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실없는 장난으로 여기기에는 상황이 영 껄끄러웠다. 무언가 이유가 있을 듯한데.
‘자식 혹은 연인.’
루가 아닌 세레니예 백작을 상대로 상상해야겠지.
세레니예 백작의 딸, 데이지.
‘너무 싫다.’
세레니예 백작의 연인, 데이지.
‘너무.’
싫나?
‘……그게 의문을 가질 문제야? 당연히 싫지. 싫고말고.’
한데 끔찍하단 표현으로 답하려 하니 마음이 영 불편해, 에둘러 답했다.
“자식인 편이 낫겠네.”
“자식? 흐음…….”
의미심장한 침음을 흘린 그는 이내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앞서 걷기 시작했다.
‘뭐야. 그게 끝이야?’
그런 질문은 왜 한 건데?
우리는 정원을 지나쳐 으리으리한 백색의 성 실내에 들어섰다.
사위가 좀 더 조용해지자 메데이스 후작이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세레니예 백작. 자네는 실수하는 거야. 칼레파의 권력을 등에 업고 눈에 뵈는 게 없…….”
“저게 이 성에서 제일 비싼 그림일세.”
세레니예 백작은 들은 척도 안 했지만.
나는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벽화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거대한 액자를 눈에 담았다.
그림은 피로 낭자했다.
피 웅덩이 속에서 자라나, 하늘을 찌를 기세로 가지를 편 거목의 모습은 상당히 기괴한 느낌이었다.
“뭘 그린 거야?”
“신.”
“신이라면, 칼레파?”
세레니예 백작은 이번에도 작게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실내를 지나쳐 후원 쪽으로 이동했다.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던 공간에 처음으로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하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두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부터 힘이 빠지면 어떡합니까? 집중하십시오, 폐하.”
“잠깐, 조금만…… 헉, 헉. 조금만 쉬고…….”
“조금만이 어디 있습니까? 어서 일어서십시오. 제가 가르친 제자 중 예테가 되지 못한 제자는 없습니다. 이대로 계속 세뇨트의 벽조차 넘지 못한다면 폐하께선 제 스승 경력에 첫 번째 수치로 남을 겁니다.”
“후우. 차라리 수치로 남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푸릇푸릇한 초원 위에 두 남성이 서 있었다.
서른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성은 바닥을 뒹군 채였고, 로궤식 이국적인 복장을 걸친 백발의 남성은 그를 질타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정확히는 세레니예 백작에게로.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젊은 남성은 이내 곧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며 주춤주춤 다가왔다.
짧은 금발이 땀에 젖어 이마에 덕지덕지 붙은 채였다.
“로드 칼레……?”
“세레니예.”
감히 왕의 말을 끊어 먹은 세레니예 백작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강조했다.
“세레니예 백작입니다, 국왕 폐하.”
“……그래, 맞아! 세레니예! 세레니예 백작!”
백발 쪽이 아니라 청년 쪽이 왕이었어?
옆집 청년, 아니, 아스트로사 국왕은 소박하기 짝이 없는 몰골로 달려와, 세레니예 백작을 와락 껴안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게, 이게 대체 얼마 만인가? 대체 그간 어디로 가 있었어? 어떻게 얼굴 한 번을 안 비칠 수가 있나, 응? 나 죽고 나서야 묘에 한 번 오려던 거지? 그러고도 남을 성정이야, 자네는!”
“많이 크셨군요.”
“당연하지! 무려 14년이나 못 만나지 않았나? 몇 년 전 갑자기 자네…… 아, 아니 로드 칼레파께서 내게 스쿨드 님을 보내시고는 제국으로…… 아니, 물론 이 이야기는 자네와 상관없겠지만…….”
횡설수설 떠드는 아스트로사 국왕의 모습이 옆집 친구를 보는 양 친근하기만 하다.
‘세레니예 백작이 칼레파인 걸 알고 있나 본데.’
로드라는 수식어가 의아하긴 했지만 확실했다.
하기야 왕이니 모를 수가 없겠지.
세레니예 신분을 쓸 때는 저런 얼굴을 쓴다는 것도 이미 아는 듯했다.
“어찌 되었든 자네라면 언제라도 환영이네! 한데 무슨 일인가? 용건 없이 올 사람이 아닌…….”
“폐하.”
그러나 감히 왕의 말을 끊는 자가 여기 또 있었으니.
상대는 왕의 검술 선생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로궤 신도였다.
“폐하께서 쉬지 않고 떠드시는 통에 세레니예 백작이 입도 뻥긋 못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단 그의 이야기부터 들어 보시지요.”
중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레니예 백작이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칼레파.”
놀라운 광경이었다.
왕의 검술 선생이 칼레파였다는 사실도, 같은 칼레파인 세레니예 백작이(나는 이미 그가 루라고 확신하고 있다) 아주 능숙하게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도.
‘연기에 몰입을 아주 제대로 했네.’
하지만 아무리 몰입했다 하더라도, 칼레파씩이나 되는 자가 무릎을 꿇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안데르트처럼 자존심에 죽고 사는 성격은 아닌가 보다. 세레니예 백작이 조금 새롭게 보였다.
“카, 칼레파.”
“맙소사. 칼레파? 말로만 듣던 그…….”
말똥 후작이 허겁지겁 몸을 엎드리자, 콴 백작도 뒤따라 무릎을 꿇었다.
이어서 기나긴 찬양이 이어질 동안 드셰로가 내게 속삭였다.
