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195)

88화

“지금.”

아스트로사 국왕이 나보다, 아니, 나보다 훨씬 더 얼빠진 낯으로 되물었다.

“지금, 저 여인이 백작의 연인이라고 했나? 응? 아니면 내 귀가 잘못된 겐가? 그런 게야?”

왕성을 가로지르며 들었던 짧은 질문 한마디가 내 머릿속을 울렸다.

“내 자식인 편이 끔찍할 것 같나, 내 연인인 편이 끔찍할 것 같나?”

‘그 질문이 이런 의미였어?’

아니, 의도야 둘째 치고 나는 분명 자식 쪽이 낫다고 했는데?

왜 연인이라고 거짓말 친 거야?

‘왜긴 왜겠어. 날 놀려 먹을 속셈이겠지.’

으득. 이가 갈렸지만 차마 이의 제기할 수 없었다.

세레니예 백작의 거짓말이 선의의 거짓말이었던 까닭이다.

게다가 나 따위와 연인이라 밝혀도, 큰 손해를 보는 건 내가 아닌 세레니예 백작이지 않은가?

<제국 출신 평민과 사랑 놀음을 하는 칼레파의 수인, 세레니예 백작>

어디 가십지에 올라가 씹고 뜯기기 딱 좋은 소재였다.

그래서였을까? 세레니예 백작이 이 사태를 대체 어떻게 수습하려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거짓말입니다! 세레니예 백작과 함께 있던 예거시란 청년이 분명 저 계집을 하녀라……!”

메데이스 후작의 열 오른 외침은 단번에 가로막혔다.

“내가 그 말에 동의했었나?”

금빛의 무심한 시선이 콴 백작을 향했다.

“말해 보게, 콴 백작. 내가 내 입으로 우리 데이지 양을 하녀라 소개한 적이 있었나? 국왕 폐하 앞이니 부디 신중하게 답해 주게.”

긴장으로 거칠게 숨을 내쉬던 콴 백작은 메데이스 후작을 훔쳐보며 힘겹게 대답했다.

“어, 없습니다.”

감히 왕 앞에서 거짓을 고할 배짱은 없었나 보다.

“폐하. 메데이스 후작은 제 연인을 앞에 두고 교육을 명목으로 채찍을 휘둘렀습니다. 제게는 그 행위가 살해 위협으로 느껴졌으며, 약혼자를 지키기 위해 마땅한 대처를 했을 뿐입니다. 정당방위라고 할까요.”

“음.”

“그러므로 저는 이유 없는 매질을 한 적도, 월권을 남용한 적도 없습니다.”

아스트로사 국왕의 눈이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는 세레니예 백작의 정체를 안다.

‘그러니 대충 거짓말로 무마하려 한다는 것도 알겠지.’

하지만 그런 추측은 다른 이들도 가능했다.

“국왕 폐하! 저는 세레니예 백작의 주장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메데이스 후작.”

“만약 저 계집…… 여인이 세레니예 백작의 연인이었다면! 제가 그 자리에서 모욕을 줄 동안 단 한 번이라도 만류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지요. 단 한 번도요! 따라서 세레니예 백작의 주장은 급조된 거짓말일 게 틀림없습니다!”

짧은 침음을 뱉은 아스트로사 국왕이 세레니예 백작을 돌아봤다.

이제 어쩌겠느냐는 표정이었다.

왕의 우려가 무색하게도 세레니예 백작은 여전히 무던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는 메데이스 후작에게 되물었다.

“타당한 증거를 보인다면. 본인의 과오임을 인정할 겁니까?”

“허! 타당하다면야, 못 할 게 뭐 있겠나? 미리 말해 두지만 입맞춤 따위는 인정하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건 말 그대로 타당한 증거니까.”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세레니예 백작이 나를 돌아봤다.

순간, 지루함이 씻은 듯 거둬진 금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불안하다.

잘 손질된 가죽 구두가 한 발자국씩 가까워질 때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상냥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데이지 파거 양.”

거리가 빠르게 좁혀지고, 뜨거운 손이 내 등을 아주 천천히 이끌었다.

어느 순간, 우리는 고작 두 뼘의 간격을 두고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설마 이 이상 다가오는 건 아니겠지.

“내 소중한 연인. 내 고귀한 사랑.”

……만약 다가오면?

‘연인이니까 자연스럽게 버텨야 하나?’

그러나 상대는 또라이 중의 상또라이였다.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만약 입술 박치기라도 한다면…….

‘역시 물러서?’

물러서면 세레니예 백작이 거짓말 친 보람이 없잖아?

내 몸을 받치는 손바닥을 타고, 세레니예 백작의 심장 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등이 너무 뜨거워. 혹시 불이 붙은 건 아닐까?

지독한 양가감정에 휘말리던 것도 아주 잠시.

즐거움이 선명한 눈으로 날 구경하던 세레니예 백작이 한참 만에 입술을 뗐다.

“부디 나와 결혼해서, 평생을 함께해 주지 않겠나?”

보기 드문 진중한 낯의 청혼이었다.

청혼.

‘청혼?’

지금 청혼을 한 건가?

역설적이게도, 세레니예 백작의 차분한 시선은 내게 그 어느 때보다 섬광처럼 빠른 깨달음을 선사했다.

‘아, 이것도 거짓말이구나.’

그야 당연히 거짓말이겠지!

한데 괜히 기분이 불퉁해진다.

단호하게 거절하며 그의 종아리를 걷어차 버리고 싶었다.

