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195)

85화

하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전적이라도 있었던 걸까?

필요 이상의 신랄한 비난이었다.

나는 불쾌한 티를 풀풀 풍기는 콴 백작을 보며 생각했다.

‘줘 팰까.’

그러다가 스윽, 세레니예 백작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콴 백작을 쥐어패면 저 남자의 입장이 난처해질까?

‘명색이 칼레파인데 그럴 리는 없겠지.’

하지만 예거시의 입장은 다를 것이다.

예거시는 차남이라는 이유로 집안에서 차별받지만, 진심으로 가족을 사랑하며 가업을 돕는 데 열심이었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북대륙까지 올라오는 데 엄청난 노고를 들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예거시를 위해서라도 큰 사고는 치지 않는 게 옳았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해가 지면 줘 쥐어팬다.’

장하다, 데이지. 인내심이 한층 성장했구나.

만족스러워하며 나 자신을 보듬고 있을 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다가온 진이 내 어깨를 슬쩍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선배님. 선배님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아니, 나서지 마.”

밤에 팬다니까.

안데르트는 팔짱 낀 채 무표정으로 상황을 관전하고 있었고, 드셰로는 차가운 시선으로 콴 백작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서 있었던 예거시는.

“말씀이 심하시군요, 콴 백작님.”

무려 날 보호하며 나서는 게 아닌가?

아, 이건 조금 감동인걸?

예거시는 아스트로사에 머무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나의 보호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서늘한 낯으로 콴 백작에게 덧붙였다.

“백작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이 아가씨가 모시는 마님은…….”

“예거시 파뉼라라 했나? 아까부터 눈치가 없군그래.”

아, 하지만 그의 회심의 일격은 틀어 막히고 말았습니다.

상대편에서는 콴 백작의 도우미로 메데이스 후작이 나섰군요. 주름진 턱을 쓸며 콴 백작을 거드는 꼴이 아주 꼴불견입니다.

“아스트로사에서는 아스트로사 방식을 따라야 하는 법이지. 그리고 우리들은 고용인 따위를 소개하지 않아.”

“데이지 아가씨는 고용인 따위가 아닙…….”

“됐네, 됐어. 젊으니 실수할 수도 있지. 그런 실수를 교정하는 것도 다 나 같은 연장자의 몫이고. 자네들의 격을 스스로 낮추지 말게. 바보 같은 짓이야.”

제나일과 버클리그레이튼이 언급됐기 때문인지, 예거시를 대하는 메데이스 후작의 태도가 훨씬 유해졌다.

이어서 그는 예거시에게 가르침을 준다는 듯 우쭐해진 얼굴로 말했다.

“쯧. 고작 하녀 따위가 나서서 세레니예 백작을 불편하게 만들었군. 여봐라, 하녀. 이 메데이스 후작의 말을 잘 들어라.”

촤악!

날카로운 파공음이 내 발치로 떨어졌다.

늙은이가 내게 시선을 돌리는 것과, 허리춤에 차고 있던 말채찍을 펼치는 건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부터 10분의 시간을 주마.”

그는 새까만 가죽으로 만든 말채찍의 손잡이로 내 턱을 들어 올렸다.

“당장 성으로 들어가서 10인분의 위스키를 각 잔에 준비해 와라. 아니, 10인분은 너무 적군. 20인분을 준비해 와.”

“…….”

“1초라도 늦거나 한 방울이라도 흘린다면 태형 스무 대에 처하겠다.”

촤악!

채찍이 다시 한번 바닥을 후려쳤다. 그야말로 날것의 위협이었지만.

‘흠.’

이거 참. 같잖아서.

“이보십시오, 후작님!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요구입니까? 데이지 양은 노예가 아닌 저의 동행인으로서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예거시가 분통을 터트리기 무섭게,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안데르트와 진이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콴 백작이 그런 둘을 보며 열심히 이죽거렸다.

“제국인들은 하나같이 예의가 없군. 메데이스 후작님 앞에서 언성을 높이다니!”

“예의가 없는 건 당신이겠지요, 콴 백작. 성의 주인이신 세레니예 백작님 앞에서 이게 대체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군요!”

“……아아, 그렇지.”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메데이스 후작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실수를 하고 말았어. 하녀 교육은 그 주인에게 맡겨야 하는 일인데.”

뚜벅뚜벅 걸어간 그는 자신이 쥐고 있던 말채찍을 세레니예 백작 앞으로 내밀었다.

“자아. 이 채찍은 우리 세레니예 백작이 휘둘러 보는 게 어떤가? 손에 감기는 맛이 아주 예술이야. 말 안 듣는 고용인을 교육하는 데 제격이지. 자네의 마음에 든다면 새 채찍을 구해다 주겠네.”

세레니예 백작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향한다.

몽롱한 금빛 눈동자가 제 가슴께 높이에 선 늙은이의 정수리를 한 번, 그 아래로 자리한 말채찍을 한 번 응시했다.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조소하는 것 같기도 했고 즐거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답이 어느 쪽이든 이것만은 확실하다.

이 자리의 모두가 그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예술이라.”