“데이지 양, 무릎을 꿇고 상체를 엎드리십시오. 칼레파는 북대륙 국교인 로궤의 최고 지도자입니다. 예를 갖춰야 합니다.”
드셰로의 조언에 따르며 생각했다.
네 앞의 남자도 칼레파라고.
‘그러고 보니 로궤 칼레파는 총 셋이랬지.’
걸친 의복도 말리콥스 할아버지의 저택에서 본 디안 케트의 의복과 비슷했다.
칼레파 유니폼 같은 건가. 나도 하녀 유니폼 입는데. 어쩐지 동질감이 느껴졌다.
백발의 칼레파는 지극히 껄끄러운 낯으로 세레니예 백작을 응시하다가 한숨처럼 말했다.
“이들은 국왕 폐하를 찾아뵈러 온 것 같으니, 저는 잠시 물러서 있겠습니다.”
“아, 그러시지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아스트로사 국왕은, 칼레파가 물러선 후 천천히 몸을 일으킨 이들을 빠르게 훑었다.
“모습도, 조합도 아주 묘해 보이는군. 그래서 황금 열쇠를 사용하면서까지 나를 찾아온 용건이 무엇인가, 세레니예 백작?”
“용건은 제가 아니라 이쪽에 있습니다.”
왕의 시선이 뒤편으로 향했다.
이어서 땀에 젖은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구겨졌다.
“이런. 몰골이 퍽 처참해 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메데이스 후작?”
그사이 열심히 말똥을 닦아 낸 메데이스 후작이 붉어진 낯으로 대답했다.
“안쓰럽게 여겨 주셔서 그저 송구할 따름입니다, 폐하.”
“그래서 무엇이 문제인가?”
반문이 무섭게, 메데이스 후작은 한껏 허리를 숙인 채로 목소리를 드높였다.
“국왕 폐하! 부디 신, 데혼 메데이스의 청원을 들어 주십시오! 신은 세레니예 백작의 권력 남용을 고발하려 합니다!”
“……고발? 이거 갑작스럽군. 무엇을 고발하겠다는 거지?”
“사건이 벌어진 건 지금으로부터 30분 전, 세레니예 성에서였습니다. 세레니예 백작으로부터 승마를 즐기기로 약조받았습니다만 성에는 저 외에도 제국 출신의 다른 손님이 머물고 있었지요. 세레니예 백작은 그들을 저에게 소개했고, 함께 승마를 즐기기로 했습니다.”
함께 즐기기는 무슨. 개무시했던 주제에.
“한데 제국 출신의 손님들 사이에 하녀가 있더군요. 바로 저 계집 말입니다. 저는 하녀와 승마를 즐길 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세레니예 백작의 체면도 생각 않고 뻔뻔히 선 계집이 못마땅해, 교육시키려고까지 했지요. 모두 세레니예 백작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국외를 떠도는 시간이 더 기니, 아스트로사의 문화를 잘 아는 제가 나서서 고용인 교육을 돕겠다는 마음이었지요.”
눈 하나 깜빡 않고 자신에게만 유리한 주장을 술술 내뱉은 늙은이의 모습에, 그 무뚝뚝한 드셰로마저 눈썹을 들썩였다.
“한데 무자비한 세레니예 백작은! 돌연 말채찍을 들곤 저를 후려치기 시작했습니다! 무려 일곱 대를 말입니다! 그것으로 모자라 마구간에서 퍼 온 말똥을 제 머리 위에 부었습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흠.”
“세레니예 백작은 칼레파를 들먹이며 이유 없는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자신이 칼레파의 수인임을 들먹이면서 말입니다. 그토록 신성한 의무를, 국왕 폐하의 친족이자 충성스러운 노신인 이 데혼 메데이스를 짓밟는 데 운운한 것입니다!”
믿는 게 있는 눈치다 싶었는데.
‘국왕의 친족이었구나.’
“국왕 폐하께 청원을 올립니다. 칼레파와 국왕 폐하의 권력을 등에 업고 월권을 일삼는 세레니예 백작을 벌해 주십시오! 그에게 칼레파의 수인이란 지위는 과분합니다. 부디 파면해 주십시오!”
“파면이라.”
“이 같은 주장에 거짓이 없음은, 그 자리에 함께하고 있던 콴 백작이 증명해 줄 것입니다.”
긴장한 낯의 콴 백작은 목이 떨어져 나갈 기세로 고개를 주억였다.
“예. 후, 후작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그, 그 자리에 함께했던 이들 모두 두 눈으로 똑똑히 봐, 봤습니다.”
“어떻게 생각는가? 세레니예 백작은.”
이상한 물음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니.
보통은 ‘저자의 주장이 맞는가?’라고 물어야 하지 않나.
세레니예 백작은 하품이 나오지 않은 게 용할 만큼 무료한 낯으로 서 있었다. 그러다 차분히 입을 열었다.
“메데이스 후작님의 주장에는 잘못된 부분이 있습니다.”
성의 없는 어투에 말똥 노인네가 격분을 터트렸다.
“그런 파렴치한 거짓말을!”
“후작은 조용히 하게. 잘못됐다는 뜻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왕의 질문에 세레니예 백작이 답했다.
“일단 첫 번째로, 우리 데이지 양은 하녀가 아닙니다. 결혼을 약속한 제 연인이지요.”
엥.
“뭐라?”
“데이지 파거 양이 저의 연인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