다.

‘……계속.’

지난 10년을, 계속.

다른 존재로 살아가는 날 기억하기 위해.

나를 안데르트의 무덤 옆에 묻어 주기 위해.

무덤 옆에 묻어 주겠다는 그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

심장 안에 쌓인 모래가 결국 넘쳤다.

나는 볼품없이 일그러진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그로부터 등을 돌렸다.

세상이 온통 안데르트 파거의 순간으로 가득했다.

루가 바라보는 나의 존재로 이 너른 별장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 찰나의 깨달음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차마 언어로 옮기지 못할 만큼 거대한 흐름이, 해일이 되어 나를 삼켰다.

더는 떨쳐 내지 못하도록.

‘하아.’

하필 루야.

정말 하필, 루라고.

“진짜 이름이라니요?”

“모르는 건가? 흠, 하기야. 나 말고 아는 자가 이 세상에 또 누구…… 있기는 하지만. 기껏해야 한둘 정도니까. 모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나는 가장 가까운 사진 앞에 섰다.

보급 식량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멍청한 얼굴이 보였다. 장시간 수면을 취하지 못했는지 눈 밑이 까만 물감을 칠한 것처럼 움푹 패어 들어가 있었다.

그럼에도 입은 웃는다.

아마, 사진에 잘려 드러나지 못한 장소에 친구들이 있었나 보다.

“백작님께서는 안데르트에 대해 잘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알아 봤자 그대들만 못하지. 10년을 함께한 전우일 텐데.”

대화가 잠시 끊겼다.

어째서인지 몰라도, 드셰로의 씁쓸한 표정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이 관과 비석은…… 안데르트를 위해 준비해 둔 물건입니까? 그가 백작님께 부탁했던 건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는 항상 죽음을 기다렸으니까요.”

의외의 답이었다.

나를 그렇게 여겼다고?

하지만 모든 군인은 죽음을 기다리지 않나? 나만 특별하게…….

‘아. 그래서.’

“가만 보면 너는 전쟁터에서 죽고 싶어 안달 난 녀석 같다. 아니면 멀리 떠나 버리거나.”

“나랑 결혼하자. 잘해 줄게……. 진짜 잘해 줄게. 떠나고 싶지 않아질 만큼 잘해 줄게.”

그래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안데르트에 대해 제가 왜 그리 생각했는지 묻지 않으십니까?”

세레니예 백작은 드셰로의 질문에 친절히 답해 주었다.

“죽음은 삶을 누리는 자들의 정착지이지.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어. 그러니 죽음을 기다리는 것쯤 특별한 일은 아니야.”

“꽤나 염세적이시군요. 하지만 저는 백작님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기다리고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니. 그럼 살아가는 의미가 대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울컥하기라도 한 듯, 살짝 격양되어 있던 드셰로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 땅으로 뚝 떨어졌다.

“안데르트는 그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

“그에게는 평화를 누릴 권한이 있었습니다. 전운이 물러난 하늘을 올려다볼 권리가 있었어요. 남은 일평생을 영웅으로 대우받고, 찬양받으며 살아갈 의무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한데 결국…….”

“…….”

“눈을 감고 나서야 역사에 이름을 남긴 후에야 작위를 수여받다니. 죽고 나면 다 소용없는 것들인데.”

작위?

‘내가 작위를 받았어?’

처음 듣는 소식에 눈이 절로 커졌다.

그러나 아주 잠깐 놀랐을 뿐이다.

안데르트 파거가 죽은 지 언제인데. 이제 와 그런 건 의미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감성적이었군요.”

“사과할 것 없네.”

“오랜만에 옛 친우를 만나니 많이 흥분했나 봅니다. 이곳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 잠시 혼자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야.”

이후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드셰로는 갤러리를 거의 1시간 가까이 둘러봤다. 그리고 조금 갑작스러운 부탁을 남겼다.

“눈이 가는 사진이 한 장 있는데. 제게 넘겨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자네에게? 이런, 그건 예상치 못한 부탁인데.”

그가 고른 사진은 한여름을 배경으로 세 명의 남성을 담고 있었다.

시원하게 상의 탈의한 나와 라파엘로, 드셰로가 바닥에 앉아 더위를 나는 모습을.

세레니예 백작은 긴 고민 끝에 드셰로의 부탁을 수락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드셰로였기에 수락한 것 같기도 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아스트로사 왕성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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