느리게 흘러나온 음성이 메데이스 후작의 폭력성을 자극한 것일까?

늙은이는 한층 흥분한 낯으로 세레니예 백작을 종용했다.

“그래, 감촉이 예술일세! 그러니 지금 당장 시험해 보게나. 거기 시종들! 이리 와서 이 하녀를 무릎 꿇려라!”

세레니예 백작이 채찍을 받아들었다.

그러자 메데이스 후작의 목소리가 한층 드높아졌다.

“처음 교육할 때는 속박해 두는 게 좋다네. 어린 것들은 겁이 없어서 도망치려 들거든. 날을 잡아서 이렇게 잘 교육해 두면 나중에, 컥!”

무엇인가 날아갔다. 뱀처럼 길고 번개처럼 재빠른 무언가가.

그리고 그 무언가의 정체가 말채찍이란 사실을 깨달은 것은, 메데이스 후작이 바닥에 주저앉아 땅을 굴렀기 때문이 아니었다.

“후작님!”

“메데이스 후작님!”

메데이스 후작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세레니예 백작의 모습이 너무나 호쾌했던 것이다.

‘진짜 잘 휘두르네.’

탄성이 나올 정도잖아.

“멈추십시오, 세레니예 백작님! 이게 무슨……!”

당황해 주춤거리는 콴 백작을 밀어내고, 젊은 청년 귀족 몇이 튀어나와 세레니예 백작을 말렸다.

하지만 세레니예 백작은 정확히 세 번의 채찍을 휘두른 후 멈추었다.

이어서 남긴 짧은 감상은.

“나쁘지 않네.”

평소 그대로의 가벼운 어조였다.

폭력적인 행위. 하지만 아무런 문제 없다는 듯 평화로운 태도.

그 사이에서 오는 이질감 때문일까? 사위는 순식간에 침묵으로 잠식되었다.

사실 나도 조금은 놀랐다.

물론, 세레니예 백작이 메데이스 후작의 변태 짓을 막아 줄 건 알고 있었다. 그는 루니까.

‘한데 설마 막는 것으로 모자라 그 자리에서 요절을 내 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지.’

뭘까, 이 오묘한 기분은.

왜 살짝 신나는 느낌이 든담.

몸에 열이 났는지, 셔츠 단추를 가볍게 풀어 타이를 내린 세레니예 백작이 내게 말채찍을 내밀었다.

“데이지 양도 사용해 보겠나?”

“……그래도 돼?”

“물론이지. 이 백작이 허락하겠네. 마음껏 휘둘러 보게나.”

싱긋 웃는 낯엔 그 어떤 음흉한 의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진심이다. 그래서 나는 더 산뜻해진 기분으로 마주 웃었다.

“고마워. 하지만 채찍은 필요 없어.”

“그럼?”

대답 대신 내 앞에 서 있던 안데르트와 진을 밀어 내고, 오른손으로 왼쪽 귀걸이를 잡아 뜯듯 당겼다.

파지지직.

소름 돋는 감응과 함께 백색의 검이 딸려 나온다.

세레니예 백작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채찍보다 검이다.

왜냐하면 난 검사거든.

“걱정 마, 할아범. 나는 노인 공경해. 단칼에 간다.”

마지막 인사와 함께 메데이스 후작의 머리로 검을 그었다.

“허억!”

탄식과 함께 강물처럼 일렁이는 뜨거운 열이 후작의 머리를 감싸고 사라졌다.

“하아아.”

메데이스 후작의 멀쩡한 대가리가 드러나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내가 늙은이의 머리를 벨 거라 여겼던 것일까?

쓰러진 메데이스 후작이 비명을 내지른 것도 그 순간이었다.

“으, 으아악! 뜨거워! 머, 머리가 뜨거워! 물, 물을 가져와! 물!”

“이, 이봐 하녀! 가서 물을 가져와! 어서!”

나한테 명령하면 잘도 가져오겠다, 이 머저리야.

물을 챙겨 오는 대신 검날 표면에 흩날리는 수증기를 거둬 내며 대답했다.

“좀 뜨거울 거야, 할아범. 검기로 모근 아래쪽까지 태웠거든. 평생 대머리로 살면서 비폭력 대화를 탐구하도록.”

뒤에 선 안데르트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누가 검귀 아니랄까 봐 끔찍한 검술만 구사하는군.”

끔찍하기는? 그래도 죽는 것보단 낫잖아?

그러나 메데이스 후작은 내 배려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해한 듯했다.

살려 줘서 고맙다고 백팔배를 하기는커녕 두 눈을 부릅뜬 채 미친 듯이 고성을 터트렸으니까.

“콴 백작! 저 미친 계집을 당장 내 앞에 끌고 오게! 지금 당자아앙!”

콴 백작이 흠칫하며 나를 쳐다봤다.

툭, 검 끝으로 땅을 치자 남자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뭐 하는 건가, 콴 백작! 끌고 오래도! 아무나, 아무나 저 계집을 내 앞에 끌고 와! 어서!”

당연한 말이었지만, 누구도 나를 잡아끌고 가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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