“너무 떨려서 대답하기 어려운 거야? 이해해. 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면 짧게 고개를 끄덕여 주게.”

하지만 이건 그의 호의니까.

세레니예 백작이…… 루가 아니라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이 정도까지 해 줄 수 있겠는가.

어쩐지 가슴이 무거워져,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게 웃음을 터트린 세레니예 백작은 내 손을 맞잡고 아스트로사 국왕을 바라봤다.

“국왕 폐하께 간곡히 청하건대, 부디 이 결혼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왕은 이미 반쯤 넋이 나간 채였다.

“폐하.”

“…….”

“두 번 말하기 귀찮습니다.”

“……무, 물론이지. 그러겠네.”

“감사합니다.”

다음으로 그의 시선을 받은 이는 이 일의 주범인 말똥 후작이었다.

“어떻습니까, 후작님? 이 정도면 증명된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연극은 그만두게, 백작! 상대는 평민이지 않은가? 세레니예의 수장인 자네가 어찌 한낱 평민 따위와 결혼한다고……!”

“메데이스 후작.”

냉정한 음성이 단칼에 말을 끊었다.

아스트로사 국왕은 대번 싸늘해진 눈으로 메데이스 후작을 꾸짖었다.

“일을 너무 오래 끄는군. 더 볼 것 없네. 국왕인 내가 이 결혼의 증인이 된다 하지 않았나? 아니면 후작은 기어코 나까지 사기꾼으로 몰고 싶은 겐가?”

“아니요, 아닙니다. 저는 그저…….”

“세레니예 백작의 증명은 충분했네. 죄질은 자네가 더 지독해. 나약한 여인을 겁박한 것으로 모자라, 후계가 시급한 세레니예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을 겁줘 내쫓아 버릴 뻔했지. 여기서 더 해 보겠나?”

메데이스 후작은 입을 다물었다.

“물러가게.”

말똥 묻은 딸기는 이를 꽉 악문 채 고개를 숙였다.

음, 대충 무마된 건가. 역시 내 편이 휘두르는 권력의 맛은 달콤해.

두 패자가 왕실 시종의 안내를 받고 사라진 후. 왕의 후원에는 아주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흠흠.”

작은 헛기침이 들리고, 몇 발자국 앞으로 다가온 아스트로사 국왕이 내게 물었다.

“……그래서 어디에 사는 누구라고?”

대답은 세레니예 백작이 대신했다.

“제 성에 사는 제 예비 부인입니다.”

“그쪽에게 물은 게 아닌데.”

조용히 꿍얼거린 아스트로사 국왕이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솔직히 오늘 많이 놀랐네. 세레니예 백작은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할 인물이 아니라서 말이지. 홀로 충분히 해결할 사안이었는데 굳이 나를 이용했어.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닐 테고…….”

그런가. 나는 루가 세레니예 백작이란 역할에 충실했던 거라 여겼는데.

힐끔 드셰로를 살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는 몹시 침착해 보였다.

저 심정을 이해한다. 그는 세레니예 백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범인의 논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급진적인 또라이라고.

또한 동시에 드셰로는 세레니예 백작을 의심하고 있을 테다.

루라는 인물을 모른다면, 세레니예 백작이란 존재 자체가 신기루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귀국했을 때 일이 더 복잡해질 수도 있겠는걸.’

간자 드셰로, 이 불편한 동행인 같으니라고.

“흐음. 데이지 양, 혹시 내게 해야 할 말 있나? 아니면 내가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든지.”

아. 짧은 질문 한 마디가 내 머릿속에 환한 불을 밝혔다.

‘설마, 나를 국왕 앞에 데려다 놓으려고 일을 키운 거야?’

루를 쳐다봤다. 별생각 없는 눈치다.

그의 의도였든 아니든, 이 자리는 내게 있어 유일무이한 기회나 다름없었다.

나는 손을 번쩍 들어 긍정의 의사를 나타냈다.

“저.”

“말해 보게, 데이지 양.”

“국왕 폐하, 저는 로궤에 입교하고 싶습니다. 입교 심사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 예테 추천서도 받아 왔으니 자격은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뭐?”

입을 떡 벌린 왕을 앞에 둔 채, 나는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종이를 한 장 꺼냈다.

예테 추천서.

성큼성큼 다가온 아스트로사 국왕이 내게서 예테 추천서를 받아 갔다.

며칠 전, 말리콥스가 내게 비밀스레 전달한 편지. 그 편지의 정체가 바로 예테 추천서였다.

추천서와 함께 동봉된 쪽지에는 짧은 조언이 적혀 있었다.

『……예테 추천서는 오직 예테만이 작성할 수 있으므로 자네의 신분을 입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걸세.

다만 이 추천서만으로는 로궤에 입교할 수 없어. 입교 심사를 치른 후 칼레파 외곽에서 영혼과 육체를 비우는 수련을 완료해야만 완전한 예테로 인정받을 수 있지.

칼레파께선 외곽 안쪽 성역에 계실 거라네. 일단 심사를 통과하면 로궤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되니, 그다음의 일은 데이지 양에게 달린 게야.

입교 심사를 위해서는 북대륙 고위 관직에 오른 자나 신분 높은 귀족을 만…….』

말리콥스의 추천서는 내게 로궤에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다.

애초 내가 세레니예 백작을 순순히 따라온 것도 그의 신분을 이용해 입교 심사를 치르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의 정체는 내가 찾던 루 본인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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