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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89/195)

89화

“신도 말리콥스라.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인가, 세레니예 백작?”

“글쎄요.”

어물쩍 넘어가는 답을 뒤로한 아스트로사 국왕이 내 앞에서 종이를 흔들었다.

“놀랍군, 놀라워. 이보게 데이지 양. 자네는 이 추천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추천서가 추천서지 뭐겠어요.”

“이런. 뼈가 시릴 만큼 냉정한 아가씨로군.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야. 자네, 진정 두 번째 벽을 넘은 겐가?”

아, 그걸 묻는 거였나.

“네.”

“넘었다고?”

“네.”

“허. 자네의 나이가 올해 어떻게 되지?”

나는 자연스럽게 뻥쳤다.

“스물에서 서른쯤 됩니다.”

“허어! 많아 봤자 서른밖에 되지 않은 아가씨가 어떻게…….”

벌써 다섯 번째 탄식을 뱉은 왕이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오려 할 때였다.

고요한 그림자가 아스트로사 국왕과 나 사이를 가로막았다.

섬찟한 찰나.

경계심으로 쭈뼛 선 오감이 전신에 피를 돌게 한다.

본능적으로 물러서려던 두 다리는 곧바로 들려온 음성에 평정심을 되찾았다.

“경계를 놓게. 나는 적이 아니야. 그건 그렇고 진짜였군.”

나는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남성을 한껏 찌푸린 눈으로 올려다봤다.

‘이자는…….’

국왕의 검술 선생 노릇을 하던 칼레파잖아.

“진짜 여자였어.”

뭐?

“몸은 어떻습니까?”

나?

“……그냥 그런데요.”

“기이하군요. 당신의 영혼을 고려하면 그냥 그럴 수가 없을 텐데. 잔병은 없습니까? 수명은 얼마나 남았지요?”

무언가 불편한 대화다.

나는 이 칼레파에게 어떤 정보도 제공한 적이 없는데, 그는 마치 내 영혼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양 가볍지 않은 질문을 툭, 툭 던졌다.

“아, 미안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쉬이 입을 열 이야기는 아니겠군요. 어찌 되었든 그런 영혼으로 두 번째 벽을 넘었다는 것은 나로서도 기함할 일입니다. 축하합니다, 데이지 파거 양.”

얼떨결에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악수했다.

‘뭐지, 이 사람.’

착각이 아니라면, 이 백발의 칼레파는 내게 이상하리만치 친근히 굴고 있었다.

10년간 연합군에서 익힌 감에 의하면 틀림없었다.

‘나를 루의 친구로 여기는 건가?’

하긴. 친구의 친구는 나의 친구랬으니까.

“언제까지 잡고 계시려나.”

백발의 칼레파가 내 손을 놓은 건 작은 읊조림이 들린 직후였다.

그는 조금 껄끄러운 눈으로 세레니예 백작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스쿨드입니다, 데이지 양. 이렇게 건강한 모습의 당신을 만나니 많이 안심되는군요.”

이것 봐.

마치 나를 아는 것처럼 굴잖아.

“저를 언제 보셨는데요?”

“예테 추천서를 가져온 데다, 칼레파인 내 눈으로 직접 경지를 확인했으므로 당신은 예테 심사를 치를 자격이 충분합니다. 마침 내일 아침 입교 심사가 이뤄지는데 잘됐군요.”

이 남자, 루 못지않게 마이 웨이다.

내 말은 죄다 무시하고 제 할 말만 하네. 칼레파는 다 이런 건가?

아니면 내 질문이 허를 찔렀다거나.

“국왕 폐하, 이 재능 넘치는 아가씨를 그냥 돌려보내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백발의 칼레파가 은근히 압박하자, 아스트로사 국왕은 어처구니없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스승님께서 그리 극찬하시는 모습은 처음 봅니다. 뭐, 저도 데이지 양의 실력이 궁금한 만큼 허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데이지 양? 동행인들과 함께 왕성에서 하루를 보내게나.”

그 말에 나는 잠시 진과 안데르트를 떠올렸다.

‘입교 심사가 있다는 건 실력을 검증한다는 뜻이겠지. 로궤의 실력자가 나와 검을 겨루는 걸까?’

으음.

“연합교국에는 제국과 전혀 다른 식의 검술을 구사하는 검사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선배님의 뒤를 따라가서 견문을 넓히고 싶습니다.”

으으음.

“……세레니예 성에 다른 친구들이 남아 있는데, 그들을 데려와도 될까요?”

왕은 흔쾌히 수락했다.

“어렵지 않아. 이 성에 빈 침실이야 차고 넘치니까. 내일 심사를 통과한다면 곧장 로궤로 보내 주겠다. 도착까지 하루면 충분하니 준비 철저히 하고 오게.”

“감사합니다, 국왕 폐하.”

살다 살다 외국 왕성에서 잠도 자 보고.

‘어째 안데르트 파거로 살았던 때보다 더 희귀한 경험을 많이 하는 느낌이네.’

우리는 왕명을 받아 후원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세레니예 백작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애틋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쉽군. 내일이면 데이지 양을 떠나보내야 한다니. 좋은 인연은 항상 길게 이어지지 않지.”

뭐라는 거야, 이 뻔뻔한 자식.

로궤에 누구보다 먼저 가서 날 놀릴 생각만 하는 주제에!

나는 드셰로가 몬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는 틈을 놓치지 않고 세레니예 백작에게 따졌다.

