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대머리 늙은이가 난동을 피울 동안 내 곁에 다가온 진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선배님. 방금 불꽃 못지않게 뜨거운 열이 순식간에 생성되고 사라진 것 같은데, 어떻게 하신 겁니까?”
이거?
“마귀다리미법.”
“예?”
“다리미질에서 차용한 기술이야.”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진은 이내 곧 무언가 깨달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랬군요. 어떤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선배님이 집안일에 집중하라 조언하셨던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대단하십니다, 선배님. 존경스럽습니다.”
무언가 단단히 오해한 것 같은데.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깨달음을 일부 얻은 눈치라 얌전히 입 닫기로 했다.
“이, 이게 무슨…….”
그때. 당혹감에 짙게 젖은 탄식이 들려왔다.
또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세, 세레니예 백작! 미치셨습니까? 말똥을 붓다니요!”
메데이스 후작 머리 위에 말똥 한 움큼이 크게 올라가 있는 게 아닌가?
정확히는, 몬이 세레니예 백작의 지시로 직접 삽으로 푼 말똥이었다.
“이게…….”
얼떨떨한 표정의 메데이스 후작 위에서, 여유 넘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이제 조금 시원해지셨나? 음. 머리에 쏟아부으니 사라진 머리카락이 다시 생긴 느낌이고 좋은데?”
“세레니예 백작! 자네 미쳤나! 저 미친 하녀를 옹호하다니, 어찌 나를……!”
반쯤 돌아 버린 메데이스 후작의 안광이 뒤편에 엉거주춤 선 청년 귀족들에게로 향했다.
메데이스 후작은 그들을 향해 이를 드러내 보였다. 붉다 못해 새파래진 낯의 늙은이가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자네들! 세레니예 백작이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했겠지? 좋게 좋게 대해 줬더니 이 시건방진…… 위아래도 모르는 쓰레기 같은 놈! 오늘 일은 내 꼭…….”
“몬.”
언제부터인가 세레니예 백작 뒤편에 자리해, 그의 시중을 들던 몬이 메데이스 후작 앞으로 다가갔다.
몬은 가죽 장갑을 단단히 착용한 후 손을 휘둘렀다.
짜악.
늙은이는 얻어맞은 오른쪽 뺨뿐만이 아니라, 얼굴 전체가 검게 달아오른 채로 외쳤다.
“감히, 누구 얼굴에!”
짜악.
“세레니예 백작님!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란 말입니까! 당장 멈추십시오!”
“그만두십시오!”
짜악.
“제발 멈추…….”
짜악.
“…….”
짜악.
“…….”
“아, 이제 좀 조용하네. 그렇지, 몬?”
몬이 말똥으로 더러워진 장갑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예.”
모두가 다시금 고요해진 시점.
세레니예 백작은 물먹은 버섯처럼 퉁퉁 부은 메데이스 후작의 빡빡머리를 내려다보며 다정히 입술을 뗐다.
“후작.”
“…….”
“내가 왜 조용히 지내는지 아나? 칼레파께서 그리하라 명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두 귀를 쫑긋 세웠다.
안 그래도 세레니예 백작이 실존 인물인지, 단순히 루가 빌린 신분인지 아니면 그가 이용하는 허상의 신분인지 궁금했는데.
“그래, 칼레파……. 너희가 내 눈에 들기 위해 안달이 난 이유이기도 하지. 나는 칼레파의 수인(사냥꾼)이니까.”
주위 공기가 한층 더 싸늘해졌다. 아무래도 정곡을 찔린 모양이다.
“칼레파의 수인이 뭐야?”
몬은 내가 속삭인 질문에 살짝 당황하다가 순순히 답을 내놓았다.
“칼레파와 국왕 폐하의 서임을 받아, 칼레파 외곽 및 왕성 출입권과 죄인 단독 처분을 허가받은 이를 말합니다. 변절자 처리를 위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국외에 머물기 때문에 수인이라 불립니다.”
그래서 만나기 힘들다고 한 거구나.
‘왕성 출입권은 왕의 친족도 얻기 어렵다고 들은 것 같은데. 상당히 대단한 권한을 지닌 지위인가 보네.’
더불어 칼레파가 이용하기에 적절하기 그지없는 신분이기도 했다.
앞머리를 천천히 쓸어 올린 세레니예 백작이 속삭이듯 읊조렸다.
“덕분에 나름 괜찮았던 기분이 바닥을 찍었어. 이런 느낌은 오랜만인데. 고맙다고 해야 할까?”
“…….”
“후작께서 대답이 없으시군.”
“…….”
“게다가 오늘따라 아주 피곤해 보이시까지 해. 얼굴도 부었고, 상처까지 났어. 나이도 적잖으신데 말이지. 안 그런가, 몬?”
“메데이스 후작님께서 타운 하우스로 편히 돌아가실 수 있도록 마차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몬이 가볍게 손짓하자 소리 없이 대기해 있던 시종들이 불시에 튀어나왔다.
물을 가져오라 소리칠 땐 듣는 척도 안 하던 이들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단숨에 몰려나와 똥 묻은 메데이스 후작을 끌고 갔다.
초콜릿 묻은 딸기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국왕 폐하께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국왕 폐하?”