“결혼은 어떻게 할 거야? 국왕의 이름까지 걸었잖아. 설마 진짜 결혼식을 치러야 하는 건 아니지?”

세레니예 백작은 헐렁하게 풀린 셔츠 단추를 천천히 잠그며 대답했다.

“이런. 그건 당연히 임시방편이었다네. 데이지 양을 애 딸린 기혼남과 결혼시키다니, 그런 실수를 어찌 벌일 수 있겠나.”

듣던 중 다행인 소리였다.

“나는 머지않아 다시 아스트로사를 떠날 거야. 늙은 후작이 죽을 때까지 편히 세상을 유영할 예정이지. 진위 여부 따위야 당사자가 모습을 감추면 알 게 뭔가?”

다분히 그다운 사기였다.

나는 예정에 없던 결혼이 무산된 데 안심하면서도 미묘한 언짢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중적인 감정은 나 자신이 인지하기에도 빌어먹게 찝찝한 감정이었다.

왜 하필 그딴……. 결혼으로 사기를 치는 거야?

“왜? 아쉬워?”

나는 내 마음에서 들린 자문인가 싶어 흠칫 놀랐다.

다행히 질문의 주인은 내가 아닌 세레니예 백작이었다. 아니, 이게 다행인 건가? 왜 다행이어야 하는데?

혼란에 물든 내 눈동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가 문득 물었다.

“그럼 그냥 나한테 시집올래?”

숨이 턱 막히는 헛소리에 나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미쳤어?”

세레니예 백작의 입가에 어쩐지 의뭉스레 느껴지는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 데이지 양이 생각해도 애 딸린 아저씨는 영 아닐 거야. 조심해. 이런 얼굴에 홀라당 넘어가면 안 돼. 번지르르하게 생긴 놈들은 다 여우거든.”

“내가 아는 남자 중 당신만큼 여우 같은 남자는 없어.”

그에 세레니예 백작은 씨익 웃곤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다행인데.”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우리는 예의 그 칼레파의 수인만 지닐 수 있다는 황금 열쇠를 사용해, 다시 세레니예 성으로 돌아왔다.

몬은 우리의 짐을 챙길 겸 진과 안데르트를 데려오기 위해 앞서 본성으로 향했다.

그런 몬을 자연스레 뒤따르려던 드셰로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마구간 동쪽, 수풀 너머 자리한 진줏빛 돔형 지붕을 가리키며 세레니예 백작에게 물었다.

“저 건물은 무엇입니까?”

세레니예 백작은 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훤하다는 듯, 드셰로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되물었다.

“궁금한가? 내가 아끼는 보물을 전시해 둔 별관이라네.”

“지붕 아래에 달린 종의 형상이 익숙해서 말입니다.”

그 말에 다시 지붕을 돌아봤다.

드셰로의 말이 옳았다.

돔 바로 아래에 커다란 검은 종이 달린 게 보였다.

“익숙하다? 아, 그러고 보니 드셰로 자작은 4년 전 연합군 소속이었나? 그런 점을 감안해도 눈썰미가 대단한걸.”

“그 말씀은. 역시 저 종은 메피스토 신전의 종이 맞다는 말씀이십니까?”

메피스토의 신전.

우리는 메피스토의 군대가 세운 신전을 통상 그리 불렀다.

‘그 신전의 종을 저기에 매달아 놨다고?’

칼레파들의 사고 회로는 원래 다 독특한가. 변절자의 동상이나 다름없는 물건을 집 안에 걸어 두다니.

“내 수집품 중 하나지. 껄끄럽나?”

드셰로는 진솔한 눈으로 긍정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흐음. 이해해. 하지만 기념하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좋아, 그 시절의 영웅께서 오신 만큼 마땅한 대우를 해야겠군. 내 소중한 보물들을 구경하러 가세. 어디서도 쉽게 만나지 못할 귀한 물건들이거든.”

세레니예 백작의 걸음이 별관을 향해 틀어졌다.

드셰로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관찰하듯 응시하다가 천천히 뒤따랐다.

별관은 고요했다.

보물을 보관해 둔 장소라면 호위나 관리인을 둘 법도 한데, 우리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세레니예 백작의 보물은 뭘까?’

보석? 아니면 마도구?

아니면 갤러리라 했으니 그림이나 조각상처럼 예술 작품에 가까우려나.

한 놈이 칼레파 역도 하고 세레니예 부녀 역도 하니 여간 헷갈리는 게 아니다.

그래도 루는 자신이 맡은 역에 꽤 몰입하는 편 같았으니, 이곳의 보물은 칼레파의 보물이 아니라 세레니예 백작의 보물로 봐야 할 터였다.

쿠우웅.

우리는 육중한 문을 세 번 지나서 거대한 전시장에 도착했다.

전시장의 천장은 아주 높았다.

이어서 드러난 전시장의 내부는, 아주 단출했다.

액자.

액자.

액자.

눈에 띄는 물건이라곤 오직 액자뿐이다.

‘루는 그림을 좋아했구나.’

어쩐지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가장 가까운 그림으로 다가갔다. 한데 막상 마주한 종이는 그림이 아니라 사진이었다.

‘……이 액자뿐만이 아니야.’

전시장에 전시된 모든 액자에 사진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사진 한가운데 담긴 인물은.

“…….”

나잖아.

안데르트 파거 시절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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