“그래! 감히 위대한 칼레파를 등에 업고, 그 힘을 운운하며 권력을 남용하고 유세 부리는 자네를 국왕 폐하께서 곱게 볼 성 싶은가! 내 오늘 일은 반드시 국왕 폐하께 알려…….”
“용서라.”
고민하는 낯으로 턱을 쓸던 세레니예 백작이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용서해 주실지 말지 나도 궁금해졌는걸. 그럼 지금 당장 뵈러 가 볼까?”
“뭐?”
“몬, 문을 열어라.”
“예.”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왕성 출입권을 가지고 있다더니, 정말 왕성으로 향하는 건가?
의문을 갖기 무섭게 몬이 재킷 주머니 안쪽에서 한눈에 봐도 귀중해 보이는 가죽 케이스를 꺼냈다.
케이스 안에서 조심스럽게 빼 든 물건은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열쇠와 자물쇠였다.
오색의 보석이 따개비처럼 달라붙어 그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마구간 앞으로 걸어가던 몬은 흠칫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주인을 돌아봤다.
“이곳 문을 사용해도 괜찮겠습니까?”
“거기보다 가까운 문이 있나?”
“없습니다. 그럼…….”
달칵.
황금 자물쇠가 목조 나무 틈새에 걸려 달랑거린다.
몬은 끼워 넣은 자물쇠 안으로 황금 열쇠를 박아 돌렸다. 인형 놀이라도 하나 싶은 만큼 조잡하고 허술한 행동들이었다.
그러나 이내 곧 열린 문 너머에는…….
“자. 늦장 부리지 말고 어서 들어갑시다, 메데이스 후작님. 눈물 콧물 짜내며 국왕 폐하께 이르러 가야지?”
말의 머리가 아니라, 낙원을 옮겨 놓은 듯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래, 그곳은 정원이었다.
아스트로사 왕국의 거대한 여름 정원.
흐릿한 회색빛 하늘 아래에 펼쳐진 장미 덩굴의 땅.
“몬? 콴 백작을 도와 메데이스 후작님을 부축해 주게. 똥내가 나겠지만 조금 참아.”
“알겠습니다.”
몬과 시종이 고성을 내지르기 바쁜 늙은이를 질질 끌고 갈 때.
나는 세레니예 백작 뒤편으로 재빨리 다가가 속삭였다.
“괜찮아?”
그는 가만히 날 내려다보다가, 채찍질로 인해 내 머리에 튄 이파리를 털어 내며 웃었다.
“누가. 메데이스 후작? 글쎄, 얼굴이 부은 것 같기는 한데. 죽을 정도는 아니지.”
늙은이의 상태를 물어본 게 아닌데.
대충 괜찮다는 의미겠다 싶어, 동행인들에게 공지했다.
“이 너머로는 나만 갈게. 나머지는 성에 머물러.”
어쨌든 나와 관련된 일이니까.
세레니예 백작의 대범함을 신뢰하기는 해도, 외부인인 우리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문제가 생기면 내가 독박을 쓰는 게 옳았다.
내 말에, 아닌 척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구경하고 있던 예거시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혼자 가겠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데이지 양. 저는 데이지 양을 보호할…….”
“제가 따라갈 테니 예거시 군은 성에 머무십시오.”
드셰로가 흥분한 예거시를 만류했다.
잠깐. 누구 마음대로 따라가?
“자작님께서요?”
“예거시 군이 따라가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여러모로요.”
“……걱정이 되기는 하나, 자작님 말씀이 옳은 것 같습니다.”
아쉬운 얼굴로 물러서는 예거시를 뒤로하고, 드셰로가 내게 말했다.
“데이지 양은 제국인입니다. 펜 로타의 귀족이자 라파엘로 각하의 대리인인 제가 곁에 있다면, 만약의 상황에 최선의 대비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이거 돌 치우려다 바위 지게 생겼네.
‘차라리 예거시를 끌고 가고 말지. 하필 불편한 인물이 끼었어.’
하지만 그의 주장이 워낙 타당했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문 안으로 발을 디뎠다.
여름 정원.
아스트로사 왕성의 정원을 묘사하는 데 그보다 적절한 표현이 없을 것이다.
여름의 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정원은 장미가 핀 원형 넝쿨 지지대로 빼곡했다.
진득하게 몰려오는 붉은 향기에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세레니예 백작을 제외한 모두가 긴장이 완연한 얼굴로 걸음을 이었다.
점차 짙어지는 말똥 내에 저 멀리 떠나 있던 내 이성이 되돌아왔다.
‘이딴 일로 왕성을 찾아오다니.’
살다 살다 별 거지 같은 일을 다 겪네.
은근한 회의감에 빠져 있을 때, 세레니예 백작이 보폭을 줄여 내 옆으로 다가왔다.
“데이지 양. 질문 하나 해도 되겠나?”
갑작스러웠으나 못 들을 것도 없겠다 싶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무슨 의미야?”
“흠. 선택지를 주는 게 편하겠군. 내 자식인 편이 끔찍할 것 같나, 내 연인인 편이 끔찍할 것 같나?”
“내가?”
“그래, 데이지 양이.”
이 무슨 두서없는 소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